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과 과장 사이에서 제 길을 찾다 - <롤러코스터> <톱스타>
10월 우리는 매우 뛰어난 배우인 하정우와 박중훈이 감독의 옷을 입고 선보인 두 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데, 선입견을 버리고 만나는 그들의 연출 작품은 어떨지 궁금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이다. 그들 스스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소재를 골랐다는 점은 과정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모두 긍정적 효과를 낳은 것은 분명하다.
201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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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달러 베이비>
<체인질링>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균형이 잘 잡힌 영화였다. 영화는 절대 관객을 교화시키거나 억지로 설득하지 않는다. 장르영화의 법칙을 따르면서 대중성을 배제시키지도 않는다. 게다가 화자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다소 고루해 보이는 내러티브조차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나면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가진다. 그것은 아마 ‘감독’으로서의 뚝심이며, 진심이며, 어쩌면 고전적이고 촌스러운 방식으로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들이는 널찍한 설득력이다. 뒤이은 <체인질링>에서 그는 불의에 맞서는 투쟁을 외롭게 펼쳐가는 한 여인의 상처받은 영혼을 아우르며, 동시에 진실을 파헤치려는 의지를 보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더욱 대단한 것은 그 자신이 지극히 보수적인 공화당원이면서도, 결코 공권력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자, 동시에 인권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보수주의자의 힘이란 오랜 삶의 연륜과 성찰이 아니라면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배우’로서의 기대치에 앞선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앞서 말하려다 보니 서론이 길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자’로서의 감독의 역량 혹은 역할 모델로서 그를 언급하고 싶었다. 10월 우리는 매우 뛰어난 배우인 하정우와 박중훈이 감독의 옷을 입고 선보인 두 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데, 선입견을 버리고 만나는 그들의 연출 작품은 어떨지 궁금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이다. 그들 스스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소재를 골랐다는 점은 과정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모두 긍정적 효과를 낳은 것은 분명하다.
감독 하정우의 <롤러코스터>
직접 시나리오 작업까지 한 하정우의 <롤러코스터>는 생생한 대사와 캐릭터가 살아있는 유쾌한 코미디 영화이다. 스릴러, 코맨틱 코미디, 정통 드라마, 느와르 등 다양한 장르에서 가장 적합한 캐릭터를 체화해서 연기해 온 배우답게 그는 출연 배우 하나하나에 애정과 성심을 담아 조율해 내면서, 그들이 쏟아내는 엄청난 량의 대사까지도 감칠맛 나게 살려낸다. 영화의 대부분이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를 배경으로 진행되어 한정적일 수 있는 공간의 단점과 단조로운 스토리는 캐릭터 코미디의 장점으로 채운다. 여기에 적나라한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배우 마준규(정경호)를 통해 배우 혹은 스타의 이면도 들여다본다. 억지로 웃어야 하는 스타의 고단한 일상도 보여주면서, 동시에 스타라는 사람들의 허영심 가득한 모습도 보여주고, 결국 천성이 바뀔 리 없다는 메시지까지 전달한다. 감독 하정우는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쾌락과 절정을 선물하지만,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롤러코스터’의 속성을 활용해 들썩거리다가 다시 원점인 소동극을 유연하게 보여준다.
실제 촬영에 앞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대본 리딩과 리허설에 투자해 배우들의 연기를 조율했다는 그의 말처럼, <롤러코스터>라는 코미디는 그 기본을 ‘배우’들 사이의 찰진 앙상블에 맞춘다. 한정된 공간과 다소 과장된 앙상블 연기는 영화적인 순간보다, 조금은 인위적인 연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완전히 새로운 장르 영화나,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기발한 발상을 기대한다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지만, 하정우 감독 스스로가 말했듯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찰진 코미디에 만족할 수 있다면 <롤러코스터>는 꽤 안정적인 연출력을 보여주는 신인감독의 성공적인 데뷔작이라 평할 만하다. 2014년 개봉을 앞둔 그의 차기작은 가족을 위해 피를 파는 한 남자의 이야기, <허삼관 매혈기>라고 하는데, <롤러코스터>의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면 충분히 기대할 만한 차기작이다.
