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개막한 뮤지컬 <더 데빌>을 관람했습니다. 연출가 이지나 씨가 직접 대본을 쓴 창작 뮤지컬.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말에 내용 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객석에 앉았죠. 10년 정도 공연을 취재하다 보니 창작과 다양한 시도라는 항목에도 할당제를 도입하게 돼서인지 독특한 무대 세트와 동선이 참신하게 다가왔고, 배우에 따라 가사 전달력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노래들도 느낌 있게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일반적인 재미와는 별개로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색다른 노래들을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가창력과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그녀, 바로 뮤지컬배우 차지연 씨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지. 아니,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많죠. 하지만 단장(斷腸)이라고 하던가요. 어떻게 그렇게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듯 부르느냐 말이죠. 어째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 부르는 것 같습니다.
“과찬이세요. 이번 작품은 곡이 스타일리쉬해서 좋아요. 제가 부르는 노래가 많지는 않지만, 배우가 한 작품 안에서 여러 가지 색깔과 창법으로 부를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거든요.”
마이클 리, 한지상, 송용진, 윤형렬 씨 등 뮤지컬 배우들 중에서도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만 엄선된 것 같은데, 아예 배우를 마음에 두고 음역을 맞춰 작업한 걸까요?
“그렇게 해주신 면도 있어요. 일단 그레첸의 경우 제 의견을 많이 쏟아냈고, 몽환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요소들을 잘 뽑아내서 만들어 주셨더라고요. 제 욕심이 많이 묻어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서편제> 때 배우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지나 연출의 편애(?)를 받는 배우들이 모였고, 그래서 이제 차지연 씨도 ‘이지나 군단’에 합류했구나 싶은데요.
“이지나 선생님이랑 <서편제> <잃어버린 얼굴 1895> <더 데빌>까지 작업하는데, <서편제> 초연할 때만 해도 신인이라서 주눅 들어있던 상태였어요. 반면에 (이)자람 언니는 선생님과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고민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멋있고 부러웠죠. 선생님과 작업한 지 4년이 됐는데, 이번에는 제가 선생님 옆에서 대본을 놓고 논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뭔가 성장했나 싶어서 무척 뿌듯하고 행복했어요. 거침없는 솔직한 발언들 때문에 오해도 받으시는데, 제가 선생님더러 ‘유리소녀’라고 불러요. 여리고,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저는 선생님과 작업하는 것 자체가 좋아요.”
무대 자체가 멋지긴 한데,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해서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뮤지컬 <카르멘> 때보다 많이 말라보입니다.
“그때보다 7킬로그램 정도 빠졌어요. 이지나 선생님이 캐스팅할 때 ‘지연아 문제가 있어. 다 좋은데, 이게 가녀려 보여야 하거든. 할 수 있겠니? 네가 거대하기로 유명한 배우잖아!’ 그러시더라고요(웃음). 대본을 보니까 캐릭터상 정말 살집이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작정하고 뺐어요. 식단 조절하고 꾸준히 운동하고 집에서 극장까지 걸어 다니고. 덕분에 체력이 좋아져서 계단 오르내리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아요.”
작품이 쉽지는 않던데요. 뭐, 이런 사랑 얘기 좋아하시긴 하죠(웃음).
“좀 난해하지만, 표현방식이 독특하지 사실 담고 있는 내용은 어렵지 않은데... 제 취향이 이런가 봐요. 김기덕 감독님 영화 좋아하거든요. 처절하고 너덜너덜해지는 그런 걸 좋아하죠(웃음). 이번 작품 잘 됐으면 좋겠어요. 첫날 좋지 않은 평이 많아서 속상하더라고요. 창작이 살아남고 다양한 작품이 시도돼야 하잖아요. 뭔가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배척은 아닐까... 속상한데 체중 조절 때문에 술은 못 마시고, 혼자 저지방 우유 천 밀리리터를 앞에 두고 술이라 생각하고 벌컥벌컥 마셨어요(웃음).”
이 작품만 본 관객들은 오해하겠는데요. 녹음된 음성을 함께 게재할 수도 없고, 극중 여리고 섬세한 그레첸과 달리 차지연 씨는 지금 개그우먼처럼 신나게 이 모든 것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원래도 선머슴 같긴 했죠. 연기력이 는 건가요?
“무대에서는 무척 가녀린 척 하죠? 뻔뻔함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요(웃음). 예전에는 많이 부끄러웠는데, 그렇게 안 하면 보시는 분들이 더 어색해 하시더라고요. 그레첸을 하면서 선함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냥 착한 것이 아니라 아이처럼 순수한 믿음. 그런 맑은 영혼이 있어야만 존 파우스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그게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배우는 장은아 씨까지 두 분만 참여합니다. 7명의 남자배우들과 함께 하는데, 무대 뒤 분위기는 어떤가요?
