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으니까요.” 시인 신현림이 라이팅북 『글 쓰고 싶은 날』을 펴내면서 보탠 말이다. 다소 진부해 보이는 책 제목은 책장을 여는 순간, 다른 얼굴을 한다. 시인이 오랫동안 좋아했던 시와 세계적인 화가들의 명화와 드로잉의 조합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과 오딜롱 르동의 드로잉이, 황지우의 「나는 너다」와 시냐크의 그림이 이토록 잘 어우러질 줄을 누가 알았을까. 시인으로 사진가로 전방위 활동하고 있는 신현림은 여전히 로댕의 "감동하고, 사랑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철학이든 예술이든 어려워 봤자 인생 얘기”라고 말하는 신현림 시인, 언제나 시대와 호흡하는 작가가 되길 꿈꾸는 그에게 “글 쓰고 싶은 날은 언제냐고” 물었다.
글쓰기의 기본은 솔직함이다.
그 솔직함이
명확한 비유와 어울려 매혹적이면 더 시적이고,
예술적이 되니까.
자신을 감추지 마렴.
말하듯이 써보렴.
사람은 원래 불안한 거야.
불안할 때 예술을 즐기고
따라 쓰다 보면
불안은 자신감과 빛으로 바뀌고 만다.
(「불안의 솔직함」, 『글 쓰고 싶은 날』 40쪽)
어떤 예술도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야
‘신현림의 라이팅북’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평범한 라이팅북과는 조금 다릅니다.
‘비밀 상상력 노트’라는 가제가 있었어요. 제 청춘 노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라서요. 그간 잊고 지냈던 제 스케치와 쓰기 노트, 세계 최고 화가들의 명화와 드로잉, 명시들을 묶었어요. 아트 디렉터로도 참여한 책이에요. 책을 만들면서 초심과 다시 만났어요. 책을 엮고 나니까 시가 자꾸 써지고, 시에 대한 각오가 달라졌어요. 좋은 시와 산문은 발표 시기와 상관 없이 언제 봐도 좋은 것 같아요.
‘신현림의 글 생각, 예술 생각’이라는 짧은 산문부터 책이 시작됩니다. ‘낙서부터 시작할까’라는 제목이 정겹더라고요. “따라 쓰기 전에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도, 뱅크시도 울고가게 낙서해줘. 그래피티가 따로 없게”라고 쓰셨는데요.
그동안 낙서처럼 글을 쓴 게 권 수로 따지면 스무 권쯤이 될 거예요. 시를 쓰고 좋아하는 이미지를 옮겨 그리는 일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피톤치드가 가득한 숲이라고 할까요? 사과밭 같은 곳에서 숨을 쉬는 느낌이에요. 요즘도 사과를 놓고 여러 사람의 사진을 찍고 있는데요. 지방 촬영도 가고 전시도 하고 있어요. 사진은 사진대로, 글은 글대로, 시는 시대로 쓰고 있어요.
“요즘 누가 시를 외워?” 라는 말도 하지만, 여전히 좋은 시들을 많이 발표되고 읽히고 있습니다.
시는 모든 예술 분야의 밑바탕이에요. 땅과 같은 존재죠. 어떤 예술도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야 제대로 꽃피운다 생각해요. 시인으로 데뷔 전에 지금은 정신과의사인 남동생과 시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어요. 함께 시를 외었던 날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그만큼 시는 인간 영혼의 고향이에요. 고향에서 비로소 마음을 누이고, 땅과 나무와 하늘 등 대자연 속에서 숨을 제대로 쉰다고 할까요? 자신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가 시의 땅이에요. 좋은 시들은 그렇게 잊었던 영혼을 찾아줘요. 이번에 책을 쓰면서 20, 30대 초반에 좋아했거나 자극을 받았던 시들을 많이 꼽았어요. 동시대 시인들의 뜻깊은 시 한 조각들도 골라봤고요. 필사를 해도 좋고 그냥 읽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흰 밥알을 천천히 씹듯 음미하면서 따라 쓰다 보면, 자기만의 글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오랫동안 창작 노트를 써왔기 때문에 이 책도 탄생할 수 있었겠어요.