감독 박중훈의 <톱스타>
다소 오래된 듯한 배우의 이미지에 갇혀버린 것 같았지만, 2006년 <라디오스타>를 통해 건재함을 드러낸 박중훈은 2010년 <내 깡패 같은 애인>을 통해 배우의 눈빛이, 그 진심어린 연기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2013년 신인감독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끝없이 커져가는 한 배우의 욕망을 중심으로 배우들의 생활과 그 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는 이야기 때문에, 박중훈 감독의 <톱스타>는 하정우의 <롤러코스터>보다 ‘배우 백중훈’의 역할과 몫에 훨씬 더 많이 기대는 영화가 되었다. 즉 배우가 그리는 배우의 이야기, 그 이면의 이야기라면 보다 더 사실적이고 적나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는 말이다. 배우들의 캐릭터에서 그런 기시감이 드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코믹한 이미지로 각인된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박중훈이 아니라, 평소 SNS를 통해서 무척이나 진지한 명언을 많이 남겨온 남자 박중훈의 모습을 반영한 영화 <톱스타>는 무게를 잡지는 않지만, 무척 진지한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배우 박중훈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배우가 배우를 그린 영화라는 점에서 관객들은 태식이라는 캐릭터와 박중훈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태식에게서 박중훈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탐욕스러운 매니저와, 드라마 녹화 분량 때문에 대립하는 촬영감독과의 갈등, 광고 계약과 시상식을 둘러싼 배우들 사이의 암투가 꽤 현실감 있게 그려지기에, 관객들은 계속해서 박중훈의 삶 혹은 그의 주변인물의 삶이 영화 <톱스타>의 이야기에 깊이 투영되어 있으리란 선입견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박중훈의 오랜 동반자이자 동시대 최고의 국민배우 안성기가 ‘국민배우’라는 타이틀로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허구성 보다는 더 끈끈한 현실감을 얻게 된다. 하지만 박중훈 감독은 예측불허의 행동을 일삼으며 불쑥 등장하는 김수로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소소한 웃음과 함께 영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배우출신 감독답게 배우들의 연기를 조율하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듯, 엄태웅의 연기는 날개를 달았고, 김민준의 연기는 이전에 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소이현도 두 남자 사이에서 존재감을 확실히 발휘한다. 이야기의 층위와 배우들의 캐릭터를 조율하는 능력 등 신인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충분한 미덕은 다 갖추었다.
<땡볕>
<용의자 X>
<마이 라띠마>
이미 훌륭한 배우이기도 한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나, <엄마는 창녀다>의 이상우 감독처럼 연기를 하는(그것도 잘 하는) 감독들은 꽤 많은 편이다. 류승완 감독처럼 연기에 욕심을 내어 배우를 겸하는 감독도 제법 있다. 하지만 연기만큼이나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인 배우 출신 감독은 드문 편이다. 배우출신 감독 중 선구자적인 인물은 친형 하길종 감독의 <화분> 등에 출연한 60~70년대 인기배우에서 80년대에 감독으로 변신한 하명중이다. 1984년 <땡볕>은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까지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0년에는 오랜 공백을 깨고 영화 <주문진>을 연출하기도 했다. <오로라 공주>를 통해 섬세한 연출력을 통해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한 방은진 감독은 <용의자 X>를 통해 믿을만한 연출력을 지닌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이미 다재다능하기로 소문난 구혜선은 <요술>과 <복숭아나무> 등 5편의 장단편 영화를 완성했고, 단편영화 감독으로서 재능을 보이던 유지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마이 라띠마>를 통해 장편데뷔 했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영화라는 매체가 결국 소통해야하는 대상은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사실을 조금 망각한 듯해 아쉬움을 남겼었다. 그에 비해 하정우 감독과 박중훈 감독의 두 영화는 훨씬 더 관객에게 친절하면서 감독으로서 할 말까지 챙겼다는 점에서 균형을 잘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차기작을 기대하게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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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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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김민희
2013.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