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을 몸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지역성(locality)을 내포하게 되지요. 예컨대 쇼팽이 그랬습니다. 물론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폴란드적인 음악을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책에서도 썼듯이 쇼팽의 음악에는 “조국 폴란드에서 체득한 육체성”이 꿈틀거립니다. 음악가들에게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브람스의 음악이 보여주는 아다지오 템포의 두터운 선율은 그의 고향인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를 떠오르게 하고, 차이코프스키의 어두운 노랫가락은 러시아의 광산촌 보트킨스크의 구름낀 하늘을 연상시킵니다.
음악가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역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음악에서 강조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리스트를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헝가리 태생의 그는 헝가리적이었던 동시에 매우 순발력 뛰어난 범(汎)유럽인이었습니다. 스페인과 루마니아, 러시아, 체코 등 여러 나라의 민속적 특징을 자신의 음악 속에서 적절하게 구사했지요. 그가 유럽 전역을 누비고 다닌 ‘순회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들려주면서 인기를 얻었던 것이지요.
지난 회 칼럼에서 언급했던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는 보다 정치적 지향이 뚜렷했습니다. 그는 당대의 예술가들에게 퍼져 있던 민족주의적 경향, 다시 말해 자국의 특색을 뚜렷이 보여주는 음악을 작곡해야 한다는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던 그는 결국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얻었던 것이지요. 이렇듯이 작곡가가 음악에서 지역성, 혹은 민속적 요소를 드러낼 때 그들의 내면적 태도는 각기 다릅니다.
드보르작 [출처: 위키백과]
오늘 만나는 드보르작은 바로 그 스메타나 이후를 대표하는 체코의 음악가입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체코를 대변하는 음악가의 계보는 스메타나(1824~1884)와 드보르작(1841~1904)을 거쳐 야나체크(1854~1928)로 이어집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들에게 체코적 지역성은 내적 필연이라고 해야겠지요.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하지만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경우, 민족적 요소를 드러내는 양상이 좀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메타나가 보다 의도적으로 민족적 음악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드보르작에게서는 그런 자기 강제, 혹은 강박 관념이 덜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은 20세기 초반에 체코 음악계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민족적인 스메타나’와 그렇지 않은 드보르작을 각각 지지하는 이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입씨름을 펼쳤던 것입니다. 당시는 민족적인 것을 진보적인 것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는 측면이 있지만 당대의 흐름 속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은 1841년에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km쯤 떨어진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에 두 번째 곡으로 등장하는 ‘몰다우강’(체코어로 불타바강)이 가까이 흘러가고 있는 마을입니다. 당시 인구가 약 500명이었다고 하니 참 작은 동네였지요. 아버지는 여관과 정육점을 운영했는데, 지금 그 여관은 드보르작 기념관으로 꾸며져 여행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 프라하로 나온 것은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큰아버지가 응원군이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프라하에 발을 디뎠을 때가 1857년이었으니 한창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드보르작은 그런 사회적 흐름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서 오르간 학교 수업에만 매진했고 졸업을 하자마자 레스토랑과 카페 등에서 연주하면서 생계를 해결합니다. 말하자면 드보르작의 청년기는 몹시 고달팠습니다.
당시 그가 카페 악단에서 연주했던 악기는 비올라였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던, 체코 국립극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설극장(임시극장)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게 됩니다. 1862년이었습니다. 당시 이 악단의 지휘자였던 스메타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지지요. 드보르작은 그때부터 1873년까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일합니다. 월급이 너무 적어 고생이 막심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알토 가수였던 안나 체르나코바와 결혼한 직후에 오케스트라에 사표를 던지고 세인트 아달베르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한데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때보다 급료가 훨씬 더 줄어듭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요. 결혼까지 했는데 월급이 더 적은 자리로 이직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드보르작은 이때 큰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소모되기보다는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오케스트라에 비한다면 교회 오르간 연주자에게는 창작에 전념할 시간이 많았던 것이지요.
드보르작은 그렇게 작곡한 음악들을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최하는 한 공모전에 투고합니다. 짐작컨대 이를 악물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자신의 월수입보다 2배가 넘는 생활비 지원을 받게 되지요. 한데 그 생활비 지원보다 훨씬 더 커다란 행운이 드보르작을 찾아옵니다. 바로 브람스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항용 그런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이는 언젠가 보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고, 삶에는 곳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연처럼 보이는 행운들이 사실은 필연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브람스는 드보르작이 투고했던 공모전의 심사 위원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의 음악에 마음이 끌렸던 브람스는 이 체코의 젊은 작곡가를 베를린의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소개하지요. 일종의 추천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젊은 브람스가 슈만의 후원을 받으면서 음악가로 이름을 얻었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등장인물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긴 했어도, 똑같은 일이 다시 한번 벌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태어난 음악이 바로 <슬라브 무곡> 1집에 수록된 여덟 곡이었습니다. 짐로크 출판사에서 간행된 이 곡은 요즘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물론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날개 돋힌 듯 팔렸고 드보르작은 당연히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가 남긴 200여곡의 음악 중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애청되는 곡들을 꼽아본다면 <스타바트 마테르>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드보르작이 세 자녀를 잇따라 잃은 비통함을 담아낸 음악입니다. 또 드보르작은 현악4중주를 중심으로 실내악 분야의 걸작들도 다수 남겼습니다. 특히 현악4중주 12번 F장조 ‘아메리카’가 널리 애청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향곡입니다. 모두 9곡의 교향곡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8번과 9번이 자주 연주됩니다.
