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죽음을 생각해야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생명이고, 생명이 사라진다 해도 존속할 지구고, 지구가 사라진대도 계속될 우주고, 그 우주에서 또 다시 탄생하게 될 생명, 이런 거잖아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글ㆍ사진 신연선
20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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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발로 끝나버린 세상, 깊은 바다에 잠수함이 하나 살아남았다. 그 안에 생존한 사람은 단 세 명. 심해 생태에 집착하는 나이 지긋한 남자 ‘피셔’, 무엇을 조사하는지 밝히지 않는 조사관이자 최후의 여자 ‘셀린’, 패기 넘치는 듯 유약한 듯 존재감 발휘하는 젊은 남자 ‘이삭’이 그 주인공이다. 커다란 잠수함에, 바다 안에, 세상 속에 살아남은 사람이 자신들 셋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좌절한다. 과연 최후의 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노희준 작가는 이들이 많은 이야기나 영화에서처럼 생존경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애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시스템이 무너지면, 생존자들은 공동체 의식을 회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잠수함에 남은 세 명이 현재 지구에서 가장 건강한 인류라면? 그들은 루시만큼이나 보호받아야 할 생물종이었다.(94쪽)

 

작가는 『깊은 바다 속 파랑』에서 세상 끝에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사회가 어떤 것이었는지, 윤리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다양한 검토를 한다. 셀린이 살았던 도시를 보여주고, 피셔가 사랑하는 심해 생물의 생존 방식을 보여주고, 이삭과 피셔와 셀린이 서서히 다른 모습의 가족이 되는 장면을 그린다. 소설이 전하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만큼 인터뷰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마치 깊은 바다 속 잠수함에 잠시 머물렀던 것처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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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의식을 되찾지 않을까


핵폭발 이후 심해 잠수함에 남겨진 ‘세상 끝’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가 뭐였을까, 제일 궁금했어요.


제 성격이, 힘들다고 잠수 타고 이런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수나 좀 타볼까, 싶었어요. 잠수 탄 김에 잠수함 이야기나 써볼까, 하다가 시작된 거고요.(웃음) ‘아포칼립스(aporkalypse)’잖아요. 재난 영화나 아포칼립스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불만스러웠던 게 있었어요. 항상 갇힌 사람들이 생존경쟁을 해서 한 사람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잖아요. 인간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얘기들이 많죠. 재난 영화에서도 재난이 닥치면 갑자기 시민들이 폭도로 둔갑해서 습격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잖아요. 저는 그게 불만이었어요.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재난이 닥치면 공권력을 벗어난 시민들이 공동체 의식을 되찾지 않을까 했거든요. 몇 명만 살아남으면 생존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해서 이타심을 발휘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었어요. 그래서 이런 설정이 된 거죠.

 

공동체 의식이요.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윤리란 고정불변이 아니잖아요. 사회 시스템에 맞아 떨어지니까 윤리가 생기는 건데요. 윤리가 바뀌면 사람이라는 개념도 바뀌겠죠.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쓰던 중에 이문재 선배님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읽었는데 제 생각이랑 똑같은 거예요. 미국에 있던 수많은 테러와 재난 사건을 조사했더니 오히려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려는 움직임이 생겼지, 폭도로 둔갑하거나 이런 게 아니었다는 거죠. 상점에 들어가 총에 맞아 죽은 경우도 있지만 그들이 상점에 들어간 이유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자료들을 찾아놓은 게 있거든요. 그래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했죠.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다는 건가요?


인간이 원래 선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요. 선한 면도, 악한 면도 있겠죠. 그렇지만 사실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든 건 우리 자신이 아니고 시스템이라는 거죠. 공동체가 깨졌으니까 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그런 시스템이 마비돼버리면 오히려 공동체 의식이 생기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곁에 있는 사람을 과연 우리가 죽일 수 있을까요? 머리 위에 시스템이 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다, 너와 나의 생존경쟁이지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시스템이 없어져버리면 인간관계만 남잖아요. 그러면 해칠 수 없겠죠.

