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야구인생 강동우의 부활을 기대하며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이글스는 부동의 톱 타자 강동우의 활약 덕분에 잠시나마 테이블 세터에 대한 걱정을 덜었던 시절도 있었다. 강동우가 있어서다. 강동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비운’ 그리고 또 다른 단어를 떠올린다면 ‘오뚝이’를 연상할 수 있다.
글ㆍ사진 양형진
201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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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프로야구는 시즌 종료 후에도 많은 뉴스를 생산하고 있다. 사상 최대의 돈 잔치가 펼쳐진 FA 시장은 야구 팬들과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11년 이후 2년 만에 펼쳐진 2차 드래프트로 새로운 유니폼을 입게 된 선수들에게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그 동안의 활약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 선수도 있는 반면, 좀처럼 음지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다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새로운 부활의 기회를 쥐게 된 선수도 탄생했다. 하지만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한 채 쓸쓸히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선수도 있다. 그 이름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바로 ‘비운’이라는 한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전 한화 이글스 외야수 강동우.

강동우 [출처: 한화 이글스]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한화 이글스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FA 최대어로 꼽히는 내야수 정근우와 외야수 이용규를 한꺼번에 영입하며 팀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테이블 세터진을 단숨에 보강하는 데 성공하였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이글스는 부동의 톱 타자 강동우의 활약 덕분에 잠시나마 테이블 세터에 대한 걱정을 덜었던 시절도 있었다. 강동우가 있어서다. 강동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비운’ 그리고 또 다른 단어를 떠올린다면 ‘오뚝이’를 연상할 수 있다.

국내 프로야구 역사상 단 한 순간의 장면으로 인해 야구인생이 급격하게 뒤바뀐 선수를 꼽는다면 바로 강동우라 할 만큼, 그의 야구 인생은 단 한 순간만 없었다면 FA 시장에서 한 번쯤은 거액의 부를 움켜 쥐었을지도 모른다.

경북고-단국대를 거쳐 1998년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강동우는 입단 첫 해부터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차면서 공, 수에서 매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74cm의 크지 않은 체구이지만 빠른 기동력과 장타력까지 겸비하여 당시 마땅한 1번 타자감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던 삼성 라이온즈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주었다.

공, 수, 주에서 흠잡을 데 없는 활약을 펼친 그는 1998년 12월에 개최될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병역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당시 야구 대표팀은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박재홍, 김동주, 강혁, 이병규, 조인성 등 기라성 같은 톱스타들이 대거 합류하여 이른바 ‘드림팀’으로 불리었다. 그 호화 멤버에 강동우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는 그해 입단한 초대형 거물신인 김동주(OB 베어스), 1992년 염종석에 못지 않은 고졸 선발투수 돌풍을 일으킨 김수경(현대 유니콘스) 등과 함께 강력한 신인후보로 꼽힐 만큼 맹활약을 펼쳤다. 그해 입단한 신인 선수 중에선 유일하게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였다. (강동우 이래 15년 동안 신인 타자들 중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는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

거칠 것 없이 순탄한 행보를 보이던 그의 야구 인생은 1998년 10월 16일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비운의 시작이었다. 당시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강동우는 이병규의 잘 맞은 안타성 타구를 그대로 다이빙 캐치를 하면서 팀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하지만 다이빙 캐치가 끝나면서 그의 다리가 착지한 곳은 그라운드가 아닌 펜스였다. 펜스에 그의 정강이는 그대로 으스러지고 말았다.

국내 야구장의 펜스는 선수를 보호하는 완충 역할은커녕, 오히려 선수들의 생명을 갉아 먹는 흉기로 돌변한다. 최근 들어서야 각 구장에 펜스 안전 기준이 마련되어 제공되는 등 국내 구장의 열악한 인프라 개선 행보는 더디기만 하다. 2013년에도 이런 마당에 15년 전에는 오죽했으랴. 더군다나 강동우가 다리를 부딪힌 그 펜스는 전국에서 가장 열악한 시설을 자랑하는(?) 대구구장이었다.

열악한 인프라는 한 선수의 호수비를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는 ‘무모한 행위’로 돌변시키고 말았다. 그라운드에 쓰러진 강동우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1998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강동우의 몸을 던진 호수비에도 불구하고 라이온즈는 트윈스에게 역전패를 당하면서 당시 플레이오프의 결정적인 흐름을 내주고 만다.

결국 강동우는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명단에서도 심재학(LG 트윈스)과 교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병실에서 동료들이 병역혜택의 기쁨을 누리는 그 장면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강동우는 다리에 금속 막대를 심고 나사로 고정시키는 대수술을 거치고 재활에 돌입하지만, 좀처럼 다리는 회복되지 못하고 재수술과 재활을 반복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팬들에게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동우는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김응용 감독이 지휘하고 있던 2002 시즌 재기에 성공한다. 1998시즌 타율 0.300, 10홈런 22도루로 공격의 첨병 역할을 맡은 이후 가장 최고의 성적인 타율 0.288, 9홈런 11도루를 기록하면서 당당히 라이온즈의 1번 타자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LG 트윈스와 맞붙은 2002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상대 선발투수 김민기로부터 1-1의 균형을 깨는 결승 투런홈런을 터뜨리면서 4년 전의 아픔을 깨끗이 털어낸다. 지금도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는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라이온즈는 극적으로 우승을 거머쥐게 되고, 강동우도 그 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감격을 누린다.

꾸준히 활약을 펼치던 강동우는 2006시즌을 앞두고 당시 라이온즈 사령탑인 선동열 감독과의 불화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베어스에서 많은 활약을 펼쳐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2007시즌 김현수, 민병헌 등 신예 선수들에 밀려 오히려 출장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2008시즌 KIA 타이거즈에서 1년 동안 활동한 이후 강동우는 신종길과 맞트레이드 되어 2009년부터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는다. 2009시즌 개막전부터 1번 타자로 등장한 강동우는 2009시즌 1998년, 2002년을 연상하게 하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2002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일구회의 의지 노력상을 수상한다. 2011시즌에는 13홈런을 기록하며 회춘하는 모습을 보이던 강동우는 2012시즌 다소 주춤하는 기미를 보였고, 2013시즌을 앞두고선 다시 만나게 된 김응용 감독 밑에서 의욕적인 행보를 다짐했지만 시즌을 앞두고 왼쪽 발가락 부상을 입는 불운을 겪으면서 26경기 출장에 그치게 된다.

오직 성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강동우는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선수생활이 끝날 뻔도 했었던 강동우는 불굴의 의지력으로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뻔 할 때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타고난 야구센스와 불굴의 의지력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외면 당하기 보다는 부디 좋은 기회를 찾아서 본인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다음에 명예롭게 그라운드를 떠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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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모든 것이 풍요롭게만 느껴졌던 1990년대의 진한 향수가 느껴지는 흔적을 탐사하는 X세대 블로거. 스포츠와 영화를 보고 듣고 쓰는 것을 즐긴다. 늘 끄집어내도 변치 않는(不老) 추억들에 대한 글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