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 문경은, 농구대잔치 오빠부대의 시발점 람보슈터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연세대는 당시 농구대잔치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주인공(고아라)이 이상민의 열광적인 팬으로 등장하고 문경은, 우지원, 김훈 등 1990년대 추억의 농구대잔치 스타들이 출연하면서 풋풋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20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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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가 사상 처음으로 패권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농구 전성기가 열렸다. 연세대의 돌풍의 조짐은 이미 1991 농구대잔치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1년 1월 6일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펼쳐진 농구대잔치 2차 대회는 연세대의 돌풍의 시작을 알린 한판이었다. 당시 기아자동차, 현대전자 등과 함께 실업 3강을 구축하던 삼성전자를 상대로 패기와 근성으로 무장한 연세대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삼성전자를 90-85로 제압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변의 중심에는 연세대 90학번 1학년생 문경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경은은 외곽과 내곽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면서 팀내 최다인 29점을 올렸다. 당시 TV로 이 경기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필자는 농구대잔치 전문 캐스터로 유명한 KBS 조춘제 아나운서가 문경은이 코트에 등장해서 그의 이름을 호명하는데 계속해서 ‘문경근’이라고 소개해서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경은’이 ‘문경근’으로 둔갑한 이유는 한자로 문경은의 ‘은’이 ‘垠’으로 표기되는데, 얼핏보면 ‘근 (根)’자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자 표기가 꽤나 비중있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춘제 아나운서의 호명 실수가 일어났다. 지금의 문경은의 입지를 감안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실수인데, 그만큼 당시 농구대잔치에서 문경은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어쨌든 1991년 1월 6일 삼성전자와의 경기를 통해 문경은은 일약 전국구 스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신들린 듯이 3점슛을 꽂아대는 놀라운 슈팅감각은 금새 다른 팀 수비수들의 1호 경계대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기존에 3점 전문슈터들로 명성을 떨치던 이충희, 김현준, 최철권 등은 모두 신장이 182~183cm의 단신이었다. 하지만 문경은은 당시로선 센터를 맡을 수도 있는 190cm의 신장을 보유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센터를 맡았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외곽이 막히면 과감한 골밑 플레이로 스스로 득점 활로를 개척했다.
문경은의 리버스 백핸드 덩크슛은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헐리웃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닮은 외모로 인해 ‘람보슈터’라는 별명이 붙은 문경은 졸업반이던 1993 농구대잔치에서 신입생 서장훈, 1년 후배 이상민, 2년 후배 우지원, 김훈, 석주일 등과 함께 최고의 전력을 꾸리면서 마침내 대학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졸업 1년을 앞두고 문경은은 삼성전자 입단이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 당시 연세대에서는 현대전자 입단을 권유했지만 문경은은 사상 최고 대우인 5억 원을 제시한 삼성전자로 입단을 결정했다. 문경은은 삼성전자에 입단하자마자 VIP급 대우를 받는다. 에어컨, 마이마이 카세트, 컴퓨터 등의 가전제품 광고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삼성전자의 얼굴 역할을 맡는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갖춘 문경은의 상품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상승 하고 있었다.
중학교 교재의 모델로도 출연하며 문경은은 국민스타로 발돋움할 채비를 갖추었다. 삼성전자에는 그의 광신상고-연세대 선배인 ‘전자슈터’ 김현준이 홀로 고군분투 하는 중이었다. 문경은이 김현준과 위력적인 쌍포를 갖추게 되면 삼성전자는 1988년 이후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정상을 노려볼만한 전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실업 입단 후 처음 맞이한 1994 농구대잔치는 문경은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첫 경기였던 상무와의 대결에서 문경은은 고작 6득점에 그치면서 5반칙 퇴장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스타급 선수들보다는 소속팀에서 백업으로 뛰던 선수들이 주축이 된 상무는 근성의 플레이로 삼성전자를 잡는 파란을 일으킨다. 문경은과 김현준의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문경은이 연세대 시절 보여줬던 신들린 듯한 3점슛이 좀처럼 가동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경은이 가세했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김현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플레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선리그 동안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긴 삼성전자는 8위(7승 6패)로 결선 토너먼트에 겨우 턱걸이하게 된다. 8강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상대는 문경은의 모교이자 1994 농구대잔치에서 완벽한 전력을 구가하면서 13전 전승으로 1위에 오른 연세대였다. 연세대의 완승이 예상되었다. 예상대로 1차전에서 연세대는 낙승을 거두지만 2차전부터 경기 흐름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거친 수비를 앞세운 삼성전자는 심하다 싶을 정도의 과격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신경전으로 젊은 연세대 선수들을 자극했다. 주전 가드 이상민이 부상으로 빠진 연세대는 백업 김성현이 훌륭하게 공백을 메우지만 삼성전자의 신경전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할 수 있는 완급조절 능력이 부족하였다.