 

디스토피아를 상상할 때 도움이 됐던 것들이 있었나요? 금방 영화도 언급했는데 장면 그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요.


디스토피아가 나오나요? 디스토피아라면 ‘셀린’이라는 등장인물의 과거 이야기 정도일 텐데요. 도시는 정말 그렇게 갈 것 같아요. 새로운 에너지 수급에 실패해서 더 이상 문명이 발달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석유 같은 에너지가 또 생기면 그렇게까지는 안 가겠죠.

 

심해 생물이나 고래 생태라든지 잠수함 내부 조사도 많이 했겠죠? 얼마나 걸렸어요?


그냥 책 싸들고 가서 외딴 집에서 읽었죠. 하루에 두 권 씩 읽어요. 한 열흘 가 있으면 스무 권 이렇게 읽어버리니까요. 오래 안 걸려요. 자료 조사는 빨리 하는 편이어서요. 『킬러리스트』 쓸 때는 자료 정말 많이 읽었거든요. 첫 장편인데요. 그때는 읽은 책이 200권 돼요. 그건 오래 걸렸죠. 지금은 금서(禁書)라는 말 잘 안 쓰지만 특수 자료들이 있거든요. 빼내기 힘든 것들이요. 그 경우 사 개월 걸린 것 같아요. 이 책은 한 달도 안 걸린 것 같은데요. 평소에 원래 관심이 많았어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 ‘피셔’가 생태계에 대해 가진 철학이 돋보이거든요. 그것은 아마 작가의 목소리였겠군요.


‘피셔’가 저죠. 원래부터 해양 생물이나 생태계에 관심이 많았고요. 잠수함은 모르니까 그건 전문서적을 구해 연구를 했고요. ‘유체역학’ 이런 것 있잖아요.(웃음) 잠수함 조사 굉장히 많이 하고 막상 쓴 건 별로 없어요. 원래 소설은 취재를 쓰려고 하는 게 아니고 안 틀리려고 하는 거니까요. 어떤 분이 쓰신 단편 앞부분이 참치배 이야기였어요. 그들끼리 나누는 굉장히 전문적인 대사들이 있어요. 그거 보고 알았죠. 이런 건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웃음)고요. 더 전문적으로 쓸 수 있지만 수위 조절을 잘 해야죠. 이것도 어떤 독자 분들은 용어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예를 들면 ‘중성 부력’ 꼭 그렇게 써야 하느냐고 하시는데 그런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해양 생물, 생태계에 원래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궁금하네요.


이런 거죠. 자본주의의 대안을 생각하다가 그러면 호모 사피엔스를 알아야 한다, 하고 관련 책을 읽어요. 그러다가 농경 사회를 읽으면 생태계에도 관심을 갖고, 이런 거예요. 그냥 계속 넓어지는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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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무도 안 속죠


작가의 말에서 ‘이것은 SF이자 젠더에 관한 소설’이라고 명시했어요. 어떤 의미인지 듣고 싶었어요.


여기 나오는 로맨스는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로맨스는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한 거예요.

 

후반부에 ‘셀린’이 고민하는 부분을 가리키는 얘기죠?


