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과거의 남자가 나를 호텔방으로 불러낸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니,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일까요? 공연 때마다 대학로를 술렁이게 만드는 연극 <썸걸(즈)>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주인공 영민은 자신의 연애사를 소설로 써낸 인기작가. 결혼을 앞둔 그는 과거의 ‘썸걸’ 네 명을 각각 호텔방으로 부릅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보고 싶고, 이별 과정에서의 잘못도 털어내고 싶다나.
재밌는 것은 그의 엄선된 여자들도 영민의 제안을 뿌리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다른 생각과 바람을 안고 호텔방을 찾죠. 일순간 무대에는 한 남자와 네 여자의 수많은 마음들이 부딪힙니다. 처음에는 재밌는 설정에 너그러운 웃음을 건네던 관객들도 어이없음과 분노로 치달으며 무대를 향해 욕을 퍼붓습니다. 남녀의 복잡 미묘한,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하고 모순된 마음이 객석으로 확장된 것이죠. 기자는 무대 위 호텔방에 직접 앉아 있습니다. 영민 역의 최성원 씨와 마주하고 있는데, 극에 빠져서인지 인터뷰가 아니라 문초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욕은 저보다 (정)상윤이 형이 더 먹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초반인데, 갈수록 관객들의 리액션이 세지기는 해요. 한 번은 ‘저 새끼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는데, 아직 무대에 오른 횟수가 많지 않아서 생각보다 심한 반응이 오면 좀 흔들리더라고요(웃음).”
관객들에게 욕 좀 먹었나 물었습니다. <썸걸(즈)>는 욕을 많이 들을수록 객석과 제대로 교감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녀가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상윤이 형 공연을 봤는데 욕까지는 안 나오더라고요. 같은 남자라서 그런지, 웃음소리가 좀 다른 거죠. 여자 분들이 ‘뭐야, 헉’ 한다면 남자들은 ‘어허허, 아이 왜 그랬어?’라며 멋쩍게 웃게 되죠. 사실 이 작품에 나오는 대사 그대로를 던지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의 말을 건네고 도망친 경험이 다들 있을 테니까요.”
결혼을 앞두고 과거의 여자들을 만난다! 이해하기 힘든 설정이면서 동시에 어쩌면 다들 그렇게 하고 싶은데 못할 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캐릭터 분석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이 남자 영민,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이 남자가 안타깝고 불쌍하더라고요.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우리 정서에 맞게 각색됐지만, 원작 그대로 읽었을 때 이 남자는 단순 ‘개새끼’는 아니고, 사람을 쉽게 못 믿고 사랑할 때 자기를 다 보여주지 못하는 상처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여자를 후리고 이용한 다음에 버리는 게 아니라, 이 여자에게 정착하고 사랑을 보여주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그래서 깔끔하고 편리하게 도망치는 게 아닌가. 저는 그런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어요. 좀 안타까운 것은 ‘이 남자가 얼마나 나쁜 놈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걸 기대하고 오는 분이 반 이상인 것 같고, 그래서 지금은 절충 선을 찾고 있죠.”
확실히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나쁜 남자의 이별 공식’ 정도라면 너무 쉬운 작품이 되니까요. 2007년 초연 때부터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이석준 씨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동시에 무척 부담일 것 같은데요.
“딱 질문하신 그대로예요. 1부터 100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 생각을 하셨겠어요. 제가 아무리 해도 뱁새가 황새 쫒아가는 격이죠. 명확한 가이드 맵이 있으니까 편하면서도 불편했는데, 석준이 형님은 가장 고난위도의 모습을 원하셨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미안하고, 정말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고, 진심으로 사과하면서도 그런 모습이 ‘개자식’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기자는 <썸걸(즈)>의 주인공이 최성원 씨라고 하기에 동명의 다른 뮤지컬배우를 떠올렸습니다. 2010년 <오! 당신이 잠든 사이>로 데뷔한 최성원 씨가 소화하기에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이도, 평소 선한 이미지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맞아요. 상윤이 형은 농담인지 몰라도 연습 초반에 ‘이 남자 정말 착하다’ 그러는 거예요. 다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사과하고 잘못된 거 바로잡는다고. 그 말이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저는 무대 밖에서도 ‘나쁜 남자’는 아니에요. 싸우다 지쳐서 연락 안 하고, 자연스레 상대에게 헤어짐을 종용한 것 정도? 그래서 후기를 보면 재밌어요. 상윤이 형 같은 경우는 동남아에서 킬러를 고용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자기 선에서 끝낼 수 있을 것 같대요(웃음).”
