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 칼럼의 첫 꼭지를 구상할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 산울림 얘기해야지’였다. 그러나 좋아하는 건 아끼고 있다 나중에 꺼내먹는 성격이라 이제야 슬며시 꺼내본다.
산울림은 내 성장기를 비롯한 인생의 주요 시기를 흔들어놓은 밴드였다. 산울림이 한창 활동할 7~80년대엔 성장기가 아니라 꼬꼬마였고(저 생각보다 어려요) 친구들이 정신 차리고 입시공부를 시작한 나이에 뒤늦게 산울림 음반들을 중고 레코드점에서 수집해 들으며 계속 정신 못 차렸다. 음악 들으면서 하염없이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 반에서 제일 힙업이 잘 돼 있던 그 소년은 산울림 음악에 홀딱 경도되면서 이렇게 외쳤던 기억이 난다.
“이 음악들은 여태 새로워!”
지나간 음악이 문득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TV 프로그램 ‘무도 토토가’를 통해서 경험해본 분들이 계실 것이다. 미디어에서 화제로 삼은 엄정화 누나가 아직도 얼마나 섹시한지, 김정남 형이 아직도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는 음악과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시간 속에 묻힌 한 시절의 음악을 다시 꺼내볼 때 아련한 시각이 생기는 걸 즐길 수 있었다.
그처럼 뭔가 빤한 게 지겹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허겁지겁 산울림 음악을 찾아듣곤 한다. 그럼 내 궁둥이가 탱탱하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기 때문… 은 아니고 실험적인 산울림 사운드의 여전히 신선한 생명력을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년 전 드러머 김창익 아저씨가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상 초유의 삼형제 록밴드 산울림은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을 낼 수 없게 되었지만 리더이자 맏형인 김창완 아저씨는 <김창완 밴드>로 여전히 산울림 음악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김창완 밴드>는 동생의 허망한 죽음을 견딜 수 없는 심정을 담아 ‘난 지게차만 보면 쫓아가서 걷어차지(Forklift)’ 하고 쓸쓸한 목소리로 노래했고,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1970년 무렵, 그날은 그날이었고 오늘은 오늘일 뿐이야(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고 인생의 한정적 시기성에 대해 담백한 톤으로 노래했고, ‘인생 그거 별거 아니에요, 살아보니 거기서 거기에요, 서로 서로 아껴주세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금지곡)’라며 삶에 대한 견해를 교훈적인 목소리로 설파하기도 했지만 전혀 꼰대 같지 않았다. 그렇게 노래하는 동안 김창완 밴드의 연주톤은 산울림 때와는 달리 살짝 시시할 만큼 무난해졌고, 멜로디는 가급적 단순해졌으나 그 내용만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에 김창완밴드 3집 <용서>가 나왔다. 웬 떡이냐 새해 선물인가 하고 듣기 시작했는데 나는 첫 번째 트랙을 듣자마자 놀라야 했다.
“아니 이 아저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또 넣었네. 너무 우려 드시는 것 아냐?”
그러나 그 곡은 엄청난 실력의 국악밴드 ‘잠비나이’와 조화를 이룬 신곡이었다. 우려낸 사골 같은 음악이 아니라 새롭고 맛있는 퓨전음식이었던 셈이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세상에 처음 활성화 되던 시절, 산울림 음악 커뮤니티가 생겼다. 이 세상에 나 말고 산울림빠가 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고 그렇게나 많다는 점에도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산울림 동호회의 운영진이었던 K형의 홍대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산울림 LP를 커다란 스피커로 감상하던 때의 전율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혼자 이어폰으로 산울림 음악을 듣고 다닐 때와 음색의 차원이 달랐다. 또한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취향 공감대가 그렇게 찐빵처럼 따듯하고 푹신하다는 걸 거기서 처음 알았다. 우리는 ‘울림교’ 신도들이라 설정하고 김창완 아저씨는 교주였던 시절이라 산울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도한 경험을 간증하는 시간까지 갖는 등 재미있게 놀았다. 채팅방에서 산울림 퀴즈를 내고 맞히며 밤늦도록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팬들이 수면위로 드러나자 활동을 중단했던 산울림 삼형제가 다시 모여 공연을 다시 하는 현재형 환희까지 찾아왔다. 아, 그렇지만 그땐 수험생 시절에 이어 또 내 인생의 주요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진로를 개척해야할 시기에 나는 산울림 공연마다 쫓아다니며 계속 정신 못 차려야 했다.
나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긴 전주에 나오는 굉장히 사이키델릭한 기타솔로 부분을 너무나 사랑했고, 똑같이 따라 연주해보고 싶어 죽을 뻔했다. 그렇지만 기타에 재능이 없어 정말 많은 한계에 부닥쳤다. 노력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취업 이력서를 열심히 쓰고 있을 때 나는 옆에서 그 기타 솔로를 연습하고 앉아있었다. 24시간 오픈된 내 자취방에 학교 동창들이 술을 마시러 수시로 놀러왔는데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끼어있었다. 어떻게든 어필하고 싶어진 나는 연습이 덜 끝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들려주겠다며 폼을 잡았고, 전주부분을 베이스 반주도 없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의 전주부분은 무려 3분이 넘는다. 길고 어설퍼 듣기 괴로워진 여자애가 그 아름다운 입술로 말했다.
“오빠, 미안한데 노래는 언제 부르는 거야?”
실패였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놓은 내 마음~’ 지금 들기엔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 곡의 폭발적인 고백의 노랫말을 그녀에게 전달해 보지도 못했다. 꼭 산울림 때문은 아닌데 아무튼 산울림 곡을 들려주려다 나는 좋아하던 여자애로부터 예능감 떨어지는 오빠로 인식된 것이었다. (아, 지금 눈가의 습기는 겨울비 때문이겠지)
산울림을 원망하진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산울림이 좋고, 그들을 통해 록정신과 실험정신이라는 에너지와 포크적 감수성을 내 인생에 접목시킬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산울림 노랫말처럼 지나간 시간에 머무를 수는 없으므로 다시 최신 앨범얘기를 조금 더 소개하고 오늘의 턴테이블을 마칠까 한다. 이 앨범에선 「E메이저를 치면」이 가장 좋았는데, 뭔가 그녀가 입던 초록색 점퍼가 생각난다며 계속 구시렁대는데 랩이 아닌 일상적 말이 노래가 되는 그만의 표현력이 산울림 11집의 전설적 명곡 「도시에 비가 내리면」이후 오랜만이라 감탄하며 나도 기타를 잡고 따라 칠 수밖에 없었다. (노랫말로 코드를 다 불러주니까 어찌나 좋은지) 그리고 원고 분량이 모자라니까 한 곡만 더 얘기하자면 「아직은」이라는 곡에선 ‘아직 내 가슴이, 아직 내 추억이, 아직 내 인생이, 아직은 힘들다’고 노래하는 그의 고백에 내 막막한 인생이 고스란히 대입돼버려 가슴이 몽실몽실 해졌다.
산울림과 김창완 아저씨의 음악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노랫말인 ‘아,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라는 심정을 언제나 동의하게 한다. 이젠 한마디 말뿐만이 아니라 점점 더 그의 삶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중이라 생각한다. 나날이 늙어가지만 기존에 해왔던 걸 답습하는 고장난 기계가 되거나 고약한 꼰대 어른이 될 기미가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김창완 아저씨. 저는 언제까지나 팬으로 남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독자님들 중에 산울림 음악을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신다면 1집부터 쭉 들어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여태 신선하게 들릴 것임을 보장할게요. (보고 있나 울림교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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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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