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힙합은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왔다. 댄스 노래 중에 랩 안 들어가는 곡이 드물고, 심지어는 발라드에도 랩 부분이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힙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현재 미국 빌보드를 점령하는 주류 음악이지만, 한국에서는 힙합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높지 않은 듯하다.
김봉현 음악평론가가 쓴 『힙합 :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는 제목처럼 힙합에 관한 책이다. 총 15개 키워드로 힙합을 소개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르다 보면 왜 랩퍼들이 서로 싸우는지, NBA 스타와 랩퍼가 친한지, 힙합 가사에 남성성이 두드러지는지 알 수 있다.
『힙합』저자 김봉현
원래 기획한 책이지만, 집필에 가속도를 붙인 게 작년에 있었던 한국 래퍼 사이의 디스 사태였는데요. 그때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일명 '컨트롤 대란' 사건이었죠. 요즘 미국에서 제일 실력 있고 잘 나가는 젊은 래퍼인 켄드릭 라마가 동료 래퍼 빅션의 '컨트롤'이라는 노래에 피쳐링한 가사가 발단이었어요. 자기처럼 잘 나가는 동료 래퍼들을 실명으로 다 거론하면서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만, 지금 랩으로 너희를 죽여버릴 거야"라는 식으로 가사를 쓴 거죠. 그런데 사실 이게 특정 래퍼를 향한 '디스'가 아니라 힙합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경쟁'과 '배틀' 문화이거든요. 음악적으로 자웅을 가리는 과정에서 상대방보다 더 잘하기 위해 더 좋은 가사, 더 좋은 랩이 나오게 되는 거고, 결국 모두의 수준이 향상되는 긍정적 효과가 나와요. 리스너 입장에서도 래퍼들의 음악적 경쟁을 통해 더 훌륭한 예술을 접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반응이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웠어요.
물론 미국의 컨트롤 사건과 조금 다른 면이 있기는 했지만 매체와 대중의 반응을 보면서 '힙합이 대세다', '힙합이 음원차트를 점령했다', '힙합의 대중화가 완성되었다'는 말들이 모두 허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죠. 저는 '랩 배틀'을 윤리와 도덕으로써가 아닌, 문화와 예술로써 사람들이 받아들이길 기대했어요. "왜 싸우냐? 싸움은 나쁜 건데.", "싸울 거면 고소해서 법정에서 싸워라."가 아니라 "래퍼들은 랩을 하는 예술가들이니까 역시 싸움도 랩으로 하는구나."라거나 실제 주먹다짐이 아니라 음악으로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음악적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그게 저의 욕심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힙합이 대세이고 힙합이 진짜로 대중화되었다면 힙합 고유의 속성이자 멋 중 하나인 랩 배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원래 올해 3월까지 원고를 마감하려고 했었는데 속도를 좀 내서 작년 12월에 다 써버렸습니다. 이 책이 힙합이라는 음악, 문화, 삶의 방식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아프로 아메리칸, 게토, NBA 등을 서술하는 대목과 달리 여성혐오나 동성애혐오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저자님도 힙합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 논조인데요. 물론 힙합 문제이기 이전에 미국사회의 문제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어쨌든 힙합 팬으로서 앞으로 힙합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나요.
기본적으로 윤리와 예술은 별개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옳은 것과 매력적인 것은 늘 같지는 않으며 오히려 다를 때가 더 많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늘 완벽하게 올바른 행동을 해왔다면 지금 이 세상이 이 모양이지는 않겠죠. 다만 음악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궁극적으로 사람 사이의 작용이라고 본다면 힙합음악에 어느 정도의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긴 해요. 윤리적 잣대만을 절대적으로 들이미는 것에는 반대하지만요. 예를 들어 힙합의 '남성성'에 대해서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누군가는 비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음악의 중요한 효용이 공감과 감정이입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졌거나 슬픈 정서를 느끼고 싶을 때 윤종신의 발라드를 듣는 것처럼, 무언가 역동적인 에너지를 얻고 '내가 짱'이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힙합을 많이 듣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힙합의 효용은 바로 힙합의 적절한 남성성에서 나오고요. 다양한 분야와 층위의 여러 관점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봐요. 이리도 보고 저리도 봐야 하는 거죠. 저 개인의 경우를 말하자면, 전 힙합의 적절한 남성성을 즐기지만 동성애 폄하 경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편이에요. 사랑은 다 같은 사랑이거든요. 물론 책에도 나와있듯 힙합의 동성애 폄하 경향에 근거와 맥락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앞으로의 힙합은 동성애도 포용하는 쪽으로 흘러갔으면 합니다.