그렇죠. 그리고 마지막에 해안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모습들도 그렇고요. 이건 스포일링이 될 것 같은데, 해볼까요?(웃음) 일부일처제가 사실 잘못됐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아서 그게 맞다 생각하지만 많은 결혼한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가 배우자 때문이 아니고 결혼제도 때문이잖아요. 이제 아무도 안 속죠.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게 너무 힘든 나라가 되어버리니까요. 사람들이 이제 속으려고 하지 않죠. 이건 개인을 옥죄어서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이지 낭만적 사랑 이런 거 아무도 안 믿잖아요.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책이 있어요. 엥겔스가 쓴 책인데요. 거기 프라이라고 하는 인류학자가 하와이 친족어 연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하와이 친족어에 ‘아버지’라는 말이 없어요. ‘푸날루아(punalua)’라는 말이 있는데 아저씨와 아버지를 통칭하는 말이거든요. 되게 이상한 말이잖아요. 그런데 여성 쪽은 다 있어요. 세분화된 용어들이 있는데 남성 쪽은 ‘푸날루아’ 밖에 없는 거예요. 파고들었더니 엄마는 확실히 알지만 아버지는 모르는 상황이라는 그림이 나오는 거죠. 집단혼 상태인데요. ‘푸날루아혼’이죠. 예전에는 집단과 집단이 결혼을 했다고요. 근친상간 금기는 있었지만 다부다처제였다는 거죠. 사실은 그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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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야기는 시스템이 무너지면 공동체가 회복될 거라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 같은데요. 이야기를 현재로 끌어온다면 지금, 시스템이 무너지는 상황이라고 보는 거죠?


무너져가고 있죠. 그런데 우리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 공포를 느끼는데요. 저는 준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공동체는 순식간에 회복될 것 같거든요. 지금도 지역 문화 이런 얘기 나오는 이유가 사실은 중앙의 어떤 시스템이 지역 공동체 다 깨먹었기 때문이죠. 중앙은 시스템 자체가 중앙에 있고 거기에 맞는 사회가 있으니 상관없어요. 비교적 괜찮죠. 그런데 지역은 시스템이 보호해주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파괴하니까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불만이 많은 것 같아요. 하긴 서울도 대책이 있진 않죠.

 

그것은 꼭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망했다고 얘기해요.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 아니냐, 한국 사회가 너무 부가 편중되었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하잖아요. 제가 봤을 때 그건 한국 사회의 문제가 아니고요. 석유 문명의 몰락이 시작된 거라고 생각해요. 석유 문명의 몰락을 심하게 겪고 있는 나라가 한국인 거죠. 우리는 너무 빨리 성장했으니까요. 안정망 없이 말이에요. 안정망을 쌓아두지 않은 것의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는 거죠. 아마 다음 세기 가기 전에 한국이 선진국에게 망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국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농담으로 선진국이 아니라 ‘선망국’이라고 하잖아요. 먼저 망하고 어떻게 하면 잘 망할 수 있는지 가르치는 국가가 돼있지 않을까 해요.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이 떠오르네요.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은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전지구적 문제라 국가 체제를 유지하려다보면 그에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 했죠.


그게 계산을 하면 나오는 거예요. 이를 테면 ‘포드주의’라는 게 있어요. 직원들에게 월급을 많이 주면 포드 자동차를 살 것이고 그렇게 경기가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건데요. 생각해보면 제작 원가, 제품의 가격을 노동자가 받는 급여는 절대 넘어설 수 없거든요. 그러면 포드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이 포드 자동차를 전부 사는 건 불가능하죠. 잉여분은 누군가 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사야겠죠. 이런 식으로 확산해보면 자본주의는 계산 딱 나와요. 자체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없어요. 외부에서 가져와야 하거든요. 그 외부는 저개발국이거나 아직 자본주의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은 곳이죠.

 

식민지가 필요한 거죠.


식민지가 반드시 필요하고 저개발국이 있어서 가치가 하락된 곳이 있어야 이윤이 남죠. 그런데 지금은 전지구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지구가 하나 더 있지 않은 이상 자본주의가 종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건 누가 봐도 알잖아요. 그런데 대안이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AI 얘기가 나오니까 노동의 종말 이야기가 나오고 갑자기 난리가 난 거죠. AI가 통용되는 사회가 오면 노동으로 월급 받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겠죠. 그러면 소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대기업은 망하겠죠.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세계 정부 이야기도 하지만 어쩌면 국가의 역할이 더 강력해져야 할지도 모르는데 기본소득을 다 보장해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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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났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피셔’가 저는 궁금해요. “끝내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는 얘기도 나오는데요. 이 절망은 무엇인가요?


