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뭘 만들고 어디서 팔든지 조금만 잘 팔린다 싶으면 큰 회사들이 그 품종에 뛰어든다.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령은 점점 느슨해지고 몇몇 지원책이 남아있다고 해도 현장에서는 허수아비처럼 별다른 힘을 못 쓴다. 그럴 듯한 법인을 갖춘 곳도 대기업에 밀려날 정도이니 조그만 동네 가게는 참 꾸려나가기 어렵다.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되겠지’, ‘남다른 아이디어와 친절로 고객의 마음을 끌어보자’는 다짐을 하지만, 쿠폰과 회원 카드와 매스미디어 홍보로 무장한 거대 기업은 진공청소기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바느질이 꼼꼼한 동네 이불 가게는 홈쇼핑에 밀려나고 드라마에 협찬은 못 하지만 알찬 식재료를 쓰는 동네 식당들은 프랜차이즈의 위세에 문을 닫는다. 수많은 장인들이 이 격랑 속에서 자신의 역사와 자존심을 지켜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제조는 없고 유통만 남았다는 얘기도 있다. 규모가 작은 도시와 큰 도시 사이에 두 곳을 오가는 고속 열차가 놓이면 큰 도시가 손님을 앗아가는 블랙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교통이 편리해졌다고 해서 큰 도시 사람들이 작은 도시를 더 많이 찾지는 않지만 작은 도시 사람들은 큰 도시에 몰려들기 때문에 고속 열차 개통 이전보다 두 도시의 경제력에는 더 큰 격차가 벌어진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한자동맹의 도시 독일의 브레멘은 대형 유통업체의 공격 속에서도 작은 가게들이 탄탄하게 살아남아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곳은 도심에 승용차가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 도심 한복판은 오직 전차만 드나드는 벽돌길이며 자전거가 다니는 호숫가 순환도로가 보존된 옛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그 바깥에 비로소 승용차가 다니는 도로망이 있으나 상업시설은 대부분 보존된 옛 도시 안에 있다. 사람들은 날마다 많이 걷고, 걷기 때문에 골목 안쪽에 숨겨진 놀라움을 자주 발견한다. 사탕 장인과 빵 가게 주인은 각자의 신제품에 대한 덕담을 나누고 지나던 손님은 멈춰 서서 맛을 보고 자신의 말을 보탠다. 그에 비하면 주차장 증설만을 거듭 고민하는 우리들의 대도시에서는 걷는 손님이 점점 줄어든다. 걷지 않는 손님은 골목을 지날 일이 없고 그 안에서 싹트던 즐거움은 차량의 매연에 고사당한다.
『참새의 빨간 양말』은 동네에 커다란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양말 공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 앙거스 가족의 이야기다. 앙거스네 식구들에게는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 작은 도시가 정든 고향이자 일터다. 오래전부터 가족들이 힘을 모아 작은 양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마을은 참새가 유난히 많은 편인데 앙거스는 동네를 날아다니는 많은 참새 가운데 한 마리와 친해져서 브루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앙거스는 나이가 어리지만 날마다 아빠와 삼촌을 도와 공장에서 자투리 털실을 줍거나 자질구레한 청소를 한다. 그렇게 모두 부지런히 일해서 만든 앙거스네 양말은 공장 앞에 있는 조그만 양말 가게에서 팔았다. 이 마을은 겨울이 혹독해서 짜임이 좋고 따뜻한 앙거스네 털양말이 잘 팔렸다. 그런데 손님들이 중심가에 새로 생긴 큰 백화점으로 몰려가면서 앙거스네 공장의 양말은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백화점은 큰 공장을 통해 닥치는 대로 많은 양말을 사들였기 때문에 늘 앙거스네보다 더 싼 값에 양말을 팔 수 있었다.
앙거스네 식구들은 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려고 했을까. 우선 아침마다 열정적으로 양말 회의를 했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더 따뜻하고 편안하고 예쁜 빨간 양말을 신제품으로 내놓았지만 그들의 역작 빨간 양말도 백화점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신제품이 나왔다는 걸 알릴 기회조차 마땅히 없었다. 가족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앙거스에게 참새 친구 브루스가 찾아온다. 브루스는 밤새 많이 추웠는지 두 발이 꽁꽁 얼어있었다. 앙거스는 브루스를 위해서 양말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한다.
“너, 발이 시리구나?”
