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20세기 음악의 싹을 틔운 사람은 클로드 드뷔시(1862~1918)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8년 전이었던 1910년에 한 러시아 청년이 파리에 진출해 <불새>(L‘oiseau de feu)라는 발레음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합니다. 드뷔시보다 스물 살 연하였던, 당시 28세의 청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였지요. 청년 시절의 그는,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트라빈스키도 훗날 “우리 세대의 음악가들은 드뷔시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기도 했지요. ‘나’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 세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참 스트라빈스키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파리에 머물던 스물여덟 살의 스트라빈스키는 어느 날 드뷔시의 집을 방문해 환담을 나눴던 모양인데, 당시의 만남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드뷔시는 사진 왼편에 서 있고 스트라빈스키는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오른편의 커튼 사이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와 스트라빈스키의 손과 무릎을 비추고, 거실 바닥에 사각형의 햇살 무늬를 선명하게 새겨놓고 있습니다. 사진의 핵심은 ‘빛’일진대, 이렇게 빛을 잘 활용해 한 장의 멋진 사진을 만들어낸 그날의 ‘사진사’(?)는 누구였을까요? 재미있게도 에릭 사티(1866~1925)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날 드뷔시의 거실에서 20세기 초반의 ‘문제적 음악가’ 세 명이 모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뛰어넘어 러시아적 색채와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훨씬 화려하고 근육질이지요. 스트라빈스키도 만년의 회고에서 자신이 지닌 러시아적 유전자에 대해 털어놓고 있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 활약했던 음악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나이스가 쓴 『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이석호 옮김, 포노)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서문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을 러시아어로 말하고 러시아어로 생각한,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러시아인이다. 어쩌면 내 음악은 그러한 러시아성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배경과 숨은 본질에는 러시아성이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게다가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성악가였던 표트르 스트라빈스키(1843~1902)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을 대표하는 베이스바리톤이었지요. 덕분에 어린 스트라빈스키는 아주 일찌감치 오페라와 발레에 흠뻑 빠질 수 있었습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도 종종 공연했지만 주요 레퍼토리는 대개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이었습니다. 미하일 글린카,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음악이 일찌감치 스트라빈스키의 몸속에 저장됐던 것이지요.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색채감과는 맛이 다른, 스트라빈스키의 좀더 강렬한 색채감은 스승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비롯하는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의 일원이었지요. ‘러시아 5인조’에 대해서는 제가 차이코프스키를 언급하는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단행본 <더 클래식 - 슈베르트에서 브람스까지>(2015, 돌베개)에도 그 내용이 등장하지요. 이 그룹에 속한 다섯 음악가의 이름은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입니다. 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던 1868년에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모구차야 구치카’(강력한 소수파)라는 이름을 붙여줬지요. 훗날 ‘러시아 5인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서구와 다른 러시아적 음악을 지향했던 까닭에 ‘국민음악파’라고도 불립니다.
원래 직업이 해군장교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5인조’ 중에서도 관현악법의 대가로 유명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서구에서 유입된 음악이론들, 이를테면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의 전통에 대해 불편해했던 것과 달리,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비록 서구에서 왔다 하더라도 음악적 기초에 대한 학습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러시아 5인조’ 중에서 유일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를 지냈고, 관현악법 교재를 직접 집필해서 많은 학생들이 그 책으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은 <스페인 기상곡>이나 <세헤라자데> 같은 곡들이지요. 독일ㆍ오스트리아 음악, 또 프랑스 음악 등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이국적인 정취와 화려한 색채감이 두드러지는 곡들입니다.