노트 기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창작 활동이 다소 더디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책이나 영화를 보더라도 꼭 짧게라도 감상과 대목대목 메모해 남겼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할 때는 철학. 미학이론서, 영성책까지 본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사람은 글을 씀으로써 인식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읽었다는 느낌을 너머서 기록을 해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대로 잡히고 그 진폭이 넓어져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으면 아무런 기억도 존재하지 않아요. 쓴다는 것은 은 곧 영혼을 새기는 일이에요. 나만의 것으로 남기려면, 또한 상상력을 가지려면 자기만의 노트 쓰기가 절실하죠.
프란츠 카프카의 “어떠한 자기 인식도 쓰는 것에 의해 결정 난다”는 말과 이어집니다.
심리학에서도 말하잖아요. 쓰는 행위만으로 기억의 힘이 배가 된다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막상 실감을 크게 못하는 것 같아요. 겪어본 자들만 아는 거죠. 지금은 SNS 시대이기 때문에 글을 안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항상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지를 고민하잖아요. 문제는 좋은 글, 좋은 책을 봐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냥 잘 쓰기만을 바라죠.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깊게 들여다보게 돼요. 뭔가를 결정할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요.
세계 명시를 모아놓은 책은 꽤 많은데요. 『글 쓰고 싶은 날』의 특징은 세계적 화가들의 숨겨진 뎃생이 곳곳에 실려 있다는 점입니다.
20대 초반이었을 거예요. 잡지 부록으로 명화 노트를 받았는데, 그 때부터 책을 읽으면 꼭 메모를하기 시작했어요. 공들여 나의 흔적이 된 노트는 절대 못 버려요. 세계적 화가들의 숨겨진 뎃생을 보기만해도 너무 좋아요. 얼마나 혼신을 다해 그린 그림인가요. 그 노트에 최고의 시와 산문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가는 팁까지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부자가 되는지요. 평생 함께할 노트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을 때, 시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하셨어요. 왜 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어요?
자신의 영혼을 만나고, 힘들다면 영혼을 쉬게 하는 쉼터가 시라 생각해요.
책에 실린 시 중에서 지금 생각하는 시가 있다면요?
신동엽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서화랑, 랭보의 「감각」을 참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요. 바람냄새, 흙 냄새 꽃 냄새 나서 좋아요.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꿈꾸는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은 소양이 필요할 텐데요. 어떤 소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정성이지요. 부끄러워하는 마음. 윤동주 시인의 「서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하고 낮아지려는 자세 아닐까요? 신성함에 가까이 하고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 한, 진정한 감동을 주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세계적 작가들이 전하는 글쓰기 조언’에서 수전 손택의 말 “내게 작가란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를 인용하셨어요. 왜 작가들은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요?
여기서의 ‘관심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꿈꾸는가에 대한 관심이에요. 그것을 모르고 쓴다는 것은 근무 태만이며, 작가로서의 자격미달이라 생각해요.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함께 꿈꾸고 실천하는 일은 무척 중요해요. 적어도 함께 하려는 노력이 작가의 양심과도 이어지고요.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의 말도 꼽아주셨어요.
시대나 세상에 대한 고뇌가 깊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달짝지근한 이야기만 해서는 시가 될 수 없어요. 우리가 왜 윤동주, 백석, 김소월, 김영랑을 사랑했겠어요. 그 어조와 리듬 속에서 우리 가락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학생 때 서정주의 시를 친일파 시인의 작품이라고 밀쳐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 책을 엮으면서 다시 읽게 됐어요.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들이었어요. 또 다시 보게 된 시인들이 많아요. 이상화, 김영랑, 박인환 같은 시인이에요. 일제 시대 때 쓴 시들이 지금에 와서 더 절절하게 와 닿고, 요즘 시인들보다 더 순정적이라할까, 절박해서 감동적이었어요. 상상력도 현대의 어떤 시인들보다 절대 뒤처지지 않아요. 마치 세계미술사에서 휴버트 보스와 피테르 브뤼겔의 상상력과 장인정신은 은 아주 뛰어나서 영원히 현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밀레의 웅숭깊은 인간미의 깊이나 고흐의 열정과 개성이 주는 감동이 늘 새롭듯이요.
창작이 고픈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어요.