1승 1패로 균형을 맞춘 3차전 최후의 승부에서 양팀은 그야말로 혈전을 펼친다. 하지만 일어나서는 안될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리바운드볼을 다투는 과정에서 연세대 센터 서장훈이 삼성전자 센터 박상관의 팔꿈치에 뒷목이 그대로 충돌하면서 코트에 쓰러지고 말았다. 신경을 크게 다친 서장훈은 더 이상 코트에 서있기도 힘겨웠다. 이 경기 이후 서장훈은 은퇴하는 그 날까지 목에 검투사 보호대를 차고 경기에 출전해야 했다. 커다란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문경은은 김진의 절묘한 어시스트를 받아 역전 골밑슛을 작렬하며 팀 승리에 기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격한 플레이로 소녀 팬들의 민심을 잃은 삼성전자는 유력한 우승후보 연세대를 누르고 4강에 진출하게 되지만 승리보다 더 소중한 팬들과 여론의 지지를 잃게 된다. 당시만해도 이상민과 더불어 오빠부대의 쌍두마차로 자리하던 문경은은 이 경기 이후 더 이상 오빠부대 인기의 선봉장 자리에 올라서지 못한다.
1994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진출하지만 문경은에게 기아자동차의 허재는 너무도 높은 장벽이었다. 허재의 신들린 플레이에 삼성전자는 4차전에서 무릎을 꿇고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문다. 1994 농구대잔치 이후 문경은은 상무에 입대하여 역전의 용사 이상민과 다시 결합하게 된다. 이상민, 조동기, 홍사붕, 김승기 등과 함께 화려한 멤버를 구축한 상무는 이듬해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하지만 기아자동차의 벽에 막히면서 고배를 들게 된다.
1996 농구대잔치를 마지막으로 실업팀들은 프로농구로 전향하게 된다. 1997년 본격적으로 프로농구가 출범하게 되면서 기존의 농구대잔치는 화려했던 전성시대를 뒤로 하게 된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김훈, 전희철, 김병철, 현주엽, 신기성, 양희승, 홍사붕, 김승기, 김희선 등 농구대잔치 인기몰이의 주역인 X세대 스타들은 이제 프로에서 새로운 농구중흥의 임무(?)를 떠맡는다. 하지만 새롭게 도입한 용병제도는 농구대잔치 스타들의 화려한 도약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한 차원 높은 개인기와 뛰어난 탄력으로 무장한 용병 선수들은 가드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국내 선수들을 압도했다.
결국 이상민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대학 시절 만큼 화려한 기량을 선보이는데 실패한다. 이 때부터 이상민의 독주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서장훈이 외국 선수들 틈바구니 속에서 고군분투 하지만 워낙 독수공방 스타일인 서장훈의 캐릭터는 대학시절의 인기를 끌어 모으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문경은은 프로무대에서 이름이 바뀐 소속팀 삼성 썬더스에서 주포로 활약하지만 소속팀 삼성 썬더스의 김동광 감독은 1998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가드 주희정 중심으로 서서히 팀컬러를 바꿔 나가기 시작한다. 2000-2001 프로농구에서 삼성은 1987-1988 농구대잔치 이후 무려 13년 만에 챔피언을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우승의 주역은 더 이상 문경은이 아니었다. 가드 주희정, 당시 신인이었던 포워드 이규섭, 그리고 걸출한 용병 아티머스 맥클레리와 우직한 용병 센터 무스타파 호프였다.