나쁜 여자에게 오히려 당할 것 같은 최성원 씨가 어떻게 영민 역에 캐스팅됐을까요?
“제가 ‘이석준의 이야기쇼’에 두 번 나갔는데, 말장난하고 깐족거리는 모습을 유쾌하게 보셨나 봐요. 석준이 형은 이 배역이 잘 생긴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연기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유연성이 좋아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셨어요. 거기에 부합된 사람을 찾다 제가 생각났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연초까지 <베르테르>의 카인즈로 열연했던 최성원 씨는 현재 <썸걸(즈)>와 함께 <트레이스 유>의 구본하로도 열연하고 있습니다. 데뷔 이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타고난 유연성도 제대로 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다행히도 좋은 작품들을 계속 만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고, 무대에 오를 때 책임감과 절실함, 절박함이 쌓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지 않나 싶어요. <오 당신..>이나 <김종욱 찾기>를 할 때는 멋모르고 재밌고, 뭔가 보여주고 싶고 나를 알리고 싶은 그런 에너지가 많았다면, 이제는 준비한 걸 보여드리고 싶은 그런 맘이랄까요.”
연극이고 주연이라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썸걸(즈)>가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 같네요.
“그렇죠. 석준이 형도 <썸걸즈>로 인해서 연극 쪽에서 얼굴을 알리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런 바람과 욕심이 있어요. 그런데 아직 어려워요. 블랙 코미디가 돼야 하는데, 한 발 더 가면 로맨틱 코미디가 되고, 그게 두려워서 안 가면 밋밋한 극이 돼 버리니. 그 접점이 무척 어려운 것 같아요. 또 남자 배우는 네 명의 여배우를 차례로 만나면서 계속 다른 감정을 이어가야 하고, 여배우들은 자기 차례에 갑자기 감정을 살려야 하니까. 그런 구조적인 어려움 때문에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집중을 못 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바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기자로서 신인 때 만났던 배우를 몇 년의 시간을 두고 이렇게 다시 만나면 재밌습니다. 연기를 비롯한 무대 장악력은 물론이고,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나 답변 자체에서 그간의 경험이 묻어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성원 씨의 몇 년 뒤도 무척 궁금하네요. 5년차 배우. 한참 탄력 받고 자신감도 생겼을 텐데, 배우로서 어떤 목표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속된 말로 빨리 스타가 돼서 돈 많이 벌고 싶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마음이 현격히 줄고, 대신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책임감과 행복감, 성취감이 비교도 안 되게 커졌어요. 근래에 석준이 형 보면서도 그렇고, 무대라는 공간에서 작업하고 인연을 만들어가고 작품을 필모그래피로 올리는 과정이 녹록치 않다는 걸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회에 책임을 지고 100%를 처절하게 다 쏟고 싶고.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배우라는 이름에 걸맞은 길을 가야한다고 인지하는 것 같아요.”
2007년 초연 때 <썸걸(즈)>의 주인공은 이석준, 최덕문 씨였습니다. 두 배우가 보여주는 이미지도 확연히 달랐죠. 그 계보를 잇는다면 정상윤이 섹시하고 농염한, 최성원은 귀엽고 능청스런 남자일 겁니다. 멀쩡하게 생겨서 나쁜 짓 하는 남자도 밉지만, 착하게 생겨서 여자 마음에 못 박으면 더 욕 나오죠. 최성원 씨의 배우로서의 유연함이 거기까지 확대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연극 <썸걸(즈)>는 7월 20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됩니다. 사랑할 때 여러분은 어떤 비겁함과 마주했었는지, 묻어둔 깊은 상처를 확인해 보시죠. 6월부터는 결혼을 앞둔 여자(전미도)가 과거의 네 남자를 만나는 <썸걸’(즈)>도 교차 공연됩니다. 처음 선보이는 무대라 기대되는데요. 그 여자는 또 얼마나 관객들의 욕을 먹는지 곧 알려드릴게요.
[관련 기사]
- <닥터 이방인> 선생님, 제 심장이 왜 이러죠?
-뮤지컬 <캣츠> 볼까? 한국 초연 <드라큘라> 볼까?
- 최고의 스타일리쉬 락 뮤지컬 <헤드윅>
-자꾸만 가게 되는 묘한 클럽, 뮤지컬 <트레이스 유>
-홍대 인디 밴드가 변하고 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서유당
201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