제가 좀 성격이 그래요. 제가 이래저래 안 풀린 케이스거든요.(웃음)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해서 뭐가 남을까, 어차피 인간 다 죽는데, 하고요. 나는 어차피 죽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생각의 영역이 넓어지는 거예요. 인간 사회에 갇히는 게 아니라 멀리 보게 된 거죠. 인간도 없어질 수 있고, 지구가 소멸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나 자신에 대한 비관주의가 일상화되다보니 오히려 범생명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거죠.

 

소설 후반부는 확실히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요.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도 무척 철학적이죠.


그런가요? 다행이네요.(웃음) 전달이 안 될까봐 많이 쓴 것도 있거든요. 상당히 많은 분들이 ‘사람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그런 걸 고민하느냐’라는 말에 대해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많이 봐왔거든요. 한때 권력을 가졌건 지금 많은 돈을 가지고 있건 간에 노인들은 다 비참해요. 본인도 어차피 죽을 거고 그렇게 쌓아놓은 것이 아무 소용없는데 무엇 하러 남들을 그렇게 괴롭히나요. 웃기는 일이잖아요. 또 생각해보면 인간이 그러고 살죠. 어차피 소멸할 거면서 온 지구와 동물을 학대해요. 웃기죠. 그런 것들을 소설에 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 범생명주의자가 안 될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죽음을 생각해야만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죠.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우리는 아무도 생명을 생각하지 않죠.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을 생각하겠어요?

 

어쨌든 모든 사람은 늙어요. 이런 현실 인식을 갖고 있는 작가의 경우는 어떤가요? 행복한 노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 같은 걸 읽으면 농촌 사회의 노인들은 불행하지 않대요. 농촌 사회가 옳다고 얘기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고요. 지역 공동체가 남아 있는 사회의 노인들은 불행하지 않다고 해요. 수렵 채집 사회의 노인을 생각해봐요. 노인이 불행했을까요? 많은 인류학자가 얘기하는 거지만 그 공동체에 노인이 없었다면 아이들의 양육이 불가능했다고 얘기하거든요. 노인은 그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이죠. 노인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딱 하나죠. 젊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위치를 되찾아야죠. 근데 지금 우리 사회는 아니죠. 노인들을 다 싫어해요. 꼰대라고 싫어하잖아요. 제 나이만 돼도 꼰대라고 싫어하는데요.

 

소설에 나온 한 마디가 떠오르네요. 인간에 대해 “언젠가는 저주를 받고 말 거야”라고 말하죠.


몇 년 전만 해도 ‘요즘 경제가 어렵다’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금년 들어오면서 느끼는 게 뭐냐면요. 사람들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큰일 났다’라는 말을 해요. ‘헬조선’도 다 마찬가지죠. 심지어 저희 어머니가 납득하시기 시작했어요. 제 형과 누나가 열 살이 많은데요. 어머니가 이제 제가 형이나 누나와 같은 세대에 태어났으면 지금처럼 살고 있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시는 거예요. 그건 제 잘못이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들이 십 년 전에 ‘내가 뭘 잘못했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작년부터는 처음부터 될 수가 없는 싸움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인식이 바뀌었어요. 이런 게 정말 큰일인 거거든요.


‘기대이론’이라는 게 있죠. 어떤 사회에 미래에는 잘될 것이란 기대가 넘쳐나면 그 사회는 지금 당장 가난해도 문제가 없어요. 예를 들어 힘들게 막노동을 해라, 대신 십 년 후에 잘살게 될 거야, 라고 하면 십 년 막노동해요. 그런데 희망이 없다면 누가 하겠어요? 지금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이 딱 그거죠. 아버지 세대가 갈 길이 없는 걸 지금 눈으로 보고 있잖아요.

 

한편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에요.


우리는 어차피 죽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뒤에 남는 건 뭐겠어요. 내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생명이고, 생명이 사라진다 해도 존속할 지구고, 지구가 사라진대도 계속될 우주고, 그 우주에서 또 다시 탄생하게 될 생명, 이런 거잖아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만약 내가 나의 생존과 나의 행복만을 따진다면 잠수함 밖으로 나가면 안 되죠. 그런데 내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할 생명을 생각한다면 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루시’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가 있죠.


