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 6개월을 선고받은 한 남자가 벌이는 엉뚱하고 기막힌 이야기
20여 년간 일본 예능방송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온 히구치 타쿠지는 어느 날 다음 프로그램의 기획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 최악의 곤경에 처한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획의 단초는 점점 발전하게 되고 급기야 ‘그 남자’는 일에 파묻혀 앞만 보고 달려온 자기 자신의 모습과 중첩되었다. 결국 아이디어는 방송 프로그램이 아닌 소설의 기획이 되어 시한부 인생 6개월을 선고받은 한 남자가 벌이는 엉뚱하고 기막힌 한 편의 이야기로 탄생되었다.
글ㆍ사진 이동진
201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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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나는 책

오늘 소리 나는 책에서는 ‘책, 임자를 만나다’에서 소개해드린 김승옥 작가의 단편 중에서 『무진기행』을 읽어 드리려 합니다. 『무진기행』은 어느 문장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명문이라 어떤 부분을 읽어드려야 할지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첫 번째 챕터를 전부 읽어 드리려 합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 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분 후에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 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 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데드롱직(織)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光州)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골사람들답지 않게 앉은 목소리로 점잔을 빼면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半睡眠)상태 속에서 듣고 있었다. 버스 안의 좌석들은 많이 비어 있었다. 그 시찰원들의 대화에 의하면 농번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할 틈 이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께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무진기행』 (김승옥/민음사) 中에서


에디터 통신

한때 버킷리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고 상정했을 때 삶은 절실하게 다가오고 1분 1초가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지기 마련이지요. 비극적 설정이 주는 절박한 감동 때문인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꽤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만일 정말로 짧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면 여러분은 마지막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낼 것 같으신가요?

제가 소개해드릴 소설의 주인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계획을 꾸밉니다. 죽기 전에 아내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시한부 인생 6개월 동안 아내를 결혼시키려는 한 남자의 기막힌 이야기를 그린 소설 『내 아내와 결혼해주세요』를 편집한 한수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인 히구치 타쿠지는 원래 일본의 유명한 버라이어티 방송 프로그램 작가입니다. 새로운 기획 아이템을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인생 최대의 곤경에 처한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획의 단초는 발전하고 급기야 곤경에 처한 남자의 모델은 20여 년간 워커홀릭으로 살아온 자기 자신의 모습과 중첩되었고, 결국 죽기 전에 아내를 위해 벌이는 기상천외한 소동을 다룬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미무라 슈지는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작가입니다. 그는 20여 년간 예능방송을 기획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즐거움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급작스레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으며 앞으로 살날이 6개월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6개월 동안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철저히 이 소식을 숨긴 채 가족의 앞날을 위해 아내의 새로운 남편감을 찾는 것입니다.

맞선파티에도 나가보고, 결혼활동 책을 쓴 작가를 찾아가 상담도 받고, 지인들 중에서 아내의 배필감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결국엔 결혼상담소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하는 주인공. 과연 주인공은 아내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신랑감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부인은 남편의 엉뚱한 계략에 넘어갈까요?

이 소설의 매력은 슬픔의 소재를 따뜻한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낙천적이면서도 유쾌한 필력에 있습니다. 촌철살인의 유머 끝에 감도는 반전의 카타르시스는 대중과 오래도록 교감해온 베테랑 방송작가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소설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지만,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의 위기를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을 때야말로 즐거운 일을 떠올려야 한다”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저는 밑줄을 그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곤경에서도 밝고 즐거운 일을 떠올리는 일. 하루하루 자기만의 무거운 고민에 휩싸여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소설은 단순하면서도 귀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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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무진기행 #내 아내와 결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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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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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고,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에서 성장하였다.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4·19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승옥은 대학 재학 때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환상수첩」(1962), 「건」(1962),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1963) 등의 단편을 동인지에 발표했다. 이후 「역사(力士)」(1964),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7) 등의 단편을 196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달빛 0장」(1977),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 등을 간헐적으로 발표하면서 절필하기 전까지 2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1980년 [동아일보]에 장편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가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에 창작 의욕을 상실하고 절필했다. 1999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2003년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의 부고를 듣고 뇌졸중으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으며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김승옥의 작품에 대해 “감수성의 혁명이다. 그는 우리의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뢰를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그는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승옥의 소설은 대체로 개인의 꿈과 낭만을 용인하지 않는 관념체계, 사회조직, 일상성, 질서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 없는 윤리감각이라는 일상적인 질서로부터 일탈하려는 열망, 곧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김승옥 소설의 중심적이고 일관된 내용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소설은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현실을 압도하는바, 낭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환상수첩」, 「확인해 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생명연습」 등의 초기소설은 환각이나 환상을 쫓는 삶 혹은 현실을 초월한 삶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두드러진다. 「무진기행」 이후 현실의 엄정한 법칙성을 인정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며, 그의 후기소설은 초기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 대신에 꿈이나 환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환멸과 허무의지로 가득 찬다. 「서울 1964년 겨울」, 「야행」, 「차나 한잔」, 「염소는 힘이 세다」, 「1960년대식」 「서울 달빛 0장」 등 김승옥의 후기소설은 산업사회의 한 기호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실감을 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로스적 열정으로 기성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도를 담은 「보통여자」, 「강변부인」 등에서는 김승옥 소설이 지녔던 문제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김승옥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짝이는 빛의 내면과 동시에 속된 일상의 외관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빛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상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윤리와 무책임성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1960년대만 유효할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왜곡된 근대화의 모순 그리고 이에 대한 응전 방식으로 발화하는 새로운 엄숙주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좌초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승옥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순천문학관에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김승옥관이 마련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