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시간
그 해 서울(경성)에도 봄꽃은 만개했다. 광화문 뒤편 경복궁에도 봄꽃은 피었다. 오래된 길의 동선을 따라 창덕궁 비원에도, 창경궁에도. 다만 창경궁의 이름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동물원과 공원으로 바뀐 궁에는 맹수의 우리가 생겨났고, 온갖 보지 못한 새들의 집이 만들어졌으며, 궁을 공원으로 바꾼 이들에 의해 가득 심어진 벚꽃으로 봄의 성을 이뤘다.
글ㆍ사진 함돈균(문학평론가)
2015.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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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서울(경성)에도 봄꽃은 만개했다. 광화문 뒤편 경복궁에도 봄꽃은 피었다. 오래된 길의 동선을 따라 창덕궁 비원에도, 창경궁에도. 다만 창경궁의 이름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동물원과 공원으로 바뀐 궁에는 맹수의 우리가 생겨났고, 온갖 보지 못한 새들의 집이 만들어졌으며, 궁을 공원으로 바꾼 이들에 의해 가득 심어진 벚꽃으로 봄의 성을 이뤘다.


광화문 주변에는 예전에 없던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통 외에는 큰 길이 없던 궁 주변에는 남대문을 마주보며 큰 길이 생겨났다. 경복궁이 마주하고 있는 멀리 남쪽  관악산이 ‘불 산’이라고 하여 길을 내는 일을 꺼렸던 그 방향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남대문 바로 밖에는 사람과 마소의 자연력으로 움직이지 않는 기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역이 생겼다. 그 역에는 해시계와는 다른 기계적 시계가 만들어졌다. 광화문 남쪽으로 새로 생긴 도성의 남북 축 큰 도로 중간 횡측에도 새로운 도로가 연이어 생겨났다. 동대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 생긴 동네는 황금정(을지로)과 본정통(충무로, 명동)이라 불렸으며, 남산골 샌님의 거주지는 일본인들 중심의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최초의 백화점(미쓰꼬시 백화점)과 현대식 은행(조선은행)과 우편국(조선우체국)이 생겨났다.


광화문 일대 서울의 거리는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궁에서 공원과 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의 벚꽃놀이를 보기 위해 매년 봄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밤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광화문 안 경복궁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보려고 헤아릴 수 없는 시골 사람들이 서울로 상경했다. 조선의 명물이 된 백화점 엘리베이터는 ‘승천하는 기구’로 불렸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된 서울 곳곳의 상업지구에도 조선 사람들은 가득 차서, 1930년대 광화문 일대 서울 거리는 망국 이전보다 더 활기에 넘쳤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 이상, <오감도시제일호>(1934) 부분

 

윌리엄 워즈워스는 그의 시 <무지개>(1802)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는 문장 뒤에 나오는 이 시구는, ‘아이’라는 동심에서 훼손되지 않은 인간 순결성의 중핵을 본다. ‘아이’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에 즉각적으로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감각적 개방성과 예민함을 지녔다. 그에게 “아이”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는 ‘미성년’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늘 회복하고 돌아가야 할 원형이자 영원의 시간이며, 훼손되지 않은 정직한 세계 감각과 타자에 열려 있고 타자와 교호하며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너그러운 감성의 시간이다. 아이의 시간은 어른을 예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의 영혼이 진정으로 성장할 때만이 찾아오는 ‘아버지로서의 시간’이다. 


워즈워스의 ‘아이’는 가혹한 시대를 살던 한 식민지 시대 젊은 시인에게는 다른 방식의 표현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무지개’를 보며 설렜던 아이는 “도로”를 무서워하는 아이로 바뀐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커다란 해석적 스캔들을 낳은 이 시를 이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아이가 도로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반복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핵심이다. 초점을 아이로 맞추면, 도로를 무서워하는 존재가 ‘어른’이 아닌 “아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어른’은 도로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른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그 도로는 어떤 도로인가. 바로 저 식민지 시대 서울의 도로다. 백성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랜 왕조가 외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고, 궁이 동물원으로 바뀌고, 이 땅 사람들의 집터가 식민지 통치국의 국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저 도로다. 식민지 백성이지만 ‘어른’들은 총독부가 버티고 선 그 지배의 상징적 장소에서 벚꽃놀이를 즐기고, 박람회 유람을 다니며, 쇼핑을 즐긴다. 어른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 시간의 본질을 외면하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지만, 어른의 시간 감각에 현재 시간의 중핵은 거세되어 있다.


이상의 <오감도시제일호>의 난해성은 시 자체의 난해성이 아니라, 어른들은 보려하지 않는 또는 보지 못하는 지금 시간의 핵심, 현재 시간에 포개진 역사의 중층성에 “아해”만이 정직하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만이 시간의 표피가 아니라, 시간의 중핵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무섭지 않은데,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데, 아이들만이 무서워하고, 무서워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무서울 때 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무서운 상황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이들은 무서운 것을 무서운 것으로 느낄 줄 ‘안다’. 공포는 그들의 능력이며 힘이다. 아이들은 꽃피는 물리적 시간에 삼투되어 있는 퇴폐의 정치 시간을 감지한다. 아이의 살갗은 여리지만, 그것은 약한 살갗이 아니라 세계 시간을 가장 먼저 지각하고 가장 깊이까지 뻗어 있는 촉수이자 예민한 피부다. 그들은 세계 폭력에 무방비인 주체다.