아시겠지만 라틴어로 ‘빛’이라는 뜻인데요. 루시는 가상의 물고기예요. 최소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물이고요. 최소한의 에너지라는 건 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빼앗지 않는다는 거예요. 최소한으로 빼앗는다는 건데요. 갑자기 개체가 늘어난 건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에요. 평소에도 개체를 늘리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생존 자체가 죄악이잖아요. 내가 산다는 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일인데 루시는 최소한으로 죽이면서 살아가는 시스템에 대한 은유죠. 그런데 이들은 위기에 닥쳤으니까 루시처럼 살아야겠죠. 그게 ‘빛’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었던 거고요. 이름이 촌스럽다고 욕 많이 먹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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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언젠가 꼭 하고 싶은,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가 있나요?


장편을 구상해놨는데요. SF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감옥행성이라는 설정이에요. 외계인이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우리를 모두 감금해놓고 살게 한 스토리 뱅크죠. 이 소설에 나오는 얘기들은 다 허구지만 소설에 가져다 쓰는 이론들은 진짜예요. 그 이론들을 다 퍼즐처럼 맞춰서 지구가 외계인의 음모라는 걸 제가 증명할 거예요.

 

종교와 닿는 얘기일 것 같네요.


종교 얘기도 나와요. 인터넷 얘기도 다 나올 거예요. 최대한 그렇게 노력해보려고요. 그 소설을 읽으면 진짜 지구는 외계인의 음모구나 하고 믿어지는 느낌이 들도록 쓸 생각이고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소설이에요. 보면 재미있으실 거예요. 내년에 집필 시작해서 내년 안에 끝내려고요.

 

지역 작은 책방들을 돌면서 콘서트를 했다고 들었어요.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준비를 하는 건가요?


그렇죠, 보는 거죠. 수익이 생기거나 이런 건 아닌데요. 가능성이 있는가를 보는 거죠. 일부러 공연 장소도 책방으로 해본 거고요. 이번에 느낀 건요. 사람들이 심각하게 문학에 관심이 없어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십 년 전이라면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런 걸 보면 문화에 대한 욕구가 없진 않아요.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문학의 미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지방 서점 다니면서 느낀 게 있어요. 예를 들어 ‘남해의 봄날’ 같은 책방은요. 원래 문학 코너가 없었대요. 대전 ‘도어북스’ 같은 경우도 가면 독립출판물 밖에 없어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다루지 않아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시장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거죠. 작은 책방들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책도 되게 많아요. 독자들이 이제 문학을 소비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왜 책을 안 읽을까 하잖아요. 뭐가 문제냐고요. 예전에 어떤 평론가가 제게 묻더라고요. 제 대답은 대한민국 고용 구조의 문제라는 거였어요. 아홉 시에 출근해서 여덟 시, 아홉 시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열 시잖아요. 열한 시에는 자야 하는데 그 한 시간 동안 TV보지 누가 책을 읽느냐고요. 주말에 놀아야죠. 독자가 뭘 잘못했어요? 나도 바빠서 책을 못 읽는데요.(웃음)

 

확실히 독립출판물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요.


독립출판이 희망이라고 보는 게요. 플랫폼이 생기면 책을 어떻게 제작하게 되느냐면요. 작가랑 일러스트레이터만 있으면 돼요. 그러면 제작비가 훨씬 줄어들겠죠. 그렇게 해서 플랫폼에 탑재가 되면 그 뒤부터는 인세가 발생할 거잖아요. 앞으로의 출판 형식은 디지털 독립출판이 상당 부분 차지하지 않을까요. 그게 대안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금 출판사 시스템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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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 속 파랑노희준 저 | 자음과모음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노희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인류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심해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절망과 희망이라는 경계선 위에 세워놓는다. 구세계의 마지막 날, 인류 앞에 나타날 단 하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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