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전엔 이렇게 쓰여 있다.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내 사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임을 알아채고 인터넷 서점을 뒤진다. 적당한 책이 하나 보인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직한 제목이다. 지난 4세기 동안 이를 규정하려 했던 11가지 개념을 꼼꼼히 소개한다. ‘알 수 없는 그 무엇’,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나타내는 선’, ‘아폴로적, 디오니소스적 접근’…… 맙소사, 끝까지 읽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예술을 개념화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피라미드 탈출
“레벨에 맞는 일을 해야지. 그건 아니야, 하지 마.” 그 사람은 눈을 지그시 감음으로써, 진정으로 나를 위해 하는 말임을 나타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의 좌표를 보여주는 게 익숙해 보였다. 눈두덩에 자리 잡은 실주름으로 습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눈을 감는 몇 초 동안 ‘그러니까 당신은 이 정도 급인데, 그 일은 요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 하고 계산기를 두드렸을지 모른다. “그 일이 뭐 어때서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눈을 끔뻑이며 맞받아쳤다. 하지만 동시에 주저했다. ‘조금 더 고상한 일을 찾아볼까?’ 하고 되물었다.
레벨에 맞지 않는 그 일이란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 나가서 침구와 방을 정리하고, 관리를 도울 사람을 찾는 구인 광고가 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홋카이도를 안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 흥미로운 레벨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하루 몇 시간 일본어 학원에 다니고, 격주로 마감을 넘기는 것 말고는 (까놓고 말해) 한량이나 다름없는 날의 연속이었다. 일하지 않으니 자존감도 땅속으로 추락했다. 한국을 떠난다며 알량한 결의를 다졌던 자신에게 여러모로 찔리기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시작하면, 큰 전환점이 될 터였다. 그럼에도 그 사람 생각이 옳지 않다고 꼬집을 수 없었던 건, 내 머릿속에도 나름의 계급 피라미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는 다음 주에 면접을 보기로 했다. 합격한다면, 백수가 하락할 곳은 더는 없으니 지위 상승이다. 아니, 이참에 피라미드 같은 건 깨고 탈출하는 게 낫겠다.
예술적 순간
예술도 피라미드 꼭대기 언저리에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배워본 적도,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소위 상류층이란 곳에 편입할 기회가 생기면,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가끔 전시회나 무료 음악회 같은 데에서 몇 번 흉내랍시고 내긴 했다. 작은 울림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무 감흥 없이도 감동한 척 겉모습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높은 수준의 교양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피라미드 속에선 그렇게 어리석었다.
알고 보면 우린 일상에서 자주 예술을 말한다. 사전적 정의나 11가지 개념 분류를 떠나 단순하게 접근해 본다. ‘김치찌개 맛이 예술이네.’, ‘오늘 날씨가 예술인데.’, ‘벽지 색깔이 예술이야.’ 등등. 그 느낌을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필수 조건은 진실함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웃거나 울기도, 마음을 달리 먹기도, 심장이 콩닥거리기도 한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여진이 밀려올 때 우린 ‘예술’이라고 말한다.
수백 개의 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흘러갔던 바퀴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나/ (중략)/ 숨 쉴 때마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바닥/ 나무뿌리 같은 혈관들이 살갗으로 불거져 나온다/ 나를 떠난 것과 나에게 떠밀려 온 것/ 사이에서, 나는 뜨거워진다/ 온몸에서 문이 열리고 있다 _김지녀 『여진』
전시회나 음악회가 아니어도 예술적 순간이 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귀가 열리고, 눈길이 머무는 곳에 집중해 보자. 어쩐지 내가 낯설고 뜨겁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출퇴근길 지하철 창 밖을 우두커니 지키던 올림픽 대교, 다급하게 마지막 빛을 쏟아내는 해 질 녘 하늘,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 친구가 그려준 그림, 노래방 18번의 후렴구, 하코다테의 안개 낀 풍경, 새하얀 눈밭을 훤히 밝히던 보름달……. 지금의 나를 예전과 다르게 만든 그 모든 떨림이 바로 예술의 여진이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예술과의 밀회
바삐 움직인 하루의 끝에 남은 건 무엇인가? 끈적이는 몸과 턱밑까지 차오르는 불쾌한 공기뿐인가? 머릿속은 온통 도망가고 싶은가?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터질 것 같다면, 게다가 여름 휴가지를 아직 못 정했다면, 삿포로를 추천한다. 마음속 좌표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특급 추천’이다. 긴 겨울을 보상하는 여름의 삿포로는 예술의 축제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온몸의 문을 열어 보자.
그 선두에는 ‘삿포로 국제 예술제(SIAF)’가 있다. 도시와 자연을 주제로 약 두 달간 음악, 공연,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발표한다.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가 디렉터로 나선다. 미술관은 물론 공원과 지하도 등 삿포로시 전체가 예술 무대가 된다.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PMF)’과 ‘삿포로 시티 재즈’ 역시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녀노소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클래식과 재즈 무대가 펼쳐진다.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오도리 공원에선 비어 가든이 있어 목을 축이기 좋다. 시내를 벗어나 오타루로 향하는 길목의 이시카리 부두에선 ‘라이징선 록 페스티벌’이 열린다. 일본 4대 록 페스티벌의 하나로, 밤을 새우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홋카이도의 여름 평균 기온은 25도, 습도가 낮고 바람이 선선하게 분다. 날씨 또한 그야말로 예술이다.
어느 조용한 아침, 카페에 앉아 피아노 연주를 듣다가 심장이 철렁했다. 창틀 밖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무성한 풀잎이 그림 같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거냐.’는 말이 피아노 건반을 무겁게 맴돌았다. 구차하게 끌어안고 있던 더럽고 뜨거운 게 올라왔다. 종이 필터로 커피를 내리는 것처럼 내 안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싶었다. 방법은 뜻밖에 간단할지 모른다. 일단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고, 여러 사람을 만나 보고, 열심히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몇 번의 여진을 겪고, 내 지축도 조금씩 변할 것이다.
‘꽃 향기가 공기 중을 채우고,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어 놓는다. 생전 처음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이 생각을 살찌우고 마음을 정화한다. 시원한 맥주와 스파클링 와인은 잠자는 영혼을 깨워줄 좋은 친구다. 발걸음 옮기는 곳마다 두근대는 심장이 낯설어 좋다……’ 내가 기대하는 삿포로에서 보내는 첫 여름 풍경이다. 특별한 결실은 맺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흘러갔던 바퀴’가 되돌아올 것 같다. 예감이 좋다. 가슴을 두근대게 하는 모든 풍경 속에 내가 일부가 되는 것도 예술이니까. 이 생각이 맞다면 예술, 거참 좋은 것이다.
- 도쿄의 결혼식, 우리와 달랐다
- 홋카이도의 봄 산책
- 여행을 담은 영화, 영화를 담은 여행
- 삿포로역을 둘러싼 거대한 쇼핑 단지
-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동백, 봄봄을 만나다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해신
2014.09.30
장고
2014.07.18
또르르
2014.07.15
라고 하던데 매력이 많은 도시죠.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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