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브래너가 <신데렐라>의 실사 영화화의 감독을 맡겠다 했을 때 내가 한 생각은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의 경력과 감독작들을 생각해보라. 그 행보를 보면 대충이나마 그려지는 청사진이 있다. 최소한, 의상 보는 재미는 있겠구나. 문학적 대사들이 더러 있겠구나. 영국식 억양도 있겠구나... 어디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든 감독은 자신의 인장을 찍어냈다. 심지어 마블 사에서 <토르: 천둥의 신>을 만들 때도 그랬다. 감독은 끝까지 섬세한 감성의 로맨스와 대사의 중후한 톤을 고수했다. 그래서 <토르: 천둥의 신>은 다소 밋밋하다는 소릴 들어도, 최소한 내게는 분명 인상적이었다. 감독은 당시 공산품처럼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마블 사의 지긋지긋한 손아귀 속에서도 자신의 서명을 남겨놨으니 말이다. 케네스 브래너는 만만찮게 간섭하는 영화사에 들어가서도 나름의 ‘작가주의’를 실천하는 감독이고, 또 어울리는 작품도 고를 줄 안다. 그래서 2010년대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실사화 하는 두 번째 작업인 <신데렐라>도 최소한 기본은 해 놓을 거라고 봤다.
다들 아시겠지만, 2010년대 디즈니 사의 첫 번째 실사화 작업물은 로버트 스트롬버그 감독의 <말레피센트> 였다. 그 작품처럼 <신데렐라> 역시 오프닝 타이틀 없이 바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일관되어서 좋다. 다만 <말레피센트>의 완성도가 그리 좋지 않았다. 악역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다만, 그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레피센트를 선, 혹은 악이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 묘사해야 할 지에 대해 끝까지 망설이다 끝나는 줏대 없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의 원작은 일단 비틀어 놨는데, 유지할만한 중심축은 못 만들어 놓은 셈이다. 다행히 <신데렐라>는 디즈니 사의 특징과 한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원작을 재기 넘치게 변주하려고 해도 디즈니의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분명 어떤 식으로든 제한이 생긴다. 이들은 ‘언제나 꿈과 희망을 줘야 하는’ 것을 숙명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말레피센트> 처럼 새로운 수준의 이야기를 무리하게 창작하려 들지 않은 채, 원전의 헐거운 부분들을 보강하는데 힘쓴다. 위에서 언급했던 브래너의 스타일이 들어가 있음은 물론이다. 영국 억양으로 말하는 캐릭터들도 있고…
고전의 격에 맞게 영화 만들기
현재 영화 정보 사이트에 기재된 <신데렐라>의 상영시간은 1시간 53분이다. 그러나 이건 본편 상영 전에 공개된 단편 애니메이션과 엔딩 크레딧을 포함한 시간이다. 이걸 모두 제외하고 나면, 상영시간은 1시간 30여분 대에 머문다. 작품은 그 중 초반 40여분을 인물의 성격과 드라마를 구축하는데 힘쓴다. 주인공 엘라 / 신데렐라 (릴리 제임스) 가 조실부모의 고난을 겪는 과정, 어쩌면 ‘덜 나쁜 사람’ 일수도 있었던 계모 트레멩 부인 (케이트 블란쳇) 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한 왕국의 왕자 (리차드 매든) 가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나름 짤막짤막하게라도 연애를 하고 서로에게 불꽃이 튀는 단계를 거쳐 결혼상대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원작이 애니메이션이라 허용될 수 있었던 부분들을 더 꼼꼼히 채우거나 비워내면서, 이야기를 ‘실사 극영화’의 세상에 안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데렐라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캐릭터가 조금은 현실의 자장 안으로 내려와 있다. 마냥 웃지 않고 못 참을 때는 화내고, 고뇌할 때는 고뇌한다. 하지만 끝끝내 더러운 응징의 피를 묻혀 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은 이미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인데도, 작품을 ‘애들 장난’ 이 아니라 정말 하나의 드라마로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거의 모든 배우들의 캐스팅이 만족스럽지만, 역시 트레멩 부인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외면은 충분히 고상해서 자칫 악역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는데,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실로 천박한 웃음소리로 자신이 악역임을 멋지게 증명해낸다. 요정 대모 역으로 헬레나 본햄 카터를 캐스팅한 점은 꽤 의외였다. 감독이 그녀가 머천트 & 아이보리 프로덕션의 영화들에 출연했었던 점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물론 이로 인해 요정 대모 (헬레나 본햄 카터) 가 어느 순간 등장해서 마법을 구현하는 대목이 조금 튀어 보일 수 있다. 작품에 현실성 있는 플롯이 가미됐기에, 판타지의 세계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처럼 되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렇게도 이용하면서 좀 더 현명하게 판타지의 요소를 이용한다. 마법은 곧 동심이다. 작품 속에서 마법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는 사람은 오직 신데렐라 뿐이며, 그래서 그녀는 자주 계모 일가에게 비웃음을 당한다. 그들에게는 집 안의 쥐들에게 말을 걸고, 수호 요정을 믿는 신데렐라가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이것이 비참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름의 흥을 찾아내어 버티는 신데렐라의 삶의 태도일 수 있다고 여긴다. (물론 원작 애니메이션처럼 이번 영화화에서도 짐승들이 소소한 역할을 한다.)
작품은 판타지를 월트 디즈니 사의 이전 애니메이션들이 보여줬던 동심의 가치를 유지하는데 쓴다. 그러나 신데렐라의 이름이 현실에서 허망한 인생역전 증후군을 나타내는 학명으로 기록되어 있듯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안다. 삶 속에서 호박이 마차로 변하고, 공주처럼 변하는 순간이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번엔 그런 동심을 잃은 사람들을 타겟 삼아 다시 일깨워 주고자, 그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일 방식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친절히 묻는다. ‘그래도 순수한 동심을 계속 가지며 산다면, 언제나 피곤한 이 세상을 좀 더 다르게, 혹은 풍요롭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 고. 작품은 자칫 몽상적일 수 있는 판타지를 통해서 관객이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발견하게끔 해준다. 그리고 ‘거기서 거기겠지’ 라며 심드렁하게 보러 왔을 관객들에게 아주 고급지게 따귀 한 방 후려쳐 주신다. ‘고전’ 이라는 표현을 괜히 붙이는 게 아니다. <신데렐라>는 고전의 격에 맞는 신뢰감을 관객에게 제공해준다. 뭐, 아동 관객들이 보기엔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이 작품은 앞으로도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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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
13살의시선
2015.04.02
별따라
2015.04.02
홍준호
2015.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