 

 

서서 잠드는 아이들, 다른 시간을 꿈꾸다 

       
서서 잠드는 아이들
우리는 서서 잠드는 아이들
달빛 속에 어는 들판을 질러 올 때
말없이 ‘우리’를 이루는 아이들.
서로 깊은 생각에 잠겨
시내를 건널 때
얼음이 든든한가 두드려보지 않았다.
약속이 두드려지지 않았다.
손, 발, 발가락, 달고 있는 것들이 모두 얼었다.

앞산에 산불이 인다.
옆의 아이가 잠자며 노래 부른다.
다른 아이는 잠속에서 소리없이 웃는다.
꿈에 함께 놓여나며
우리는 그 웃음이 노랫소리임을 알아 맞힌다.

우리는 서서 잠드는 아이들
서서 노래와 울음을 끝내는 아이들
끝내지 않으려고
함께 서 있는 아이들.

앞산에 산불이 인다.
그대 나를 신나게 벗고
내 탈 벗고
흔적 없이 그대를 벗을 때까지
옷과 함께 얼굴도 벗고 춤의 탈도 벗고
춤의 핏줄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서서 잠드는 아이들.

앞산에 산불이 인다.

- 황동규, <서서 잠드는 아이들>(1978) 전문

 

황동규의 시에서 아이들은 “서서 잠드는 아이들”이다. 이 잠은 ‘눕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잠들지 않은 주체의 긴장된 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서서 잠드는 것은 잠든 밤에도 깨어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른들은 누워서 잠든다. 나아가 어른들은 눈뜨고 있어도 누워 있는 정신처럼 산다. 그런 어른들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가 ‘사회’라는 공간을 이루고 지속되고 반복되는 안전한 ‘일상’이라는 시간 감각을 구성한다. 이렇게 어른과 아이는 한 공간에서도 다른 세계를 살며, 다른 시간을 산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속담은 오래된 지혜를 담은 ‘말’의 세계이며, 이 말들의 세계가 생존의 도모와 안전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어른들의 세계 시간을 지탱한다. 반면 ‘아이들’은 속담이 지시하는 안전규범, 즉 “시내를 건널 때/ 얼음이 든든한가 두드려 보지 않았다”. 전승된 생존의 지혜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지혜만으로는 목숨의 부지에 모든 걸 거는 지금 시간 ‘너머’를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지 않는 용기와 순진한 무모함이 아이들의 ‘우리’를 ‘사회’와 구별되는 공동존재로 만든다. 이 ‘우리’는 어른들의 사회가 내포하는 생존지상주의를 능동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미성년이 아니라 ‘비성년’의 공동체다.


“옆의 아이가 잠자며 노래 부”르고 “다른 아이는 잠속에서 소리없이 웃”고, 서로가 그 웃음과 노랫소리를 알아맞힌다는 것은, “잠드는 아이들”이 여기 아닌 다른 시간에 속하는 ‘꿈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서서 잠드는” 것은 ‘꿈꾸는 정신’을 뜻하며, 다른 시간을 사는 정신이다. 다른 시간을 사는 정신은 “노래와 울음을 끝내는” 정신인 동시에 “끝내지 않으려”는 정신이다. 노래와 울음은 슬픔과 고통의 삶에 대한 비탄인 동시에 억압 없는 삶에 대한 비원이자 자유로운 세계를 향한 해방가이며, 착하고 순결한 존재가 될 때만이 가능한 곡진한 기도다. 극도의 억압과 비참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과 가장 자유로운 상황에서 부르는 해방가는 예외 없이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착하다. 그 숭고한 노래와 착한 울음이 터져나오는 시간이야말로 ‘시’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시의 호소는 끝내야 할 세계에 저항하고 끝낼 수 없는 비원을 반복한다. 이것이 시의 생명이고 존엄이며, 시의 역사를 이룬다. 이 역사는 “산불” 같은 이미지로만 환기할 수 있기에 어른들은 결코 보지 못하는 미래 시간에 대한 영감이 스며있다. “산불”을 ‘꿈에서’ ‘서서 잠들며’ 본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 어른들의 현재 시간을 살면서도 이 영감의 노래와 울음을 끝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노래와 울음이 극복하려고 몸부림쳤던 어른들의 시간을 끝내려고 애쓰게도 될 것이다. 대체로 아름다운 시들의 주체는 ‘말없이’ 말 너머를 말하려고 애쓰는 이 아이들이며, 이 아이들의 꿈과 기도가 도래할 다른 역사의 비전을 이룬다. 워즈워스의 시에서 아이들을 설레게 했던 그 ‘무지개’ 역시 이미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이 아이들이 꿈에서 본 ‘산불’과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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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