힙합 스타들의 노랫말에 ‘자수성가’가 주요한 테마라고 지적했습니다. 김봉현 저자가 바라는 ‘자수성가’라는 게 있을까요? 직접 뮤지션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예술가적 소질이 별로 없는 건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직접 뮤지션이 되고픈 맘은 딱히 없어요. 대신에 지금의 제가 자수성가의 과정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부모님에게 물려받을 큰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름 좋은 대학 나와서 안정된 직장을 안 다녀본 것도 아니지만, 결국 지금은 혼자 이름을 걸고 좋아하는 것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크게 잘못 가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열심히, 또 잘 해서 제가 속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싶습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처럼 훗날 사람들의 '리스펙트'를 받을 수 있다면 멋진 일이겠죠. 그러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했듯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동시에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했잖아요. 어떤 계기로 음악 평론가가 되었나요?
어떤 낭만적인 계기나 드라마틱한 동기까지는 없어요. 그런 걸 거짓말로 지어낼 수도 있지만 그건 힙합이 아니니까요. 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때 교내 글짓기 대회나 백일장이 열리면 늘 상을 받았고 저 스스로로 이과보다는 전형적인 문과 체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또 어릴 때부터 가요 LP나 테이프를 모으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결합해보자고. 마침 한 음악웹진에서 필자 모집을 하길래 지원을 했고 다행히 합격을 했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죠.
『힙합』저자 김봉현
음악 평론도 평론가마다 글 쓰는 취향이 다양한데요. 음악을 기술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역사 사회적 맥락에서 다루기도 하는데요. 평론을 쓸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시나요?
대상에 따라 달라져요. 여러 관점을 늘 손에 쥐고 있다가 당시의 상황에 따라, 혹은 대상의 특성에 따라 어떤 것을 먼저 꺼내고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적용할지를 그때그때마다 결정하는 거죠. 예를 들어 사회비판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가득 담은 힙합 앨범이 있다면 아무래도 선율이나 사운드 자체에 대한 관점보다는 가사 내용과 동시대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겠죠. 기본적으로는 '감상'과 구분되는 '비평'을, '취향'과 구분되는 '안목'을 제시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문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한국어로 라임을 짜는 건 영어에 비하면 어떤가요?
아무래도 조금 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겠죠. 그래서 옛날에는 한국 래퍼들이 끝말 맞추기 하느라 바빴어요. 이상, 현상, 망상, 공상, 하면서 내용도 억지스럽게 흘러가고. 하지만 버벌진트나 피타입, 엠씨메타 같은 래퍼들이 한국어의 특성을 활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운율감도 생기는 한국말 라임 방법론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덕택에 이제는 어느 정도 한국말 라임이라는 것이 정립된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앞으로도 고민은 계속 되어야겠지만.
힙합은 미국을 점령하긴 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아이돌 댄스 그룹에 비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는 못한데요. 한국에서 힙합이 아직은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를 어떻게 보시나요.
여느 외국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식된 음악이자 문화라는 태생적 한계도 있는 것 같고요. 애초에 힙합이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 문화나 삶의 방식으로써가 아닌, 음악적 도구로써의 랩이 먼저 들어왔다거나 혹은 힙합 고유의 멋과 매력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팝'으로서의 힙합을 그냥 흉내내고 소비했다거나, 힙합의 남성성과 공격성, 경쟁과 배틀 속성이 한국인에게 맞지 않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 힙합으로 포장되어 인기를 끄는 음악을 들여다보면 정작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힙합의 멋과 매력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이 무늬만 힙합인 음악에 길들여져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거예요. 더 자세한 건 아메리카노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해드릴게요.
