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입문’ 단계에 이어 ‘심화’ 단계의 첫 번째다. 초중고급으로 나누면 중급에 해당한다. 입문과 심화 단계를 나누는 임의의 기준 가운데 하나로 ‘메모’를 들 수 있다. 메모는 다른 분야의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스터리 읽기에서도 매우 중요한 도구다. 그렇다고 앞으로 소개할 작품들이 반드시 메모를 해야 즐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 또 입문 단계에는 메모가 필요 없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
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입문편 두 번째에 “흥미로운 수수께끼, 논리적 전개, 그리고 뜻밖의 결말. 이 세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미스터리로 불릴 수 없다”고 썼다. 메모는 수수께끼의 내용, 논리적 전개의 단계별 핵심을 기록하거나 위화감이 드는 부분을 표시하여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러 나름의 추리를 전개해야 할 때 큰 도움이 된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고스란히 속아 넘어가야 제맛이라지만, 메모하며 애쓴 만큼 속아도 보람이 크고 작가를 이겨도 기쁨이 커진다.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본격추리는 일정 지점에 이르면 여러 형식으로 독자를 도발한다. 대표적인 도발이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 방식이다. 그 도발에 정면으로 맞서주지 않으면 본격추리를 읽는 재미는 크게 줄어들거나 아예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 도발에 맞서는 독자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메모다. 예를 들자. 입문 단계에서 대표적인 일상의 미스터리로 소개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사실 심화 단계에 더 어울린다. 메모를 하건 하지 않건 독자들은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순간 같은 진실에 도달한다. 하지만 중간에 끼어드는 사보 목차들과 잘게 나눈 단편들의 에피소드가 얽히며 전체를 꿰뚫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의 쾌감은, 메모의 유무에 따라 그 질량이 다르다.
누가 본격추리를 한 권 추천해달라고 하면 여전히 가장 먼저 꼽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은 입문, 심화, 마니아라는 3단계 어디에 배치해도 좋을 작품이다. 책을 펼치면 나오는 화가의 수기부터 메모하며 읽으면 ‘첫 번째 도전장’에서는 몰라도 ‘두 번째 도전장’의 “노골적인 힌트를 보여주었고, 게다가 범인까지 등장시켰다. 그러나……”라고 하는 도발에 뒤로 밀리지 않고 맞설 수 있다. 메모가 없다면 그저 작가가 설명해주는 내용에 고개 끄덕이며 끌려가는 셈이 된다. 물론 이 또한 본격추리를 즐기는 방법이기는 하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아직 읽지 않은 친구 두 명에게 권한다. 한 친구에게만 귓속말로 반드시 메모를 하며 읽으라고 한다. 나중에 셋이 모여 대화를 나누면 큰 차이를 발견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소설로 실제 그런 결과를 얻었던 적이 있다. 메모를 하지 않은 친구는 대화의 절반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점성술 살인사건』과 유사한 트릭이 등장하는 영화 <텔 미 썸딩>에서 ‘메모’에 해당하는 화면
처음으로 메모하며 일본 미스터리를 읽을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가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다.『46번째 밀실』처럼 비교적 쉬운 작품으로 메모 연습을 시작해 ‘학생 아리스 시리즈’로 불리는『월광게임 』,『외딴섬 퍼즐』, 『쌍두의 악마』, 국명 시리즈의『말레이 철도의 비밀』로 이어가며 몇 사람이 모여 토론해보면 미스터리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신본격 제1세대로는 뒤늦게 빛을 본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 또한 메모와 함께 꼼꼼하게 읽으면 뜻밖의 발견을 할 수도 있다. 특히『밀실살인게임』은 작심하고 메모장을 들고 작가와 대결하기 바란다. 이 작가가 추구하는 본격추리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더 읽고 싶은 독자는 후속작인『밀실살인게임 2.0』, 『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까지 따라갈 수 있다. 이 시리즈는 단편을 엮어 꾸몄기 때문에 다양한 형식의 트릭을 검토할 수 있다. 이런 대결을 처음 경험하기에 좋은 단편집으로는 마야 유타카『귀족탐정』이나 시마다 소지의『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가 떠오른다. (이 원고 작성 후 출간 소식을 접한 가사이 기요시의 본격추리 장편소설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바이바이, 엔젤』도 심화 단계에서 권할 만한 작품이라 제목을 적어둔다.)
