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살인, 연재가 시작되다! - 『시리얼리스트』
『시리얼리스트』는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이며, 열렬하게 작가의 문학관을 피력하는 야심적인 소설이다. 데이비드 고든은 데뷔하기 전 편집자, 카피라이터, 대필 작가, 극작가, 포르노 잡지 필자 등등 해리 블로흐처럼 살아왔다. 포르노 잡지 필자를 할 때 수감자에게 팬레터를 받은 적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장르 소설도 썼지만 제대로 돈을 벌지도 못했던 시절을 겪으면서 데이비드 고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13.09.02
작게
크게
공유
제목을 듣고 궁금했다. 시리얼리스트가 무엇일까? 표지에 ‘연재물을 쓰는 작가’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serial'이었다. 펄프 잡지에 연재소설을 쓰거나, 시리즈로 이어지는 대중오락 소설을 쓰는 작가인 ’시리얼리스트‘. 데이비드 고든의 『시리얼리스트』의 주인공 해리 블로흐는 포르노, 탐정물, 뱀파이어물, SF 등 온갖 장르의 대중 소설을 쓰는 작가다. 다만 그 소설들의 작가 이름은 제각각 다르다. 그런데 ’serial‘은 우리가 연쇄 살인마라고 부를 때의 그 단어이기도 하다. 『시리얼리스트』에서도 역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해리 블로흐라고 진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겠냐마는, 그런 소설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필명으로 싸구려 소설을 쓰면 입에 풀칠은 한다. 오래 사귄 연인은 블로흐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진짜’ 작가에게로 떠나간다. 그리고 실험적인 소설을 쓰며, 그 남자와 함께 문예지를 발간한다. 고단한 세월을 보내던 해리 블로흐에게 <잡년 조련소>의 톰 스탱스에게 보내는 팬레터가 하나 도착한다. 별 생각 없이 뜯어봤는데 놀라운 제안이 적혀 있었다. 수 명의 여자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 대리언 클레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기회였다.
해리 블로흐는 대리언을 찾아간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대신에 대리언에게는 조건이 있었다. 그에게 엄청난 연서를 보냈던 여인들, 알몸사진을 보내기도 했던 여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오로지 대리언 클레이만을 위한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다. 망상에 빠진 여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작하지만, 더 큰 난관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인터뷰를 했던 여인들이 하나 둘 살해당한 것이다. 삼류 작가에 불과한 해리 블로흐는 이제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사건들을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과연 ‘삼류 작가’는 진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을 직접 만났을 뿐 아니라 그의 생각과 아이디어와 꿈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그런 것들을 조립할 수도 있었다. 나는 모든 단서를 확보했지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 손에 남아 있는 건 질 나쁜 포르노와 실제로 발생한 비열한 범죄를 듣고 끼적거린 메모 몇 장뿐이었다.
해리 블로흐는 두렵다. 그의 싸구려 소설에도 팬이 꽤 있고, 나름 좋은 평가도 받고 있지만 해리는 늘 자괴감에 시달린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여고생의 과외교사도 시작했다. 그런데 클레어란 여학생은 해리보다도 세상 물정에 더 밝은 것 같다. 해리는 클레어와 친구들의 리포트를 대신 써 주며 돈을 받고, 클레어는 해리의 비즈니스를 코치해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은 단서를 잘도 찾아내며 범인을 추리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잘 빠져나와 범인을 추적한다. 하지만 해리는 그저 삼류 소설가일 뿐이다. 해리가 잘 만드는 것은 가짜 사실, 그러나 그럴듯한 이야기들이다.
마땅한 이유가 없는데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이런 평범한 진리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일부러 돈을 주고 사서 보지 않는다. 적어도 양장본보다는 좀 저렴하지만 포켓북보다는 좀 더 비싼 대형 페이퍼백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소설은 종교와 심리학 그리고 매일 전하는 뉴스가 달성하지 못한 역설적인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 사람들이 사실을 믿도록 만드는 임무를.
