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에게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곡
그러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처음의 주제가 다시 상승하는 음형으로 펼쳐지다가 힘차고 강렬하게 마침표를 찍지요.
글ㆍ사진 문학수
20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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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jpg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 [출처: 위키피디아]

 

지난 회에 들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에 이어 오늘은 7번을 듣겠습니다. 이 두 곡은 브루크너가 남긴 교향곡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일 겁니다. 4번은 앞서 설명했듯이 ‘낭만적’이라는 표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측면이 있고,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해 음악의 구조가 좀더 간명하고 곡의 분위기도 비교적 밝습니다. 그런데 7번은 왜 인기가 있는 걸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아마 느린 2악장에 있을 겁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약 20분가량의 긴 악장이지요. 듣는 순간에 곧바로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선율이 등장합니다.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지금, 지휘자 오이겐 요훔(1902~1987)이 1965년에 베를린필하모닉을 지휘해 녹음한 LP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지휘자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카라얀이나 칼 뵘 등의 유명세에 가려져 이름이 덜 알려진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요훔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특히 말년에 녹음한 음반의 표지에 실려 있는 그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아, 이렇게 늙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곤 합니다. 엄격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이 참으로 인상적이지요.

 

음악도 그렇습니다. 그의 음악은 엄격함과 온화함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예컨대 젊은 시절의 요훔을 극찬했던 선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1886~1954)와 비교해보면 음악적 해석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푸르트뱅글러는 음악이 무엇보다 시간의 예술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던 지휘자였지요. 그에게 텍스트의 고정 불변성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해석, 다시 말해 낭만성과 즉흥성이 강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요훔의 해석은 주지적이고 치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카니니(1867~1957)처럼 ‘악보에 있는 그대로’를 강조하면서 독재자로 군림한 지휘자는 아니었습니다. 훨씬 유연했다고 볼 수 있지요. 게다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그중에서도 7번은 요훔에게 아주 특별한 레퍼토리였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1926년 뮌헨 필하모니를 지휘하면서 데뷔했는데, 이때 연주했던 곡이 바로 브루크너의 7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후에도 평생토록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자신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삼았고 독일 브루크너협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들을 때면 요훔의 음반을 가장 자주 꺼내 들곤 합니다.
 
자, 지난 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브루크너는 1868년에 음악의 도시 빈에 들어섭니다. 마흔네 살이었을 때입니다. 이때부터 교향곡 작곡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세상에서는 마흔두 살 정도면 젊은 축에 속하겠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지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처럼 거의 요절한 음악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베토벤이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 57세였을 때, 요즘으로 치자면 한창 일할 나이였습니다. 또 말러가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시기도 쉰 살을 갓 넘겼을 때입니다.

 

브루크너는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날고 긴다는 음악가들의 각축장이었던 빈으로 옵니다. 그때부터 7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8년 동안 빈의 음악가로 삽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지요. 빈의 주류 음악가들은 안스펠덴 출신의 촌뜨기를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브루크너는 요즘말로 ‘듣보잡’이었지요. 게다가 브루크너는 사교와 정치에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주류 사회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세련된 매너와 화술을 전혀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촌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브루크너가 빈에 도착했을 무렵, 당시 음악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요. 한편에는 브람스를 지지하는 정통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바그너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19세기 음악사의 마지막 논쟁을 대변하는,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이 치열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데 지난 회에도 언급했듯이 브루크너는 바그너 신봉자였습니다. 우직한 성품의 그는 대놓고 바그너 편을 들었지요, 당연히 그 반대파로부터 험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의 브루크너 비판은 집요하고 노골적이었습니다. 브람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브루크너를 아예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버렸지요. “음악적 논리가 결여돼 있고 표현이 부자연스러운 엉성한 음악” “바그너를 숭배하는 노예” 등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브루크너를 공격했던 인물들은 그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브람스 진영을 대표했던 평론가 한슬리크, 당대에 상당한 음악적 권력을 휘둘렀던 그의 악평은 브루크너를 꽁꽁 옭아매는 사슬로 작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고생이 막심했지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빈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빈 필하모닉은 한때 브루크너의 교향곡 연주를 아예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가요? 적어도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국한하자면,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음악가 브람스를 오히려 능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브람스는 브루크너보다 9살 연하이지만, 슈만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그는 브루크너가 빈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요. 브루크너가 빈에 발을 들여놨던 1868년에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1897년에 64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교향곡 분야에서 4곡의 음악을 남기는 데 그쳤지요. 반면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살던 28년 동안 교향곡 2번부터 9번까지(마지막 악장은 미완), 모두 8곡을 작곡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교향곡은 개성과 색감이 많이 다르지요. 회색빛 우울함을 주조로 삼고 있는 브람스의 교향곡에 견주자면, 금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훨씬 찬란한 음색을 구사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빈의 음악계에서 오래도록 조롱의 대상이었던 브루크너에게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이 다가온 것은 1884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딱 50이 되던 해였지요. 그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30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오페라극장에서 교향곡 7번 E장조가 초연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요. 브루크너가 그때까지의 음악인생에서 맛 봤던 최고의 기쁨, 어쩌면 최초의 기쁨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본인도 이에 대해 “박수소리가 15분 동안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교향곡 7번은 그렇게 라이프치히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이후, 뮌헨과 빈에서도 연주되면서 브루크너에게 드디어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줍니다.
 