영원히 삼성맨으로 남을 것처럼 보였던 문경은은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고 결국 연세대 시절 전성기를 함께 구축했던 우지원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SK 빅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후 SK 빅스에서 팀이 전자랜드로 넘어가게 되면서 전자랜드에서 활약하던 문경은은 2005-2006 시즌을 앞두고 SK 나이츠 유니폼을 입게 되고 이후 2009-2010 시즌까지 활동한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13시즌을 뛰는 동안 문경은은 9,347점(평균 15.3점), 1,254 리바운드(평균 2.1개), 1,351 어시스트(평균 2.2개)를 기록했으며, 통산 3점슛 1,669개(평균 2.7개)는 역대 1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경은의 프로농구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2000-2001 시즌 소속팀 삼성 썬더스가 우승했던 순간보다는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야오밍이 버티던 중국을 상대로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102-100의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이후 무려 20년 만에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당시 주축 멤버는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신기성 등 농구대잔치 중흥세대부터 김주성, 김승현 등 프로농구에서 새로운 스타로 도약하던 멤버들 그리고 겁없는 신예슈터 방성윤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의 중흥을 이끌었던 X세대 스타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 혼신의 플레이를 통해 자신들을 변함없이 성원해준 팬들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천하의 농구대통령 허재와 최고의 가드 강동희도 이루지 못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성과는 더욱 값어치가 빛났고, 어찌보면 부산 아시안게임이 농구대잔치 중흥세대가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은퇴 후 SK 전력분석 코치로 변신한 문경은은 2011-2012 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2012-2013 시즌을 앞두고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은퇴 후 다소 빨리 감독직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문경은 감독은 특유의 형님 리더십을 앞세워 빠른 시간에 선수단을 장악한다. 또한 스피드와 개인기가 뛰어난 가드 김선형과 득점력이 뛰어난 포워드 용병 헤인즈의 2대2 콤비플레이를 활용한 득점루트로 확률높은 득점공식을 성립한다. 또한 드롭존이라는 수비 포맷을 완성시켜 그 동안 허술하게 보이던 SK의 수비를 견고하게 변신시키는데 성공한다. 최부겸, 박상오, 변기훈, 김민수 등 국내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전술을 통해 SK는 2012-2013시즌 팀 역사상 최다인 44승을 거두면서 정규시즌 1위에 등극한다.
그 동안 화려한 멤버를 보유하고서도 좀처럼 조직력이 결집되지 못해 모래알 전력이라는 비아냥 속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SK는 문경은 감독의 지도력을 통해 강팀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최인선, 김태환, 이상윤, 김진, 신선우 등 기라성 같은 감독들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던 SK는 문경은 감독 체제에서 첫 우승을 거머쥐었던 2000년 이후 12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농구대잔치 중흥세대들 중 처음으로 감독직에 오른 문경은 감독은 성공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며 연착륙에 성공했다. 비록 지난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자신의 스승인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에 전술에서 완패를 당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문경은 감독은 올 시즌 새로운 진화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는 중이다.
선수 시절 농구대잔치 중흥의 시발점이 되었던 문경은은 이제 감독으로서 농구대잔치 중흥세대의 저력을 선보이는 중이다. 과연 그의 도전이 언제 결실을 맺게 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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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1991년 1월 6일 삼성전자와의 경기를 통해 문경은은 일약 전국구 스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신들린 듯이 3점슛을 꽂아대는 놀라운 슈팅감각은 금새 다른 팀 수비수들의 1호 경계대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기존에 3점 전문슈터들로 명성을 떨치던 이충희, 김현준, 최철권 등은 모두 신장이 182~183cm의 단신이었다. 하지만 문경은은 당시로선 센터를 맡을 수도 있는 190cm의 신장을 보유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센터를 맡았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외곽이 막히면 과감한 골밑 플레이로 스스로 득점 활로를 개척했다.
문경은의 리버스 백핸드 덩크슛은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헐리웃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닮은 외모로 인해 ‘람보슈터’라는 별명이 붙은 문경은 졸업반이던 1993 농구대잔치에서 신입생 서장훈, 1년 후배 이상민, 2년 후배 우지원, 김훈, 석주일 등과 함께 최고의 전력을 꾸리면서 마침내 대학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졸업 1년을 앞두고 문경은은 삼성전자 입단이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 당시 연세대에서는 현대전자 입단을 권유했지만 문경은은 사상 최고 대우인 5억 원을 제시한 삼성전자로 입단을 결정했다. 문경은은 삼성전자에 입단하자마자 VIP급 대우를 받는다. 에어컨, 마이마이 카세트, 컴퓨터 등의 가전제품 광고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삼성전자의 얼굴 역할을 맡는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갖춘 문경은의 상품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상승 하고 있었다.