『시리얼리스트』는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이며, 열렬하게 작가의 문학관을 피력하는 야심적인 소설이다. 데이비드 고든은 데뷔하기 전 편집자, 카피라이터, 대필 작가, 극작가, 포르노 잡지 필자 등등 해리 블로흐처럼 살아왔다. 포르노 잡지 필자를 할 때 수감자에게 팬레터를 받은 적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장르 소설도 썼지만 제대로 돈을 벌지도 못했던 시절을 겪으면서 데이비드 고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생각이 고스란히 『시리얼리스트』에 담겨 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보고 싶지도 않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사람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엿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진짜 독서가들, 마니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황홀함에 빠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받는 대상을 숭배하는 것처럼 허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다. 읽는 데 이유 따위는 없다.’
『시리얼리스트』는 질주하듯 정신없이 달려가면서도 중간 중간 해리 블로흐가 쓴 소설들의 몇 장면을 그대로 들려준다. 시빌라인 로린 골드의 뱀파이어 소설 『진홍빛 어둠이 내린다』 흑인 탐정 모르드카이 존스가 주인공인 J 듀크 존슨의 『더블 다운 듀스』, T. R. L. 팽스트롬의 ‘에로틱’ SF 『오, 매춘선 선장이여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이 싸구려 소설들을 읽는 재미도 각별하다. 해리 블로흐의 어떤 내면이 이런 소설들을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즐겁다. 게다가 그 장면들은 각각 해리 블로흐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나 어떤 생각을 슬쩍 들려준다. 해리가 말하듯 그 소설들은 모두 ‘진솔한 거짓’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해리는 범인을 잡고,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시리얼리스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실’이다. ‘미스터리를 쓰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소설이 현실보다 덜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스릴러의 클라이맥스든 대부분 문학 작품을 구성하는 3막짜리 플롯이든 간에 그것을 능가한다. 살면서 겪는 실제 위험과 손해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우리의 현재는 절대적으로 불확실하고, 각각의 순간은 유일하며 반복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사실 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적인 거짓을 원한다. 더 나가면 팬덤이 되고, 더 많이 나가면 뱀파이어물을 읽고 진짜 뱀파이어의 숭배자가 되어 클럽에 가고, 아예 극단적으로 가면 대리언 같은 살인마에게도 팬레터를 보내게 된다.
『시리얼리스트』는 그럴듯하다. 싸구려 소설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도 경쾌하게 진행된다. ‘문화의 쓰레기를 모조리 긁어모아 진정 놀라운 걸 만들어냈다’는 데이비드 갈첸의 찬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극히 통속적이면서도 예리하게 소설, 현실, 독자에 대해 말해주는 범죄소설이다.
해리 블로흐라고 진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겠냐마는, 그런 소설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필명으로 싸구려 소설을 쓰면 입에 풀칠은 한다. 오래 사귄 연인은 블로흐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진짜’ 작가에게로 떠나간다. 그리고 실험적인 소설을 쓰며, 그 남자와 함께 문예지를 발간한다. 고단한 세월을 보내던 해리 블로흐에게 <잡년 조련소>의 톰 스탱스에게 보내는 팬레터가 하나 도착한다. 별 생각 없이 뜯어봤는데 놀라운 제안이 적혀 있었다. 수 명의 여자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 대리언 클레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기회였다.
해리 블로흐는 대리언을 찾아간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대신에 대리언에게는 조건이 있었다. 그에게 엄청난 연서를 보냈던 여인들, 알몸사진을 보내기도 했던 여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오로지 대리언 클레이만을 위한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다. 망상에 빠진 여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작하지만, 더 큰 난관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인터뷰를 했던 여인들이 하나 둘 살해당한 것이다. 삼류 작가에 불과한 해리 블로흐는 이제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사건들을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과연 ‘삼류 작가’는 진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을 직접 만났을 뿐 아니라 그의 생각과 아이디어와 꿈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그런 것들을 조립할 수도 있었다. 나는 모든 단서를 확보했지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 손에 남아 있는 건 질 나쁜 포르노와 실제로 발생한 비열한 범죄를 듣고 끼적거린 메모 몇 장뿐이었다.
