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고대 일본
한국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의 속내로 인해 일부 역사 교과서에서 ‘한반도에서 전파됐다’는 표현 대신 ‘대륙에서 전파됐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글ㆍ사진 김종성
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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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일본열도에는 야마대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야마다이국ㆍ야마이국ㆍ야마일국ㆍ야마태국ㆍ야메다이국ㆍ야바타이국 등으로도 불리는 나라다. 이 나라는 30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연합체로서 일본열도의 통일을 위한 기초를 수립한 왕국이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 열전에 따르면, 이 연맹체의 중심지는 현재의 후쿠오카현에 해당하는 이도국(伊都國)이었다. 후쿠오카현은 부산에서 마주보이는 규슈섬의 동북쪽에 있다. 규슈섬과 일본 본토를 잇는 곳이다. 동이 열전에는 야마대국이 이도국보다 아래에 있었다고 했다. 일본 학계에는 야마대국이 규슈섬에 있었다고 하는 쪽과 긴키(간사이) 지방에 있었다고 하는 쪽의 대립이 있다.


어느 쪽이 보다 더 사실에 부합할까? 야마대국과 교류한 중국 측은 이 나라의 중심지가 이도국이었다고 봤다. 중국 역사기록에서 이 점에 관해 왜곡을 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에 관한 한 중국 측 기록을 신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마대국은 일본열도 중남부인 긴키보다는 가장 남쪽인 규슈섬에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처럼 일본열도 통일의 기초를 제공한 야마대국이 규슈섬에 있었다는 것은, 일본열도의 통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진 문명이 일본열도에서 이동한 방향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제공한다. 야마대국이 긴키 지방에 있었다고 해도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긴키 지방도 어차피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들은, 규슈섬과 가까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열도의 통일에 기여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규수섬 사람들이 통일의 원동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바로 왼쪽의 선진 지역에서 새로운 문명을 흡수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도래한 세력이 그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일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다. 저명한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는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國家)》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외래민족인 천신족(天神族) 특히 천손족(天孫族)은, 그들이 가져온 신화ㆍ전승(傳承)이나 사회구조를 볼 때 부여나 고구려와 관계가 있는 동북아시아계 민족으로서 일본 진출 직전에는 남한인 임나(任那) 방면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같은 천손족에 관한 역사적 복원은 고분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적 접근법에서 획득된 결론, 이를테면 동북아시아계의 기마민족이 신예의 무기나 말로써 강력한 세력을 가진 야마토 조정을 수립했다는 관점과 아주 잘 부합되는 한편, 일본국가 건설자의 외래설 즉 동북아시아계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설을 점점 더 강화해주는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 같은 북방 기마민족 즉 유목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으로 진출하여 야마토 조정 즉 야마대국을 세우고 일본열도의 선진화에 기여했다는 것이 에가미 나미오의 연구 성과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대륙에서 문화를 받은 점은 인정하면서도 한반도에서 받은 부분은 어떻게든 숨기거나 축소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야마대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야마가와출판사의 《고교 일본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9년에 나온 이 책에서는 야마대국이 세워지기 직전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한제국(전한_인용자 주)이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조선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다. 중국 역사서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일본을 왜(倭)라고 부르고 있었다. 규슈 북부에 있는 왜의 소국 중에는 바다 건너 중국과 교섭을 갖는 나라도 있었던 듯하다.

 

야마대국의 성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외부 세력은 에가미 나미오가 인정한 것처럼 천손족으로, 규슈 바로 옆의 한반도와 만주에 자리 잡은 부여나 고구려와 관계있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 교과서에서는 한반도나 만주가 아닌 중국 내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친 부분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중국이 야마대국의 성립 과정에 미친 영향도 있겠지만, 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한반도와 만주였다. 이런 감안할 때, 《고교 일본사》가 인과관계의 핵심을 빠뜨린 채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의 심리가 반영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심리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즉 새역모가 만든 중학교 교과서에서 표출되고 있다. 2001년에 새역모는 출판사 후소샤(扶桑社)에서 발행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통해 자신들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국제적으로 선보인 바 있다. 2011년에는 지유샤(自由社)에서 발행한 중학교용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서 학계의 통설과도 상반되는 문화 이동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일본 학계에서 통설로 인정되는 ‘한반도에서 전파된 벼농사 문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본열도에서는 이미 조몬 시대에 대륙에서 벼가 전파되고, 규슈의 야채 밭 유적에서는 약 2500년 전에 관개용 수로를 수반한 벼농사가 행해진 유적이 발견되었다.

