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부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작가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오판, 배우의 미흡한 연기력, 시기나 경쟁작 등 여러 외부적 요소까지…. 성적도 그렇거니와, 대중과 평단 양측에 쓰디쓴 비판을 거둔 작품들엔 패착이랄만한 다양한 원인이 있었다. 당연히 어느 한 가지 요인만이 드라마 부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SBS <너를 사랑한 시간>에 대한 반응을 보노라면 부진의 모든 이유가 두 주연 배우에게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두 명의 주연 배우, 특히 여자 주인공 하지원에게는 혹독하다 싶을 정도의 비난이 쏟아지고, 마땅히 작품이 짊어져야 할 부담까지 그들에게 전가된다. 행동의 개연성, 등장 인물 간 나이 차와 어울림까지 따지며 부당함을 주장하는 의견들은 주연 배우가 당연히 맡아야 할 책임 이상을 요구한다. 정말 <너를 사랑한 시간>의 부진은 주연 배우들 때문일까? 작품의 부진과 미숙은 배우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인 걸까?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끊임없는 작가 교체다. <너를 사랑한 시간>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합류했던 민효정 작가가 하차하고, 첫 촬영 직전 정도윤-이하나 작가가 합류했다. 당시 관계자는 작가들이 1부부터 다시 집필을 시작하고 있으며, 다음 주부터 촬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배우들이 1부 대본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 준비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캐릭터 성격과 서사 진행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4회 방송 이후, 다시 한 번 작가 교체가 이어졌다. 정도윤-이하나 작가가 하차하고 작가팀 가일(지고, 지순, 인해)로 작가진이 교체된 것. 작품 진행에 있어 제작진 사이 이견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의 발전을 위해선 끊임없는 토론과 탐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촬영 전부터 최근까지 거듭된 내홍은 오히려 드라마의 전개에 악영향을 끼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특히 남자 주인공 최원(이진욱)의 캐릭터가 그렇다.
출처_ SBS
초반부 드라마는 최원에 대해 ‘시니컬하고 까칠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서른넷 생일을 맞은 하나의 나이를 두고 얄밉도록 비아냥대는 원의 모습을 봐도, 그를 두고 수군대는 회사 동료들을 봐도 초반 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허나 몇 회 지나지 않아 원은 이유도 없이 냉소와 다정 사이를 오가고, 이내 연인인지 친구인지 알 수 없는 위치에 선다. 멍청하고 한심하다고 하나에게 독설을 날리다가도 이내 옆에 앉아 위로의 웃음을 짓는 식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회사 후배 소은(추수현)을 두고 은밀한 상상을 하거나 은근히 여지를 남기던 초반부의 원과 오롯이 하나만을 쫓는 지금의 원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 갖춘 장점은 그렇다치더라도 마땅히 갖춰야 할 일관성이 사라진 모양새다. 다감하고 따뜻한 원의 모습은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지만, 캐릭터에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찾기 힘들다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모한 캐릭터는 의아함을 자아내고, 주인공이 길을 잃고 헤매자 드라마 역시 힘을 잃는다.
<너를 사랑한 시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을 이끄는 것은 원의 정서다. 17년 간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온 사이, 남몰래 키워온 사랑. 하나가 원을 그저 친구로 생각한 반면 원은 17년 전 고등학생 때부터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기에 차마 욕심도 내지 못했던 상대에 대한 연정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드라마는 적당한 개연성과 일관성을 갖추고 관계의 변화에 대해 설득력 있게 풀어놓았어야 했다. 17년 간 마음을 숨기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곁에서 그를 지켰던 원의 고뇌와, 기나긴 고민 끝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로 한 결심까지. 친구라는 가면을 쓰고 평온했던 관계를 포기하기로 한 이유도. 하지만 이리저리 변하는 원의 캐릭터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불친절한 서사 속에서 드라마는 이 모두를 놓치고 나아간다. 배우의 연기가 안타까울 정도다.
하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역할과는 달리 명랑하고 발랄한 캐릭터를 입은 하지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물론 초반부 다소 높은 톤으로 이어지는 연기에 어색함을 느꼈을 시청자도 있으리라. 배우에게 연기력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니 이것은 배우가 부담해야 할 숙제지만, 모두 배우의 잘못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따져보면 작품 속 오하나라는 캐릭터의 위치는 매우 모호하거니와 감정선도 명확하지 않다.
서로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대사는 끊임없이 반복 강조되고, 원과 하나는 자신들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없다고 매번 선을 긋는다. 하지만 정작 주어지는 시퀀스에서 원과 하나는 언제나 서로를 연인처럼 대한다. 하나의 약혼자였던 서후(윤균상)가 그들을 보고 물러서는 장면이나, 소은과 하나가 미묘한 기싸움을 벌이는 장면에 이르면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기존에도 오랜 친구 사이 피어오르는 미묘한 감정을 다룬 작품은 많았다. MBC <단팥빵>, <9회말 2아웃>, tvN <응답하라 1997>까지. 친구와 연인 사이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주인공들과 미묘하게 변해가는 관계가 주는 긴장감은 흥미로운 소재니까. 하지만 이런 설정엔 조금 더 섬세한 연출이 필요하다. 친구로서 결코 ‘선을 넘지 않는’ 관계, 관계의 진화에 따른 감정과 위치의 미묘한 변화, 그 변화에 대한 충분한 배려도. 하지만 <너를 사랑한 시간>에서는 이런 숙고가 보이지 않는다. 원과 하나의 관계에 대해 시청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이유다.
드라마는 이제 막 중반부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하나의 약혼자 서후가 돌아와 그녀에게 다시금 사랑을 구하고, 원 역시 해외 연수를 포기하고 하나에게 오랜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하나는 둘 중 누굴 선택하게 될까. 긴장이 높아져야 할 시점이지만 여전히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원작 <아가능불회애니>가 갖췄던 장점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유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케미나 연기력 이전, 작품에 대한 관찰과 숙고, 나아가 전면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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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