브루스는 입이 곱았는지 잘 지저귀지도 못하고 위아래 부리를 딱딱 부딪쳤어요.
“아무래도 너한테 양말 한 켤레를 줘야겠다.”
“너한테 양말 한 켤레 만들어주는 데 털실이 많이 들지는 않을 거야.”
앙거스는 양말 기계에 톱니바퀴들을 연결했어요.
멋진 양말 기계는 철컥철컥 째깍째깍 소리를 내더니 곧이어 붕붕 윙윙 하고 돌아갔어요.
정말로 쪼그만 양말 한 켤레가 톡 튀어나왔어요.
빨간 줄무늬에 앞코도 빨간 따뜻하고 푹신한 겨울양말!
브루스의 발에 꼭 맞는 아주 아주 작은 양말이었어요.
양말을 얻어 신은 참새 브루스는 친구들한테 자랑을 했다. 참새 친구들이 너도나도 앙거스를 찾아왔고 마음씨 고운 앙거스는 그들에게도 양말을 만들어줬다. 예쁜 빨간 양말을 신은 참새들이 동네 이곳 저곳을 날아다니자 사람들은 백화점에 달려가서 물어본다. ‘참새들이 신은 것 같은 빨간 줄무늬 양말!’을 외치는 손님들에게 백화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참새들한테 양말을 팔지 않았어요.”
물론 앙거스도 참새들에게 양말을 팔지는 않았다. 참새 친구들에게 양말을 짜서 나누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다정한 마음은 온 도시의 양말 유행을 바꿔놓는 결과로 이어진다. 빨간 양말을 신은 참새떼를 따라서 앙거스네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은 ‘바로 여기였구나!’하면서 잊었던 앙거스네 양말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앙거스네 가족은 기운을 내서 기계를 돌리며 새로운 양말을 만든다.
이 그림책의 결말은 흥부전 같은 구석이 있다. 참새는 다리를 다친 제비 같고 앙거스는 흥부처럼 더없이 부지런하고 착하다. 하지만 흥부전보다 더 재미있는 대목은 참새들이 앙거스네 공장의 부활을 돕기 위해서 진심으로 호객을 하고 손님들 앞에서 양말 춤을 추는 장면이다. 마법 같은 보상으로 보기에 참새들의 춤은 무척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이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앙거스네가 있다. 우리 사회가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라면 그 분들의 익숙한 솜씨, 오랜 경력을 바탕으로 한 감각과 창의성은 이 유기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중한 자산이다. 눈앞의 폭탄 세일 광고에 흔들리는 이 대도시의 소비자들보다 참새들의 양말춤은 훨씬 더 현명한 연대 행위다. 우리 사회의 모세 혈관과 같은 작은 가게를 살리고 싶은 소비자라면 이 책을 읽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나는 적은 양을 조금씩 나누어 장보는 것으로 쇼핑 습관을 바꾸었다.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약속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힘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참새처럼 구석구석 걸어 돌아다니고 신기한 작은 가게를 열심히 발견하고 싶다. 아마도 더 건강해질 것이다. 앙거스네 가게가 대형 백화점의 틈새에서 아직도 양말을 잘 팔고 있기를 바란다.
※함께 보면 좋은 책
박영희 글/조성기,강제욱,안성용 사진 | 삶창(삶이보이는창)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곁의 장인 여섯 사람을 취재해 그들을 둘러싼 문화의 변화와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모습을 담은 사진 에세이집이다. 앙거스네 양말 공장의 식구들처럼 하나의 일에 평생을 바쳐온 정밀 세공사 김왕주씨, 선박 수리공 황일천씨, 이발사 문동식씨, 자전거 수리공 임병원씨 등 각각 다른 분야, 다른 공간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나온다. 그들은 친근한 이웃 같지만 일에서만큼은 엄정한 전문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어 잔잔한 존경심이 인다. 품격있는 사진이 그들의 일터를 더 잘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과 노동에 대해 성스러운 태도를 갖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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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별B612호
2014.09.30
우리동네도 대기업 프랜차이즈 매장에 밀려 구멍가게도, 빵집도, 카페도 하나씩 없어지더라구요..ㅠ.ㅠ
우리도 앙거스 칭구 참새처럼 작은 가게를 살리는 착한 도움을 주는건 어떨까요??^^
앙ㅋ
2014.09.15
빛나는보석
20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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