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빅맨>, <골든 크로스>, SBS <닥터 이방인>, <너희들은 포위됐다>, MBC <트라이앵글>….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소위 말하는 평일 황금시간대 공중파 드라마라는 점? 주인공이 남자라는 점? 모두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비정한 현실에 투쟁과 복수를 위해 뛰어든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빅맨>의 김지혁(강지환 분)은 제 심장을 노리고 자신을 가족이라 속였다가 쓸모가 다하자 자신을 무참히 버린 현성가에 복수의 칼날을 빼 든다. <골든 크로스>의 강도윤(김강우 분)도 여동생을 살해하고 아버지에게 그 누명을 덮어씌워 결국 온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 서동하(정보석 분)에게 복수하기 위해 인생을 다 바친다. <닥터 이방인>의 한재준(박해진 분)도, <너희들은 포위됐다>의 은대구(이승기 분)도, <트라이앵글>의 장동철(김재중 분)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제 인생을 뜨거운 분노에 저당 잡히는 캐릭터다.
평일 10시대 드라마 6개 중 5개가 복수를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장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듭되는 복수와 복수를 보며 피로감과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저를 고꾸라뜨렸던 부정의를 용납하고, 모든 인간적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승리해야만 하는 것일까?
복수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이들 드라마 역시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는 개인의 분투를 묘사한다. 악역들은 권력과 부의 맛에 취해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조차 잊은 것처럼 행동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인공들을 압박한다. 그 행위가 파렴치하고 비도덕적일수록 맞서 싸우는 주인공은 극한으로 내몰리고, 드라마는 주인공의 고난을 자극적인 터치로 그려낸다.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물에 빠지는 장면도 예사로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몰락을 한껏 자극적으로 묘사해놓은 만큼 응당 통쾌한 설욕의 장은 꼭 등장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무력한 것이 죄라 악역과의 대결에서 힘없이 고꾸라졌던 주인공이 이제 와 뾰족한 방법이 생길 리 없다. 그래서 드라마는 뻔한 방법을 선택한다. 어떻게든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또 다른 거대한 권력의 힘을 빌리는 것. <빅맨>에서 단신으로 야구방망이를 들고 강동석(최다니엘 분)을 찾은 김지혁이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앞에 서 있는 장면, 그는 더없이 초라해 보인다. 이 장면으로 드라마는 그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변명한다. 그것이 아무리 악독하고 잔인할지라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더 큰 힘에 기대야 한다고. 더 큰 부정의에 기대는 것은 용납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의와 도덕, 사람의 가치를 외치는 김지혁이 이기기 위해 더 큰 악의 힘을 빌리는 것은 스스로 딛고 선 명분을 부수는 일이 아닌가.
출처_ KBS, SBS, MBC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복수를 위해 제 스스로를 연마하는 주인공들이다. <닥터 이방인>의 한재준은 제 아버지를 의료사고로 사망하게 한 오준규(전국환 분)에게 복수하기 위해 걸출한 실력을 자랑하는 흉부외과의가 되어 명우대학병원에 입성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의 은대구(이승기 분)도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직접 경찰이 되어 강남서로 들어간다. 와신상담해 자신을 갈고닦은 수년의 세월은 두말할 것 없이 고되고 힘들었을 테고, 심지어 복수의 대상에게 굴욕과 모멸을 당하고 그를 견뎌야 하는 상황도 수차례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수모를 감수하고도 복수를 하겠다고, 기어코 이기겠다고 이를 악문다. 그야말로 자신을 쥐어짜서라도 승리를 거머쥐겠다 눈을 빛내는 그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선뜩해질 정도다. 모든 인간적 행복이 증발한 상황에서 오로지 복수 하나만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딱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승리는 저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에 쥘 만한 것일까.
드라마를 보며 이런 질문에 부쩍 회의감이 드는 이유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드라마들은 과연 우리가 꼭 승리해야만 하는지 질문하지 않거니와, 당연히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복수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므로 그들이 내린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허나 그들이 거둔 승리가 진정 값진 것인지, 혹은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손에 쥘 만한 가치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마땅히 숙고해야 할 이런 관점은 대부분 거세되어 있고, 드라마는 장르적 쾌감을 위해 오로지 그들이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만을 집요하게 조명하는 까닭이다. 노력하고 발버둥 쳐 이기라고, 어떻게든 승리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쓸모없다 속삭이는 것 같다.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들 작품에서 확인받는다. 누군가는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무능력하고 착하기만 한 주인공이 막강한 악역과 싸워 이기는 뻔한 90년대 드라마보다 낫다 말한다. 선의와 양심이 기득권의 프레임을 깰 수 있다는 순진한 사고가 더 이상 유효한 것이 못 되는 사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이상의 능력을 가진 개인이 공고한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이야기도 어차피 꿈 같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드라마들은 오히려 나만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을 불러일으키고, 그 반동으로 보는 사람에게 강한 탈력을 불러오기도 한다. 체제의 문제는 개인의 분투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드라마들은 어쩌면 더 좋지 않다. 이미 우리 사회가 공고한 승자독식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킬뿐더러, 심지어 성공도 실패도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문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결과만이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부조리를 이기고 승리를 쟁취했기에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된다. 바꿔 말하면 그 과정이 어땠건 간에 패배한 모든 경우는 비극적 결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과주의는 이렇게 힘을 얻고, 사람이니 정의니 외쳤던 그간의 내용은 공허한 울림으로 사라진다. 이기지 않아도 좋다, 불의엔 그저 선의로 대응하고 결과가 어떻건 도덕과 양심을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드라마는 없는 탓이다. 도구가 권력이건 선의건, 주인공이 지난한 분투 끝에 승리해야만 모든 이야기가 제값을 찾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승리는 물론 값지다. 빛나고 찬란한 결말이며, 노력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가다. 하지만 승리를 위해 달리는 길은 거칠고 고되다. 내가 약하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들고 고달파지기 마련이다. 최근의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이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누가 이기건 간에 끊임없이 싸워 이기고 지켜내라 말하는 드라마에 지치고, 현실에서 거두지 못한 승리에 슬퍼서.
길고 긴 마라톤 코스에서 주저앉은 사람에게 격려 없이 어서 일어나 뛰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힘내서 어서 다시 뛰라는 말보다 지금까지 수고했다, 힘들고 지치면 여기까지만 해도 좋다 껴안아주는 드라마가 보고 싶다. 비록 승리하지 못해도 지금까지 뛰어온 것만으로 수고했다고, 여기까지 달려온 길 자체가 네 인생에 값진 거름이 될 것이라 말해주는 드라마. 힘든 현실에 이렇게 다정한 드라마가 보고 싶은 것은 내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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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감귤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