빈 공간에 낙서를 해도, 시를 써도 좋아요. 시를 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진실을 설명하는 게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자꾸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요. 말을 아껴야 해요. 정리되지 않은 시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요. 저는 항상 “서툰 예술은 독자를 타락 시킨다”는 말을 마음에 새겨요. 엄청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다듬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소근소근거리는 내면적인 독백이라고 새로워야 해요. 기존의 것들과 똑같지 않나를 늘 고민해야 해요.
『미술관에서 읽은 시』라는 새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12월 말쯤에 나올 것 같아요. ‘바람난 그림, 시에 빠지다’가 책의 콘셉트예요. 오래 전 교과서 속에서 만난 동서양 시부터 한국 문단을 이끌 젊을 작가들의 현대시들과 시에서 연상되는 그림을 엮었어요. 이를 테면 윤의섭 시인의 「청어」를 파울 클레의 「황금 물고기」와, 장석주의 「수그리다」를 이인상의 「설송도」과 연결시켰어요. 미술이 문학이 한 데 어우러진 퓨전 교양서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앞으로 어떤 작업들을 하고 싶으신가요?
사심 없이 즐겁게 하는 게 최고로 좋은 것 같아요. 『딸아 외로울 때 시를 읽으렴』이 그랬어요.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줄은 몰랐거든요. 최근에 엮음집인 태교시 라이팅 컬러팅 북 『꽃을 기다리는 시간』이 서점에 놓였고, 이달 말에는 ‘사랑’을 주제로 2년간 기획한 문화예술인들의 에세이 『선물 우체통』도 이달 말에 나오는데, 저자들의 사진을 갤러리 ‘사진 위주 류가헌’에서 전시할 예정이에요. 또 내년 1월쯤에는 제게 매우 특별한 책이 나와요.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라는 제목으로 세계 명화 미술사와 시를 함께 맛보는 책이에요. 올해는 책을 만들다 한 해를 다 보낸 것 같네요. 이제 제 다섯 번째 시집도 준비해야죠. 지난 가을은 쓸쓸할 새도 없이 시를 썼어요. 연애를 안 해도 사랑시도 쏟아지더라고요. 하느님께 감사하니 모든 게 잘 풀리리라 믿으면서 시를 더 잘 써보려고 해요. 시 작업 말고, 다른 작업은 아직은 저만의 군사 비밀이에요.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커피 값을 아껴 책을 사서 보길 바라요. 생활비를 아껴야 해서 고민되지만, 책은 사서 보면 좋지요. 책을 사보는 안목과 책을 안 사보는 안목은 다릅니다. 그만큼 책을 사랑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기도 하지요. 저는 아직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의 촉감, 향기가 존재의 향기라고 느껴져요.
작가님께 ‘글 쓰고 싶은 날’은 언제인가요?
매일이지요. 매일 책을 안 읽고 음악을 안 듣고, 사진이나 그림을 보지 않으면 잠이 안 와요. 애인이 생기면 애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될 텐데요. (웃음) 작업 생각과 배분을 잘해보려고요.
미적이라 할 때
미(美)는 순전히 아름답고 예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미적이란 어느 순간 혼자 힘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만의 길을 내는 것이라 생각해.
지나친 경쟁시대에서 지치고 불안한 우리를
구원할 구원투수가 바로
종교, 곧 신앙심이라고 봐.
한쪽 발이라도 종교에 담가보라고 나는 늘 권하곤 하지.
그러다 제대로 믿으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자신만 믿는 ‘나신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닮은 예술이 구원투수가 되고는 했었지.
예술은
전통을 뿌리로 두지 않으면
어떤 독창성도 제대로 서기가 힘들지.
그렇게 아름다움을 향한 것은
영원에 대한 꿈이며 열망이야.
(「미적이란 것, 그리고 예술,, 『글 쓰고 싶은 날』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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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싶은 날신현림 저 | 마로니에북스
이 책은 국내외 명시는 물론이고 철학, 성경 등의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다. 시인과 작가를 꿈꾸거나 자신만의 글을 써보고 싶은 이들에겐 하나의 방법론과 힌트를, 그리고 지루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겐 달콤하면서도 유익한 휴식의 시간을 제공해줄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간직해온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토대로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들을 엄선해 실었으며, 오래전 디자인과를 다니며 습작했던 신현림의 오래된 낙서와 그림, 판화, 사진까지 담겨 있어 그녀의 예술 세계 전반과 독보적 감성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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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umji01@naver.com
행복한자
201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