지금까지 본격추리를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했지만, ‘뜻밖의 결말’이라는 의외성을 최대화하려는 서술트릭 또한 메모가 독서에 큰 도움을 준다. 일본 미스터리에서는 신본격 등장 이후 서술트릭이 마치 ‘밀실트릭’이나 ‘알리바이트릭’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읽으며 자란 세대가 작가로 성장하면서 일본 미스터리는 서술트릭 사용 빈도가 무척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우리 독자들 또한 이 트릭에 자주 노출된다.
아야츠지 유키토의『미로관의 살인』은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미로처럼 지은 추리소설가의 저택에 모인 작가들이 한 명씩 죽어나가고, 작가들은 추리를 거듭하며 조금씩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그리하여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 그리고 반전 또 반전. 이런 식 구성을 지닌 이 작품의 마지막 반전을 지탱하는 기법은 서술트릭이다. 본격형 서술트릭이 있는가 하면 반전에 가장 큰 의미를 두는 서술트릭도 있다. 본격형 서술트릭이란 독자로 하여금 논리적인 추리가 가능하도록 충분한 힌트와 복선이 깔리는 경우를 말한다. 워낙 소문이 나서 서술트릭이라는 사실을 감추기도 쑥스러워진 아비코 다케마루의『살육에 이르는 병』이 본격적인 서술트릭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독서하며 위화감을 느낀 부분을 메모하고, 시간에 따른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이 작품이 처음 한국어판으로 나왔을 때 독자들은 자기가 발견한 복선과 힌트를 제시하며 온라인에서 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그 가운데 한 독자는 옮긴이의 시각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많은 힌트를 잡아내 1차 독서 후에 책을 다시 들추며 되새기는 다른 독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되새김은 바둑으로 따지면 ‘복기’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읽으며 남긴 메모가 매우 중요하다. 복기하며 메모를 보충하고 수정하면 독후감이나 서평을 쓸 때도 큰 도움이 된다.
반전에 중점을 둔 서술트릭으로는 우타노 쇼고의 유명한 ‘그’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소설은 ‘서술트릭’이라는 표현 자체가 심각한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많은 독자가 읽어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제목을 언급하기 조심스럽다. 본격형 서술트릭에 대해서는 ‘마니아’ 단계에서 소개할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 3부작’을 통해 더 이야기하기로 한다. 혹시 오리하라 이치가 펼치는 트릭의 늪에 빠지기 전에 살짝 그 세계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는『원죄자』와『실종자』를 권한다.
메모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나 하드보일드에도 필요하다. 다음에는 이런 장르의 미스터리와 메모의 관계, 그리고 메모 양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울러 심화 단계에 어울리는 시리즈물과 미스터리의 확장 영역을 살펴보겠다. ‘심화’ 단계에서 여러 기준 가운데 메모를 내세운 이유는 이미 이야기했듯이 미스터리를 즐기는 방법의 확장을 위해서다. 혼자 읽고 재미있어하는 단계를 지나 같은 작품을 읽은 다른 이들과 토론하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정리’가 필요하다. 특히 오프라인 모임은 온라인과 달리 작품에 대해 제대로 정리되어 있어야 밀도 있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아직 미스터리를 읽고 오프라인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정기적인 모임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온라인이나 지역, 혹은 카페 같은 공간을 통해 작은 모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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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영
전업 번역자. 중앙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일본미스터리즐기기’ 카페 운영자이며 아직 창작은 하지 않지만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기리노 나쓰오의 《다크》, 《IN》,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과 존 딕슨 카의 《셜록 홈즈의 미공개 사건》을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오리하라 이치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니와 몬스터》을 비롯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와다 료의 《노보우의 성》, 《바람의 왼팔》을 비롯한 시대·역사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mira
2015.04.17
hanaru
2014.09.16
서술트릭을 사용한 책들은 일단 서술트릭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읽는 것만으로도 내내 그 부분에 집중해 마지막 반전에 대한 놀라움이 덜해지죠. 그래서 저는 그 유명한 우타노 쇼고의 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모르고 봤더라면 달랐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