이런 표현을 꺼리긴 하지만, 굳이 하자면 인간은 체스판이라는 운명 위에 놓인 말과 같다. 때로는 킹이 되기도 하고, 퀸이 되기도 하고, 나이트로 분하기도 한다. 물론 졸(卒)인 폰도 있다. 당연히 무기로써 가장 강력한 도구는 퀸이지만, 때론 폰이 부족해 져버리곤 한다. 즉, 생이라는 게임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폰과 퀸을 적절히 가지고 있어야 게임을 버틸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아, 영화 역시 그러하다. 이 문장은 결론까지 읽고 다시 읽어야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는 옛날이야기다. 한국식으로 이야기하자면 70년대식 드라마다. 근사하게 말하자면 셰익스피어식 희곡이고, 더 포장해서 말하자면 그리스 비극의 전형이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사람들은 항상 개연성을 따지고, 나 역시 직업상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개연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막장 소설에도 나름의 개연성이 있다, 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훌륭한 이야기란, ‘개연성과 우연성이 적절하게 결합된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개연성이 너무 완벽해 모든 장면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야기로써의 매력이 없다. 굳이 자신이 오늘의 현실에서 겪은 일을 그대로 복제한 화면이나 문장을 볼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연성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 비극의 전형,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스
일상성은 체스판 위에 여러 개 놓여있는 폰(졸)이고, 그 사이를 종횡무진 횡단하는 퀸이 바로 우연성이다(물론, 폰이 있기에, 퀸도 활약할 수 있다). 우연성은 일상성 사이에서 이리 가서 부딪히고, 저리 가서도 부딪힌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다신 겪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경험으로 발전한다. 나도 일상을 예술로 승화한 문학이나 영화를 좋아하고, 때때로 그런 소설을 추구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 인류가 대대로 열광하고 소비해왔던 바로 이야기들의 원형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는 옛날이야기다. 그만큼 강력하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조명한다. 만날 수 없는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만나고, 벗어나야 하는 공간에서 주인공과 관련된 인물들은 다시 엮인다. 왜 그러냐고? 그것에 대해 그리스 비극은 이렇게 답해왔다. 그것이 여기 이 인물들의 운명이라고. 그 인물들 또한 우리 주변 인물이고, 어쩌면 당신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각자 태어날 때 짊어진 운명이 있다고.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고전들은 끊임없이 변형을 당해왔다. 예컨대, <돈키호테>나 <백경>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그 원작을 열독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세대를 넘어 전해 내려온다. 어째서 이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비록 축약본으로 보고, 할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심지어 만화가 곁들어진 동화로 보더라도, 이야기로써의 매력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매력이 없었다면, 어느 순간 시간의 공격에 항복했을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들은 옛날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장화홍련전을 비롯한 무수한 기담과 민담은 모든 사람의 입을 타고 내려왔다. 물론 그 사람 중에는 달변도, 눌변도, 허풍쟁이도, 과학자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바 역시, 훌륭한 이야기는 그 누구의 입에 오르더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하는 강력한 이야기는 화면 구성이 미흡하더라도, 문장력이 부족하더라도, 혹은 과도한 축약본으로 그 작품성이 온전히 구현되지 못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이것이 이야기의 원형이다. 이것이 바다를 건너고, 세대를 넘고,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기분을 버텨내며 살아남는 이야기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는 이러한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원형 극장에서 울려 퍼진 비극과, 우리의 길거리에서 떠돌던 민담과, 수준이 천차만별인 작가들의 문장들과, 수많은 ‘떠벌이’들의 입담 속에서, 살아남은 바로 그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꽤나 고생을 했다. 상영관이 원체 없을뿐더러, 있더라도 대부분 하루에 한 번만 상영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식상한 말이 돼버릴 정도로, 대기업이 ‘투자와 배급과 상영까지’ 도맡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어딜 가도 똑 같은 영화뿐이다. 이러다 보니, 영화산업의 패권을 장악한 이들이 선택하지 않은 작품은 자연히 소외된다. 명작이라 할지라도 전국을 통틀어 단지 몇 개 개봉관에 걸려 1일 1회 상영이란 수모를 겪곤 한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내가 다양성의 회복을 주장하는지 오해할까봐 말해두자면, 나는 다양성의 회복이 아니라 정상의 회복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기에 이 비정상적인 상영 시스템을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이처럼 ‘인간의 운명을 진지하고 흥미롭게, 그리고 땀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어디서나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나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의 시간은 말한다. 우리는 대기업의 횡포를 묵인해 왔다고. 그렇기에 우리가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선 때론 다른 도시로 가야하고, 때론 아침 일찍 일어나 단 1회 상영밖에 하지 않는 극장으로 향해야 한다고. 직장인이라면 반차를 쓰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영화까지도 생겨났다고.
묵인과 방조의 대가가 시민의 여가생활 제한으로 돌아왔다니,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지구 한 편에서 고작 문자 몇 개를 뽑아내는 것일지라도, 묵인하지 말아야한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원하는 영화 한 편 보기도 어려워진 세상이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더욱 휴식과 취향을 박탈당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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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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