 

조몬(繩文) 시대는 일본의 신석기 시대를 지칭한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외부에서 일본으로 벼가 전파됐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 외부가 한반도라는 점은 숨겼다. 그런 목적으로 ‘대륙’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중국인지 한반도인지 알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지유샤뿐 아니라 후소샤나 이쿠호샤(育鵬社)에서 발행한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청동기나 철기 문화의 수용과 관련해서도 이들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대신 ‘대륙’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모든 일본 교과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 우익 세력의 지원을 받는 일부 교과서들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심리적 경향이 이런 교과서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대 일본인들의 태도는 18세기 말 이전에 일본인들이 보여준 태도와 상반된다. 왜냐하면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인들은 어떻게든 조선 문화를 수용하고 싶어 안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과 자신들의 연관성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반응이었다.


일본 측의 요청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한양에서 부산과 대마도를 거쳐 교토 혹은 에도까지 이동했다. 통신사 사절단은 보통 몇 백 명으로 구성됐다. 예컨대, 인조 임금 때인 1636년에는 579명이고, 효종 임금 때인 1655년에는 488명이었다. 통신사가 조선ㆍ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를 지나는 순간, 사절단의 규모는 확 불어났다. 대마도인들로 구성된 수행단이 통신사 사절단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1682년에는 대마도 수행원들만 1,760명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보다 대마도 수행단이 훨씬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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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행렬


이 대규모 행렬의 이동 경비는 일본 측이 부담했다. 사신단이 외국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신단의 이동 비용은 초청국이 부담하는 게 관행이었다.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나 교량을 정비 혹은 신설하고 중간 중간에 휴게소나 간이 화장실을 마련했다. 이들이 육로로 이동할 때는 말들을 제공했다. 말들이 아프거나 다칠 경우에 대비해서 비슷한 숫자의 말을 예비로 준비했다. 통신사 행렬이 중간에 선박을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선박들을 호위할 일본 배들을 따로 준비했다.


지방 관리 입장에서는 통신사 행렬이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자기 지역에 체류하는 것은 훨씬 더 난감한 일이었다. 최고의 요리와 숙소와 여흥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용을 사전에 준비할 목적으로,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에서는 1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이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농민반란이 벌어진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통신사 접대 비용은 일본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 일례로, 1682년에 에도로 가는 중간 거점인 긴키 지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투입된 비용은 쌀 320만 석 정도였다. 17년 뒤인 1697년에 일본 전국에서 생산된 쌀은 2,580만 석이었다. 통신사 행렬이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일본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된 18세기 후반에는 “이렇게까지 조선을 접대해야 하느냐?”는 불평의 목소리가 막부 내부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통신사의 방문은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데도 조선 사신을 극진히 대접한 이유는, 18세기말 이전만 해도 조선이 일본에게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ㆍ오키나와 외에는 수교국이 없었던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극진히 대접함으로써 대륙과의 무역에 어떻게든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통신사를 열렬히 환대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일본은 어떻게든 조선과의 관련성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랬던 일본이, 20세기에는 한국과의 관련성을 어떻게든 부인하려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의 속내로 인해 일부 역사 교과서에서 ‘한반도에서 전파됐다’는 표현 대신 ‘대륙에서 전파됐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문명의 참모습이 올바로 소개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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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김종성 저 | 역사의아침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역사 교과서를 분석하는 이 책은, 한국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한국 역사 9가지, 중국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중국 역사 7가지, 일본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일본 역사 8가지를 소개하고, 세 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에 담긴 오류와 편견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지나친 국수주의를 경고하고 과도한 자기비하를 경계하며 더불어 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역사적 진실의 규명,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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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또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구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글을 싣고 있다.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을, 《민족 21》 등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기업인들에게 한국사를,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외부 강사로 삼성 신입사원들에게 역사를 강의했다. 기독교방송(CBS)의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했고, 교통방송(TBS)의 〈송정애의 좋은 사람들〉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