해리 블로흐는 두렵다. 그의 싸구려 소설에도 팬이 꽤 있고, 나름 좋은 평가도 받고 있지만 해리는 늘 자괴감에 시달린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여고생의 과외교사도 시작했다. 그런데 클레어란 여학생은 해리보다도 세상 물정에 더 밝은 것 같다. 해리는 클레어와 친구들의 리포트를 대신 써 주며 돈을 받고, 클레어는 해리의 비즈니스를 코치해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은 단서를 잘도 찾아내며 범인을 추리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잘 빠져나와 범인을 추적한다. 하지만 해리는 그저 삼류 소설가일 뿐이다. 해리가 잘 만드는 것은 가짜 사실, 그러나 그럴듯한 이야기들이다.
마땅한 이유가 없는데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이런 평범한 진리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일부러 돈을 주고 사서 보지 않는다. 적어도 양장본보다는 좀 저렴하지만 포켓북보다는 좀 더 비싼 대형 페이퍼백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소설은 종교와 심리학 그리고 매일 전하는 뉴스가 달성하지 못한 역설적인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 사람들이 사실을 믿도록 만드는 임무를.
‘보고 싶지도 않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사람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엿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진짜 독서가들, 마니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황홀함에 빠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받는 대상을 숭배하는 것처럼 허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다. 읽는 데 이유 따위는 없다.’
『시리얼리스트』는 질주하듯 정신없이 달려가면서도 중간 중간 해리 블로흐가 쓴 소설들의 몇 장면을 그대로 들려준다. 시빌라인 로린 골드의 뱀파이어 소설 『진홍빛 어둠이 내린다』 흑인 탐정 모르드카이 존스가 주인공인 J 듀크 존슨의 『더블 다운 듀스』, T. R. L. 팽스트롬의 ‘에로틱’ SF 『오, 매춘선 선장이여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이 싸구려 소설들을 읽는 재미도 각별하다. 해리 블로흐의 어떤 내면이 이런 소설들을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즐겁다. 게다가 그 장면들은 각각 해리 블로흐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나 어떤 생각을 슬쩍 들려준다. 해리가 말하듯 그 소설들은 모두 ‘진솔한 거짓’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해리는 범인을 잡고,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시리얼리스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실’이다. ‘미스터리를 쓰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소설이 현실보다 덜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스릴러의 클라이맥스든 대부분 문학 작품을 구성하는 3막짜리 플롯이든 간에 그것을 능가한다. 살면서 겪는 실제 위험과 손해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우리의 현재는 절대적으로 불확실하고, 각각의 순간은 유일하며 반복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사실 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적인 거짓을 원한다. 더 나가면 팬덤이 되고, 더 많이 나가면 뱀파이어물을 읽고 진짜 뱀파이어의 숭배자가 되어 클럽에 가고, 아예 극단적으로 가면 대리언 같은 살인마에게도 팬레터를 보내게 된다.
『시리얼리스트』는 그럴듯하다. 싸구려 소설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도 경쾌하게 진행된다. ‘문화의 쓰레기를 모조리 긁어모아 진정 놀라운 걸 만들어냈다’는 데이비드 갈첸의 찬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극히 통속적이면서도 예리하게 소설, 현실, 독자에 대해 말해주는 범죄소설이다.
- 시리얼리스트 데이비드 고든 저/하현길 역 | 검은숲
나, 해리 블로흐는 포르노와 싸구려 장르 소설, 대필 작업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삼류 연재 작가이다. 그러던 중 나에게 한 장의 편지가 도착한다. 놀랍게도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전설적인 연쇄 살인마 ‘포토 킬러’ 대리언 클레이였다. 네 명의 여자를 토막 내고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대리언 클레이는 자서전을 대가로,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한다. 열성적인 자신의 여성 팬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자신만을 위한 포르노를 써달라는 것.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인터뷰를 시작하는데…….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0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