중학교 교재의 모델로도 출연하며 문경은은 국민스타로 발돋움할 채비를 갖추었다. 삼성전자에는 그의 광신상고-연세대 선배인 ‘전자슈터’ 김현준이 홀로 고군분투 하는 중이었다. 문경은이 김현준과 위력적인 쌍포를 갖추게 되면 삼성전자는 1988년 이후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정상을 노려볼만한 전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실업 입단 후 처음 맞이한 1994 농구대잔치는 문경은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첫 경기였던 상무와의 대결에서 문경은은 고작 6득점에 그치면서 5반칙 퇴장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스타급 선수들보다는 소속팀에서 백업으로 뛰던 선수들이 주축이 된 상무는 근성의 플레이로 삼성전자를 잡는 파란을 일으킨다. 문경은과 김현준의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문경은이 연세대 시절 보여줬던 신들린 듯한 3점슛이 좀처럼 가동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경은이 가세했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김현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플레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선리그 동안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긴 삼성전자는 8위(7승 6패)로 결선 토너먼트에 겨우 턱걸이하게 된다. 8강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상대는 문경은의 모교이자 1994 농구대잔치에서 완벽한 전력을 구가하면서 13전 전승으로 1위에 오른 연세대였다. 연세대의 완승이 예상되었다. 예상대로 1차전에서 연세대는 낙승을 거두지만 2차전부터 경기 흐름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거친 수비를 앞세운 삼성전자는 심하다 싶을 정도의 과격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신경전으로 젊은 연세대 선수들을 자극했다. 주전 가드 이상민이 부상으로 빠진 연세대는 백업 김성현이 훌륭하게 공백을 메우지만 삼성전자의 신경전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할 수 있는 완급조절 능력이 부족하였다.
1승 1패로 균형을 맞춘 3차전 최후의 승부에서 양팀은 그야말로 혈전을 펼친다. 하지만 일어나서는 안될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리바운드볼을 다투는 과정에서 연세대 센터 서장훈이 삼성전자 센터 박상관의 팔꿈치에 뒷목이 그대로 충돌하면서 코트에 쓰러지고 말았다. 신경을 크게 다친 서장훈은 더 이상 코트에 서있기도 힘겨웠다. 이 경기 이후 서장훈은 은퇴하는 그 날까지 목에 검투사 보호대를 차고 경기에 출전해야 했다. 커다란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문경은은 김진의 절묘한 어시스트를 받아 역전 골밑슛을 작렬하며 팀 승리에 기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격한 플레이로 소녀 팬들의 민심을 잃은 삼성전자는 유력한 우승후보 연세대를 누르고 4강에 진출하게 되지만 승리보다 더 소중한 팬들과 여론의 지지를 잃게 된다. 당시만해도 이상민과 더불어 오빠부대의 쌍두마차로 자리하던 문경은은 이 경기 이후 더 이상 오빠부대 인기의 선봉장 자리에 올라서지 못한다.
1994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진출하지만 문경은에게 기아자동차의 허재는 너무도 높은 장벽이었다. 허재의 신들린 플레이에 삼성전자는 4차전에서 무릎을 꿇고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문다. 1994 농구대잔치 이후 문경은은 상무에 입대하여 역전의 용사 이상민과 다시 결합하게 된다. 이상민, 조동기, 홍사붕, 김승기 등과 함께 화려한 멤버를 구축한 상무는 이듬해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하지만 기아자동차의 벽에 막히면서 고배를 들게 된다.
1996 농구대잔치를 마지막으로 실업팀들은 프로농구로 전향하게 된다. 1997년 본격적으로 프로농구가 출범하게 되면서 기존의 농구대잔치는 화려했던 전성시대를 뒤로 하게 된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김훈, 전희철, 김병철, 현주엽, 신기성, 양희승, 홍사붕, 김승기, 김희선 등 농구대잔치 인기몰이의 주역인 X세대 스타들은 이제 프로에서 새로운 농구중흥의 임무(?)를 떠맡는다. 하지만 새롭게 도입한 용병제도는 농구대잔치 스타들의 화려한 도약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한 차원 높은 개인기와 뛰어난 탄력으로 무장한 용병 선수들은 가드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국내 선수들을 압도했다.
