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은 채도가 없어서 무채색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검정에 색채가 없어진 까닭은 모든 색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망각에 색이 있다면, 검정이리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 때로는 운명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 일들을 망각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선 뭔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를 잊고 그저 거기에 검은 것이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한 채 살아간다. 망각의 어둠은 늘 그렇게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언젠가 자신을 직시하기를 기다리며. 마치 매일 찾아오는 밤하늘의 그 거대한 검정처럼.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 아래의 이 무서움
이 거대한 검정의 세계를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고 일본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에게 묻는다면, 그는 우리를 도후쿠(東北) 지방의 중앙을 남북으로 잇는 오우(奧羽) 산맥의, 미야기 현과 야마가타 현의 남쪽 경계에 위치한 자오(藏王) 산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앗, 하고 숨을 삼킬 만큼 하늘에 별이 가득”한 풍경을 볼 수 있다니까. 그게 다일까? 우리가 묻는다면, 그는 다시 자오 산의 달리아 화원에서 중턱의 호수 돗코누마를 연결하는 케이블카로 우리를 데려가 한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겠지. 그녀는 지금 10년 전에 헤어진 전 남편을 그 케이블카에서 우연히 만난 참이었다. 바로 여기서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는 시작한다.
망각의 검은 책략에 맞서 그 여자 가쓰누마 아키가 하는 일은 글쓰기다.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망각을 뒤흔들어 어둠 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과거를 다시 끄집어낸다. 덕분에 독자들은 십 년 전 스물다섯 살이던 아키가 어느 날 새벽 5시, 경찰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스물일곱 살이던 남편 아리마 야스아키가 교토 아라시야의 여관에서 한 여성과 동반자살을 시도해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키가 대학 1학년이던 시절에 처음 만나 5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해 2년 3개월 동안 함께 살았던 남편이었다. 분노와 용서 사이를 오가던 아키의 마음은 남편과 동반자살을 한 여성 세오 유카코의 아버지에게 두 사람이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깨끗하게 정리된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왜 이제 와 그녀는 그 일을 종이에 쓰고, 또 그걸 우연히 만난 전 남편에게 보내는 것일까? 그건 둘이 우연히 케이블카에서 만난 그 날 밤, 아키가 자오 산의 밤하늘을 올려다봤기 때문이었다.
완만한 사면에 조성된 달리아 화원에는 그저 까만 윤곽과 아련한 향기만 있고 꽃의 색채는 밤의 어둠에 감추어진 채 바람소리만 들려왔습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산들도, 케이블카 승강장 건물도, 와이어를 지탱하는 쇠기둥도 까맣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으며 그 위로 하늘에는 은하수가 선명하게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화원 한가운데로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위로, 위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달리아 화원 끝까지 올라가자 작은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야마가타 역 앞에서 사 온 야케를 입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고 우주의 반짝임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아아, 별들이 어쩌면 그렇게 쓸쓸하던지요.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별들이 어쩌면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던지요. (18~19쪽)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 아래의 이 무서움이란 십 년 전 남편의 동반자살 사건의 진실 앞에서 그녀가 느꼈던 감정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이 진실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그 사실마저 잊어버렸겠지만, 그 무서움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제는 그 진실에 대해 알고 싶다고 용기를 내는 까닭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옆에 장애를 가진 아들 기요타카가 있기 때문이다. 걷는 게 불편한 기요타카로서는 밤하늘을 보는 것 자체가 어려웠지만, 엄마가 강한 어조로 격려하자 생각을 고쳐먹고 어둠 속으로 조금씩 걸어갔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엄마가 아들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는 것 같지만, 정작 뭔가를 배운 건 엄마 자신이다. 아키는 이제 거기 망각에는 직시하고 싶지 않은 진실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힘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그걸 온몸으로 느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Night Song’으로 시작해 ‘Night Song’으로 끝나는 음반
노르웨이 출신의 피아니스트 케틸 비외른스타드는 작년에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할 정도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재즈 뮤지션이지만, 시집과 소설과 평전 등 30여 권에 달하는 책을 펴낸 저자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 독일, 영국, 미국 등에 번역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자전적 소설 『음악 속으로』는 국내에서 번역돼 있다. 그의 다른 소설 중에는 스릴러물도 있는데, 그가 ‘The Sea’, ‘The River’ 등에서 보여준 서정적인 선율을 떠올리면 상당히 의외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스릴러 소설을 쓰는 노르웨이의 재즈 피아니스트라면 어쩐지 그럴 듯하기도 하다.