힙합을 들어보고 싶은데, 어떤 앨범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음반이나 사이트를 소개해 주세요.
1) Nas [Illmatic](1994)
이 앨범은 그냥 힙합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비트와 랩. 그냥 날 것의 힙합 그 자체죠. 스무 살의 나스가 자기가 겪어온 거리의 삶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데요. 그 방식과 표현이 다분히 시적이고 아름다워요. 말하자면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거리의 시인'인 거죠. 20주년 앨범이 얼마 전에 나와서 요즘 저도 한창 다시 듣고 있는데 시대를 초월하는 클래식으로 남을 것 같아요. 20주년 앨범의 해설지를 제가 썼다는 건 굳이 말 안 할게요.
2) Kendrick Lamar [Good Kid, M.A.A.D City](2012)
'컨트롤 대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주인공, 켄드릭 라마의 메이저 데뷔 앨범이에요. 이 앨범은 한마디로 '이 시대의 [Illmatic]'이라고 보시면 돼요. 스무 살의 나스가 1994년에 데뷔하면서 [Illmatic]이라는 클래식을 내놓았다면, 켄드릭 라마는 2012년에 데뷔하면서 [Good Kid, M.A.A.D City]라는 클래식을 내놓은 거죠.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은 물론이고 최고 수준의 랩 테크닉이 주는 카타르시스, 서부힙합의 지역 색채를 훌륭하게 계승한 사운드 등 여러 모로 완벽에 가까운 데뷔 앨범이에요.
1) 힙합플레이야 (http://hiphopplaya.com/)
15년 정도 된 사이트예요. 힙합과 관련한 다양한 뉴스가 올라오고, 자체 스토어도 운영하고 있어요. 쉽게 말해 힙합계의 네이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 힙합엘이 (http://hiphople.com/)
요즘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사이트예요. 외국힙합 초심자에게 특히 좋은 곳이죠. 자막 뮤직비디오도 많구요.
3) 김봉현맨 (http://kbhman.com/)
제 홈페이지입니다...
좋아하는 여자연예인이 있다면?
일단 카라 강지영의 영원한 팬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요. 2년 전인가 올림픽 공원에서 하는 카라 콘서트에 갔었는데 약 10미터 거리 정도에서 저랑 눈이 마주친 적이 있어요. 그 상황에서 저한테 손을 흔드는 걸 제 폰으로 찍어놓은 영상도 있고요. 카라 팬클럽에서 게시판을 통해 저를 언급한 적도 있어요. 그리고 지영이는 제 대학교 후배이기도 해요. 학번 차이는 좀 나지만. 아무튼 스타라고 자만하지 않고 인성도 올바르게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건방진 건 싫거든요. 자신감은 좋지만요. 개인적으로 음색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컬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이 있다면?
이번 책에 사인을 할 때 정해놓은 문구가 있어요. '힙합: 음악, 문화, 삶의 방식'이라는 문구인데요, 그저 유행이나 음악만으로써가 아닌, 문화이자 삶의 방식으로서의 힙합이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번 제 책이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쁜 일이겠고요. 또 대상이 어떤 것이든 무엇을 판단할 때에는 언제나 그 복합적인 맥락과 이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래퍼들의 자기자랑이나 여성폄하 경향 등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분이 있다면 제 책에 있는 여러 관점의 서술을 통해 의문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이해와 별개로 그 후의 판단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 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김봉현 저 | 글항아리
힙합에 씌어진 온갖 오해와 편견을 벗겨내고 힙합의 본래 얼굴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힙합 소개서 『힙합』. 힙합에 대해 가지는 의문에 저자 나름의 정리와 대답, 더 나아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힙합의 예술적 면모와 긍정적 에너지, 그리고 우리네 삶으로의 실질적인 확장 가능성까지 정리하여 담았다. 힙합이라는 음악이자 문화, 삶의 양식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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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sunnydaler
201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