결국 이상민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대학 시절 만큼 화려한 기량을 선보이는데 실패한다. 이 때부터 이상민의 독주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서장훈이 외국 선수들 틈바구니 속에서 고군분투 하지만 워낙 독수공방 스타일인 서장훈의 캐릭터는 대학시절의 인기를 끌어 모으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문경은은 프로무대에서 이름이 바뀐 소속팀 삼성 썬더스에서 주포로 활약하지만 소속팀 삼성 썬더스의 김동광 감독은 1998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가드 주희정 중심으로 서서히 팀컬러를 바꿔 나가기 시작한다. 2000-2001 프로농구에서 삼성은 1987-1988 농구대잔치 이후 무려 13년 만에 챔피언을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우승의 주역은 더 이상 문경은이 아니었다. 가드 주희정, 당시 신인이었던 포워드 이규섭, 그리고 걸출한 용병 아티머스 맥클레리와 우직한 용병 센터 무스타파 호프였다.
영원히 삼성맨으로 남을 것처럼 보였던 문경은은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고 결국 연세대 시절 전성기를 함께 구축했던 우지원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SK 빅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후 SK 빅스에서 팀이 전자랜드로 넘어가게 되면서 전자랜드에서 활약하던 문경은은 2005-2006 시즌을 앞두고 SK 나이츠 유니폼을 입게 되고 이후 2009-2010 시즌까지 활동한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13시즌을 뛰는 동안 문경은은 9,347점(평균 15.3점), 1,254 리바운드(평균 2.1개), 1,351 어시스트(평균 2.2개)를 기록했으며, 통산 3점슛 1,669개(평균 2.7개)는 역대 1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경은의 프로농구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2000-2001 시즌 소속팀 삼성 썬더스가 우승했던 순간보다는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야오밍이 버티던 중국을 상대로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102-100의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이후 무려 20년 만에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당시 주축 멤버는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신기성 등 농구대잔치 중흥세대부터 김주성, 김승현 등 프로농구에서 새로운 스타로 도약하던 멤버들 그리고 겁없는 신예슈터 방성윤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의 중흥을 이끌었던 X세대 스타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 혼신의 플레이를 통해 자신들을 변함없이 성원해준 팬들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천하의 농구대통령 허재와 최고의 가드 강동희도 이루지 못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성과는 더욱 값어치가 빛났고, 어찌보면 부산 아시안게임이 농구대잔치 중흥세대가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은퇴 후 SK 전력분석 코치로 변신한 문경은은 2011-2012 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2012-2013 시즌을 앞두고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은퇴 후 다소 빨리 감독직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문경은 감독은 특유의 형님 리더십을 앞세워 빠른 시간에 선수단을 장악한다. 또한 스피드와 개인기가 뛰어난 가드 김선형과 득점력이 뛰어난 포워드 용병 헤인즈의 2대2 콤비플레이를 활용한 득점루트로 확률높은 득점공식을 성립한다. 또한 드롭존이라는 수비 포맷을 완성시켜 그 동안 허술하게 보이던 SK의 수비를 견고하게 변신시키는데 성공한다. 최부겸, 박상오, 변기훈, 김민수 등 국내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전술을 통해 SK는 2012-2013시즌 팀 역사상 최다인 44승을 거두면서 정규시즌 1위에 등극한다.
그 동안 화려한 멤버를 보유하고서도 좀처럼 조직력이 결집되지 못해 모래알 전력이라는 비아냥 속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SK는 문경은 감독의 지도력을 통해 강팀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최인선, 김태환, 이상윤, 김진, 신선우 등 기라성 같은 감독들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던 SK는 문경은 감독 체제에서 첫 우승을 거머쥐었던 2000년 이후 12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농구대잔치 중흥세대들 중 처음으로 감독직에 오른 문경은 감독은 성공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며 연착륙에 성공했다. 비록 지난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자신의 스승인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에 전술에서 완패를 당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문경은 감독은 올 시즌 새로운 진화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는 중이다.
선수 시절 농구대잔치 중흥의 시발점이 되었던 문경은은 이제 감독으로서 농구대잔치 중흥세대의 저력을 선보이는 중이다. 과연 그의 도전이 언제 결실을 맺게 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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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형진
모든 것이 풍요롭게만 느껴졌던 1990년대의 진한 향수가 느껴지는 흔적을 탐사하는 X세대 블로거. 스포츠와 영화를 보고 듣고 쓰는 것을 즐긴다. 늘 끄집어내도 변치 않는(不老) 추억들에 대한 글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