그는 첼로라면 주로 데이비드 달링과 호흡을 맞춰오다가 지난 2011년 스웨덴의 젊은 뮤지션 스반테 헨리슨과 함께 ‘Night Song’이라는 음반을 내놓았다. 스반테 헨리슨 역시 주목할 만한 이력을 지녔다. 12살 때 한 콘서트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던 여성에게 반해 베이스 기타에 입문했다.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하면서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내다가 26살에 돌연 윙베이 말름스틴 밴드에 베이시스트로 합류해 두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첼로는 이 시기에 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사람은 3부작 스릴러 소설을 쓰는 피아니스트이고, 다른 사람은 헤비메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소화하는 첼리스트다. 과연 두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이란 어떨까? 모두 16개의 연주곡이 실린 이 음반은 ‘Night Song’이라는 곡으로 시작해서 같은 음악으로 끝난다. 다만 다른 것은 시작하는 곡은 저녁 버전이고, 끝나는 곡은 아침 버전이라는 것. 두 곡은 미묘하게 빠르기가 다르다. 저녁 버전이 빠르고 아침 버전이 느리다. 그리고 그 사이에 14곡이 들어 있다.
CD를 넣고 눈을 감으면 서서히 해가 저물면서 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한 곡 한 곡 진행하면서 밤은 점점 깊어지고 마음은 가라앉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11번째에 흘러나오는 ‘The Other’다. 그쯤이면 밤은 더없이 고요하고 하강하는 선율은 서늘하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아키처럼 나도 뭔가를 보게 된다. 이 인생에 대한, 더 복잡하고 더 불가해한 영상이랄까. 어쩌면 세오 유카코에게 목이 찔린 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리마 야스아키가 제3자가 되어 바라보던 자신의 상처 입은 몸과 그를 구하려던 의료진의 모습을 담은 영상 같은 것 일수도.
영상은 제가 한 행동이나 사고에서 어떤 것만을 끄집어내 저를 거기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어떤 것이란 제가 행한 악과 선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말 외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단순한 도덕적인 악이나 선이 아닙니다. 생명에 물들어 있던 독소와 그것과는 정반대인 청정한 것이 구분되어 저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147쪽)
야스아키가 이 선과 악을 일컬어 단순한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은, 선인지 악인지 판단할 수 없어 그저 운명이라고 여기고 망각 속으로 묻어버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망각의 가장 깊은 곳에 우리가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것, 그래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아키처럼 뭔가 말할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불가해한 측면과 마주할 때면 우리를 두렵게 만들 뿐인 그런 것. 그런 것들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낯설어질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야스아키처럼. 그저 운명이라고 말하고 잊어버린 자신의 선과 악을 일일이 확인하며. 그러니 임사 체험을 통해 숨겨져 있던 선과 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야스아키가 그때 자신은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다시 살 수 있다는, 믿기 어려운 말
삶과 죽음, 그 다음은 무엇일까? 그 다음은 다시 삶이다. 살아가는 것은 이다지도 어려운데,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그보다도 더 어려운데, 마치 ‘Night Song’으로 시작한 음반이 다시 ‘Night Song’으로 끝나는 것처럼, 죽음 다음은 다시 삶이다라고,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어쨌든 이것은 나의 생각은 아니다. 무서움을 무릅쓰고 망각을 직시해 그간 숨겨졌던 이야기를 알게 된 아키가 야스아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을 본 당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무서워졌다고 썼지요. 하지만 사실은 짧다고 하면 짧다고 할 수 있고 또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양식이 되는 것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276쪽)
하지만 아키는 야스아키가 임사 상태에서 본 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비슷한 풍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이혼하고 1년 뒤, 그녀는 동네를 걸어가다가 ‘모차르트’라는 카페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서 그녀는 평생 모차르트만 듣고 살았던 주인남자의 권유로 ‘<39번> 심포니’를 듣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감상을 묻는 주인에게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주 불가사의한 것을 모차르트의 부드러운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해 2월 6일, 새벽 모차르트에 화재가 일어난다.
다 타 버린 지붕이 큰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 순간 수많은 구경꾼이 엉겁결에 일제히 뒷걸음질을 칠 만큼 불티의 물결이 덮쳐 왔습니다. 주인도 제 팔을 잡고 뒤쪽으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저는 한순간의 열기를 견디며 불티를 온몸으로 받아 냈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했을까요? 다만 저는 기세를 잃었나 싶다가도 갑자기 힘을 되찾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이 그래도 서서히,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94쪽)
온몸으로 불티를 받아 내던 아키는 그 순간 야스아키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억누르기 힘든 석별의 감정을 느꼈다. 그 석별의 감정을 말로 풀어내면 이토록 기나긴 편지가 되리라. 편지를 쓰면서 아키는 운명이라는 말로 포장해 망각 속에 묻어버렸던 석별의 감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거기에 바로 ‘짧다고 하면 짧고 또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양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마지막 편지에서 그녀는 쓴다. 과연 그런 것일까? 마지막에 이르러 첼로와 피아노는 다시 밤의 노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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