오늘 들을 곡은 ‘신세계로부터’라는 부제로 유명한 9번 교향곡입니다. 아마 드보르작의 모든 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성싶습니다. 지금의 중장년들이 학창 시절에 배웠던 ‘꿈속의 고향’(Going Home)이라는 노래가 이 교향곡의 2악장에서 흘러나옵니다. ‘꿈 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하는 노랫말이 기억나시지요? 6마디의 서주가 끝난 후 잉글리시 호른이 그 애틋한 선율을 연주합니다.
자, 이 곡은 드보르작이 미국 뉴욕에서 작곡한 음악입니다. 드보르작은 1892년 가을에 미국 뉴욕의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가게 되지요. 이름에는 ‘내셔널’이 들어가지만 자네트 서버(Jeanette Thurber)라는 거부(巨富)가 창설한 민간 음악학교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음악적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였던 뉴욕은 유럽 음악가들을 초빙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지요.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이런 추세는 거의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집니다. ‘유럽 음악가의 미국행’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드보르작은 1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당시 국제적 음악가로 명성이 높았던 드보르작은 연봉 1만 5천달러의,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1895년까지 그곳에서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했는데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바로 그 시기에 작곡된 음악이지요.
드보르작 본인은 이 곡에 대해 “아메리카를 보지 않았다면 이런 교향곡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체류하던 당시 접했던 흑인들의 음악,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음악에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들이 나옵니다. 특히 1악장에서 플룻이 연주하는 선율이 흑인영가 ‘Swing low, sweet chariot’와 흡사하다던가, 인디언의 펜타토닉 스케일(5음계), 흑인음악의 싱코페이션(Syncopation, 당김음)이 종종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그런 해석들이 연유합니다. 물론 전혀 연관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한 체코 음악가에 눈에 비친 아메리카의 인상(印象), 아울러 그곳에서 느꼈던 모국에의 향수가 배어 있는 음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아메리카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체코풍의 음악으로 다가옵니다.
1악장의 아다지오 서주는 동 트는 새벽의 느낌입니다. 이어서 호른이 첫번째 주제를 힘차게 연주합니다. 이 주제 선율에서 드보르작은 5음계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꼭 아메리카 인디오의 음계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래의 교향곡들에서 만나기 어려운 민속적인 체취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두번째 주제는 목관악기들이 연주하는 애수 어린 선율입니다. 관현악 총주로 내닫는 마지막 코다는 시원하고 장쾌합니다.
2악장에서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는 선율은 향수의 느낌으로 가득합니다. 누구나 아는 아름다운 선율이지요. 드보르작의 제자인 피셔(William Arms Fisher, 1861~1948)가 훗날 이 선율을 기반으로 만든 노래가 바로 ‘꿈속의 고향’(Going Home)입니다.
3악장은 느린 2악장과 달리 활기찬 스케르초 악장이지요. 짧고 강렬한 서주에 이어 풀룻과 오보에가 주제를 선보이고 현악기와 팀파니가 이에 가세하면서 음악이 점점 춤의 형태를 띠어 갑니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 농부들의 춤을 연상시킵니다. 중간부(트리오)에서 플룻과 오보에가 애수 띤 가락을 연주하고, 종결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음악이 아주 잠깐 멈추는 듯싶다가 짧고 강력한 화음으로 악장을 마무리하지요.
마지막 4악장은 ‘알레그로 콘 포코’(Allegro con fuoco, 빠르고 정열적으로)라는 지시어가 보여주듯이 매우 힘차고 뜨거운 악장입니다. 앞으로 전진하는 느낌의 짧은 서주에 이어, 들으면 누구나 금세 알 수 있는 박력 넘치는 첫번째 주제가 연주됩니다. 반면에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두번째 주제는 어딘지 애틋한 분위기입니다. 여기에 첼로와 바이올린이 차례로 호응하지요. 이어서 앞에서 등장했던 각 악장의 주요 주제들을 다시 한번 선보이다가 다시 마지막 악장의 첫번째 주제가 힘차게 작렬합니다. 종결부에 이르면 ‘꿈속의 고향’의 선율과 4악장 첫 주제가 다시 어울리면서 화려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방점을 찍지요.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 베를린 필하모닉/1972년/DG
드보르작의 교향곡을 선택하다 보면 아무래도 체코 출신의 지휘자들에게 먼저 손이 간다. 그중에서도 라파엘 쿠벨릭(1914~1996)이 지휘한 이 녹음은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음반이다. 물론 바츨라프 탈리히와 카를 안체를 등 체코의 옛 명장들이 체코 필하모닉을 지휘해 들려줬던 연주에 비해 체코적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이 보여주는 연주력은 역시 믿을 만하다. 현재 국내 매장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있다.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 음반을 첫 구매하는 분들에게 권한다. 리마스터링으로 재발매돼 음질도 합격점이다.
▶바츨라프 노이만(Vaclav Neumann), 체코 필하모닉/1993년/Denon
프라하 출신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1920~1996)은 체코필하모닉을 지휘해 3~4종의 녹음을 남겼다. 1981년 체코의 수프라폰(Supraphon)에서 발매한 음반도 호평을 받지만 이 지면에서는 1993년에 있었던 9번 교향곡 초연 100주년 기념 음악회의 실황 녹음을 권한다. 체코적 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보다 앞 세대의 지휘자인 카를 안체를을 더 호평하기도 하지만, 이 연주는 체코적 흥취라는 측면에서도 안체를에 전혀 못지 않다. 게다가 이 실황에서 보여주는 노이만과 체코 필하모닉의 호흡과 집중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노이만 말년의 지휘다.
[관련 기사]
- 사랑에 미친 예술가의 환상적인 세계
- 시인을 꿈꿨던 문학청년, 음악가로 살게 된 사연
- 음악가가 말하는 인생의 봄날과 사랑
- 쇼팽과 조르주 상드, 영혼의 동반자
- 브루크너에게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곡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정원선
2014.08.28
서유당
201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