“아주 좋아요. 중소극장의 작품은 배우들 사이에서 소소하고 끈끈한 팀워크가 있는데, 저는 그게 정말 좋아요. 무대 뒤에서 이뤄진 끈끈함이 무대 위에서 강력하게 발산되는 게 매력적이에요. 이번 작품의 경우 성격적으로 모난 사람도 없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하고 있죠. 그리고 작품 때문에 깊은 얘기들을 하다 보니까 ‘19금 토크’로 굉장히 돈독해졌어요(웃음)”
차지연 씨와 꼭 2년 6개월 만에 만나는 건데요. 그때만 해도 ‘임재범의 그녀’로 집중 받다 뭔가 후폭풍에 굉장히 힘들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이 많은 것들에서 초연해졌나요?
“기획사 문제도 있었고, 그 전에는 먹고 사는 문제도 급급했고요. ‘이걸 잘 해내야 다음을 할 수 있고...’ 스스로를 목 조르니까 뭘 챙길 시간도 없고, 단체생활이고 뭐고 그냥 저는 제 꺼 하기도 바쁘고. 그런 조바심 때문에 마음이 비뚤어져서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이 있었어요. 아직도 좋은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그걸 인정하니까 많이 편해지더라고요.”
(매니저 : 빚을 다 ‘까서’ 그런가요?) “아직 남아 있는데요. 다 까면 더 좋아져 있겠죠(웃음)?”
여전히 ‘임재범의 그녀’로 통하던데 그분은 잘 계시나요(웃음)?
“그러게요, 몇 년째 그분의 그녀인지 모르겠어요. 연락도 안 되고, 어디서 뭐하시는지도 모르겠는데(웃음). 진짜 뵙고 싶기도 해요. <아이다>까지는 공연장에 모시기도 했는데. 음악적인 지식이나 본능적인 감각은 정말 범접할 수 없는 분이죠.”
그런 분이 인정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요. 가수로서 음반은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아직까지 계획은 없어요. 저의 색깔을 찾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뮤지컬배우는 작품이 주는 색채에 입혀지지만, 가수는 본인이 색깔을 드러내야 하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더라고요.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한다면 오래 걸리더라도 내 색깔을 잘 만들어서 준비하고 싶어요.”
<파우스트>를 읽을 때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서라고 갖고 싶은 것을 생각하곤 합니다. <더 데빌>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했는데, 차지연 씨에게도 그만큼 간절한 게 있나요?
“지금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제 동생의 행복이에요.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제가 스타덤에 오르고 더 알려지는 것이 목표는 아니에요. 6살 아래 동생이 제게는 딸 같아서, 이 아이가 제가 경험했던 상처들을 받지 않고 행복하고 예쁘게 살아가길 바라요. 그렇게 서로 건강하게 응원하면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10년 전과 비교하면 인생의 무대 자체가 바뀐 셈인데요.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뭘까요?
“맞아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8년 전만 해도 은행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뮤지컬 시작하면서는 빚 갚느라 정신없고. 그런데 언젠가 LG아트센터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작년에 <카르멘>으로 서게 된 거예요. 그때 무대 공사 중인데 혼자 극장에 가서 ‘내가 정말 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구나’ 벅차했던 기억이 나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파도와 태풍을 만났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내가 무대에서 뽑아내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올 수 있었을까’ 싶어요. 배우는 가치관이나 삶의 패턴이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투영되는 것 같아요. 평소에도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 무대 위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겠구나... 더 좋은 사람이 돼서 더 많은 사람을 품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요즘 배우들도 기자를 기억하면 좋겠다고 투덜거렸는데, 2년 6개월 만에 만난 차지연 씨가 제 이름까지 기억하지 뭡니까!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실은 감동이었답니다. 전날 밤 ‘못해먹겠다’며 투명 담배를 뻐끔거리던 기자는 하루 만에 밤을 새며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메피스토펠레스, 극중 X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유혹과 선택의 수많은 과정을 거쳐 지금의 차지연 씨도 서 있는 것이겠죠? 그녀의 솔직함, 털털함, 한편으로 여리고 쉽게 상처받는 마음 역시 그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X는 모두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뮤지컬 <더 데빌>은 11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됩니다. 이지나 연출의 독특함, 새로운 소재를 찾는 관객들이라면 배우들의 근사한 가창력이 더해져서 재미와는 다른 볼거리가 있을 겁니다. 차지연 씨는 리사, 박혜나 씨와 함께 진행하는 뮤지컬 콘서트(9월 15일, 블루스퀘어)에서도 만나볼 수 있고요.
- 위태로운 그들, <유리동물원>의 이승주, 정운선
-뮤지컬 <쓰릴미>, 과연 누가 누구를 조종했는가
- 뮤지컬 <캣츠> 볼까? 한국 초연 <드라큘라> 볼까?
- 뮤지컬배우 최재웅이 <헤드윅>에 다시 선 이유
- <쓰릴 미>의 준비된 ‘나’ 신성민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앙ㅋ
2014.09.25
정원선
2014.08.29
yundleie
2014.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