말하자면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가장 관현악에 능통했던 음악가를 스승으로 만났던 것이지요. 스트라빈스키는 아버지 표트르의 강요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에 진학했지만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공부를 접지는 않았습니다. 법대를 다니면서도 ‘음악 과외’를 했는데, <봄의 제전>을 설명하는 5월 26일자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도 썼듯이 당시의 선생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였던 표도르 아키멘코(1876~1945)였습니다. 또 바실리 칼라파티(1869~1942)에게서도 음악을 배웠는데 그도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운 제자였습니다.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인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02년이었습니다. 법학대학 동기였던 블라디미르가 바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만남이 이뤄졌던 것이지요. 한데 이 해는 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 표트르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스트라빈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흠모했던 대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마치 아버지처럼 따르면서 음악을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1908년 봄에 그 스승마저 타계하고 나자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거기까지가 스트라빈스키의 ‘수업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파리행은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행보를 뜻합니다. 물론 그것은 당대의 공연 흥행사였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예민한 촉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초기작이었던 <불꽃놀이>(Feu d‘artifice)와 <환상적 스케르초>를 초연하는데, 그것을 마침 디아길레프가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디아길레프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어느 젊은 작곡가의 이야기를 이미 전해 들었겠지요. 그의 음악을 눈과 귀로 확인한 디아길레프는 파리에서 공연할 발레 <불새>의 음악을 스트라빈스키에게 의뢰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스트라빈스키에게 작곡을 맡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음악사에서 이름이 좀 희미해진 두 명의 러시아 작곡가(아나톨리 리아도프,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 의뢰했으나 작곡이 제대로 진행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디아길레프의 머리에 전구처럼 불이 켜졌던 작곡가가 ‘아하! 스트라빈스키’였던 것이지요. 공연을 불과 6개월쯤 남긴 상태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몰두합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기한 안에 작곡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이 중요한 작품에서 당대의 대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기뻤다”라고 회고합니다.
1910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발레 <불새>((L‘oiseau de feu)는 큰 성공을 거둡니다. 미하일 포킨(1880~1942)이 대본과 안무를 맡은 발레 <불새>는 러시아의 신화와 민담들을 뒤섞어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지요. 간단히 말해 왕자 이반이 불사의 마왕 카슈체이의 정원에서 불새의 도움을 받아 마왕을 죽이고 마법에 갇혀 있던 공주를 구출해 아내로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발레의 성공으로 인해,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곡가가 될 수 있었지요. 그는 1911년, 1919년, 1945년에 발레를 떼어낸 관현악 모음곡으로 이 음악을 손질합니다. 그래서 <불새>는 전막 발레 외에도 세 개의 모음곡 버전으로 존재하지요. 지휘자마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그중 하나를 선택해 연주하곤 합니다. 관현악 모음곡으로 출판된 것 중에서는 1919년 버전이 자주 연주되는 편입니다.
음악은 한마디로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구현된, 러시아풍의 낭만주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마법의 걸린 밤의 정경을 묘사하는 음산한 서주에서부터 슬라브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러시아에서 초자연적인 판타지를 오페라와 발레의 소재로 쓰는 일은 서유럽보다 흔했지요. 스트라빈스키도 <불새>를 작곡하면서 앞 세대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두 편의 오페라, <불사의 카슈체이>와 <황금닭>에서 영향을 받았음직한 음형들과 기악적 테크닉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러시아 민요의 선율들도 차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발레의 1막에 등장하는 이반 왕자를 묘사하는 선율이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파리의 청중을 의식한 듯한, 인상주의풍의 선율도 간간히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스트라빈스키는 기존의 음악적 재료들을 자신의 오선지 속으로 끌어들여, 다른 이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로 화려한 관현악의 향연을 펼칩니다.
▶오자와 세이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1983년/Warner Music
전막 발레 음악을 연주한 녹음이다. 올해 80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몇해 전 하루키와의 대담집이 출간되면서 새삼 그 온후하고 개방적인 인간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정작 지휘자로서는 국내에서 그다지 애청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새>와 <봄의 제전> 등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지휘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레퍼토리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를 이끌고 있는 1983년 녹음은 날카로운 리듬감과 화려한 색채감을 잘 살려낸 연주로 호평받는다.
▶피에르 불레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92년/DG
지난 번 <봄의 제전>을 언급하면서 소개했던 피에르 불레즈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반은 어느새 국내 매장 품절이다. 이번에 추천하는 시카고 심포니와의 <불새> 녹음은 다행히도 매장 물량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 녹음도 발레 버전이다. 2장의 CD에 <불새>와 <페트루슈카>를 함께 담아 가격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명확하고 분석적인 해석에 기반을 뒀지만, 그럼에도 음악적 흥취를 잘 전해주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9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음악을 지키고 있는 거장 불레즈가 67세에 지휘봉을 들었던 녹음이다. 지휘자의 원숙함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음악을 대하는 어떤 정신성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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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