브루크너가 이 곡을 작곡했던 것은 1881년부터 1883년까지였지요. 한데 그는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빈에서 초연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초연할 것을 권한 인물은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제프 샬크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1855~1922)입니다. 훗날 한스 폰 뷜로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죽을 때까지 이끌었던 지휘자이고, 20세기의 여러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요. 헝가리 태생의 그는 1879년부터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을 지휘했는데, 바로 그 몇 해 뒤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E장조를 초연했습니다.
 
교향곡 7번 E장조는 본격적으로 금관의 규모를 확장한 곡이지요. 바그너가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했던 금관악기 ‘바그너 튜바’를 네 대나 배치해놓고 있습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애도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바그너 신봉자다운 태도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브루크너는 이후의 교향곡들, 즉 8번과 9번에서도 계속해서 이 악기를 사용해 바그너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1악장은 앞서 들은 교향곡 4번과 마찬가지로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해 첼로가 상승하는 선율을 노래하듯이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여기에 호른이 가세합니다. 일설에는 브루크너가 꿈에서 들었던 선율을 옮겨놓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두번째 주제는 좀더 생기 넘치는 리듬감을 보여주고, 세번째 주제에서는 금관의 팡파르가 두드러집니다. 2악장은 앞서 얘기한 대로 바그너를 향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악장이지요. ‘매우 엄숙하고 아주 느리게’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바그너 튜바와 비올라가 함께 연주하는 애절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연주시간 20분이 넘는 긴 악장입니다.

 

3악장은 빠른 템포의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독특한 리듬형을 몸으로 기억하면서 음악의 진행을 따라가면 됩니다. 중간부(트리오)에서 부드럽고 목가적인 선율이 등장했다가 앞에서의 리듬형이 다시 나타납니다. 마지막 4악장은 바이올린의 트레몰로에 이어서 1악장에 등장했던 주제를 리드미컬하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과 상당히 다른 전개방식을 보여주는, 어찌 보면 약간 혼란스러운 악장이기도 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금관의 활약이 점차 두드러지면서, 웅장하면서도 긍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처음의 주제가 다시 상승하는 음형으로 펼쳐지다가 힘차고 강렬하게 마침표를 찍지요.

 

p.s. 본문에서 언급한 오이겐 요훔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추천음반 리스트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국내 매장에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훔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두 차례에 걸쳐 녹음했습니다. 앞에서도 썼듯이 브루크너에 매진했던 지휘자입니다. 기회가 되면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카라얀▶카라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9년/DG


카라얀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지휘자다. 나치 시절의 정치적 행적을 물론이거니와, 20세기 중후반에 매체와 음반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카라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애호가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녹음했던 브루크너 7번은 피해 가기 어렵다. 한마디로 치밀하고 탐미적인 연주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같은 곡을 녹음해 음반(1975년)으로 남겼지만,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가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빈 필하모닉의 음색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비해 역시 좀더 밝다. 카라얀이 브루크너의 음악에 어느 정도로 정통한 지휘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연주다.

 

 

 

브루크너▶세르쥬 첼리비다케, 뮌헨 필하모닉/1994년/EMI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연주다. 생전의 첼리비다케(1912~1996)는 녹음을 별로 탐탁찮게 여겼던 까닭에 남겨놓은 음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카라얀에 비하자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1994년의 브루크너 7번 연주를 실황으로 담아낸 음반이 한층 가치를 지닌다. 이듬해에 녹음한 9번과 더불어 첼리비다케의 중요한 브루크너 녹음으로 남아 있다. 1979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던 뮌헨 필하모닉 단원들과의 이심전심이 느껴지는 연주다. 악보의 이면에 담긴 어떤 명상을 탐구하는 듯한, 느릿한 템포의 해석을 들려준다.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걸작 <테 데움>이 함께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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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카라얀 #빈 필하모닉 #뮌헨 필하모닉 #첼리비다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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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7723

2014.07.17

교향곡 7번이군요. 정말 위대한 곡입니다. 특히 1-3악장. 4악장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구요. 위에서 추천하신 카라얀판과 귄터 반트의 녹음을 들어봤는데, 첼리 비타케의 것도 이번 가을에 들어봐야 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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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