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시작과 함께 주목받은 신작 뮤지컬이 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출신 극작가 엘친의 희곡 ‘Citizens of Hell’을 무대에 올린 <미드나잇>. 영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첫 선을 보인 이 작품은 <미드나잇>이라는 음산한 제목부터 인간 내면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꿰뚫는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물이라는 수식어까지 새로운 무대를 갈망하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요. 개막 이후에는 작품과 함께 극의 핵심인물이면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캐릭터인 ‘비지터’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특히 지금껏 봐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비지터’ 정원영 씨의 모습이 신선한데요. 뮤지컬 <미드나잇>을 본 관객이라면 ‘Knock, Knock, Knock’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겠죠? 공연장 인근 카페에서 정원영 씨의 마음을 조심스레 두드려봤습니다.
“허상이죠. 누구에게나 있는 어둠, 그 어둠이 악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유혹일 수도 있고. ‘비지터’는 그런 것들을 자꾸 끄집어내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너무 전지전능한 상태에서 말하면 비지터라는 인물에 포커스가 집중되고 무거워지니까 때로는 굉장히 건달처럼 굴기도 하죠. 하나의 톤으로 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캐릭터인데, 정원영 씨가 연기해서 더 흥미롭지 않나 싶습니다.
“맞아요, 저한테는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비지터 같은 캐릭터는 눈매가 가장 큰 작용을 하는데 저는 아무리 진지한 척, 치명적인 척 해도(웃음). 이런 인물에 저를 캐스팅한 제작사에도 감사하고, 스스로도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제 공연을 보고 ‘생각보다 섬뜩하고 스릴러답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비지터를 통해 제 나이에 맞는, 남성스럽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12월 31일 자정 직전 한 부부에게 찾아온 비지터. 소련 시절, 공포정치와 대숙청의 중심에 있던 비밀경찰 엔카베데의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데,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첫공 때 객석을 한 번 봤어요. 더블 캐스팅된 고상호 배우가 등장했을 때는 ‘저 낯설고 미스터리한 인물이 무슨 일을 벌일까?’라는 호기심이 가득한데, 제가 등장했을 때는 ‘뭐야, 어색해!’라는 반응이 올 거라 예상했거든요. 실제로도 그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같은 위트에서 저는 조금 더 무서운 걸 택했고, 거울을 보면서 표정연구를 많이 했어요.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는, 그래서 웃다 바로 접었을 때 웃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게요. 고상호 배우는 막 웃어도 무엇인지 모를 좋은 마스크를 가지고 있지만, 저는 자칫 마냥 행복하게 보일 수 있거든요. 이런 차이점 때문인지 누군가 고상호 배우 버전은 블랙코미디 같은데, 정원영 버전은 스릴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보셨다면 개인적으로는 성공이에요.”
그런데 작품이 어렵다기보다는 막막하다고 할까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배경으로 했는지 시놉시스에도, 극중에도 나오지 않잖아요. ‘엔카베데’가 유일한 힌트였던 것 같은데요.
“저희가 처음 대본을 받아서 리딩했을 때를 관객들이 느끼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공연이 올라가기 전 마지막에 했던 작업도 조금 더 친절해지는 거였어요. 상황을 확실하게 짚어주는 거였죠. 하지만 저희는 역사적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았고, 관객들도 그러길 바라요. 무대가 주는 분위기, 대사에 있는 좀 낯설고 난해한 단어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물음표를 떠올리게 하지만, 작품상 페이크라고 생각해요. 그게 <미드나잇>의 매력이고요. 사실 소재나 스토리가 꼬여 있지는 않거든요.”
최근에 <인 더 하이츠>도 잘 봤습니다. 두 작품의 색깔이 워낙 달라서 공연장으로 오는 발걸음도 다를 듯 합니다.
“그렇죠, <인 더 하이츠>는 초연 이후 일본 공연까지 갔다 와서 지금은 배우들도 가족 같아요. 초연 때만 해도 배우나 관객 모두에게 생소한 소재이고, 다양한 이주민들의 삶을 한국어로 표현한다는 것도 힘들었는데, 2년간 함께 하면서 참 많은 걸 찾았고, 작품의 본질인 열정을 제대로 드러내게 됐거든요. 그래서 공연장에 놀러가는 기분이에요. 반면 <미드나잇>은 라이선스 작품이지만 한국에서 세계 초연이라 극장에 올 때마다 긴장과 부담이 있어요. 지금껏 악역을 맡아본 적도 없고, 아무리 연습을 해도 엔카베데나 할당량 등 단어들이 너무 생소하기도 하고요. 게다가 비지터는 인간이 아니라서 뭔가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고 싶고,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니까 계속 집중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미드나잇> 무대에서도 몸을 많이 쓰시던데, 특히 <인 더 하이츠>는 ‘힙합뮤지컬’이라는 수식어가 붙잖아요. 우스나비는 뮤지컬배우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닐 텐데요.
“몸은 <미드나잇>에서 더 많이 써요, 춤이 많아서(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가수의 꿈을 꾸면서 밤새 노래 잘 하는 사람들 흉내도 내고, 비보잉 연습도 했어요. 노력 없이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한때 미쳤던 시절이 있었어요. 친구들이 게임에 관심이 많을 때 저는 흑인들의 춤과 노래에 빠졌었거든요. 그래서 <인 더 하이츠>의 랩과 힙합을 빨리 습득할 수 있었고, 뮤지컬배우로서 이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감사했어요. 제가 처음 뮤지컬을 할 때만 해도 허스키한 보이스나 팝적인 창법 때문에 뮤지컬 쪽에서는 조연 이상 하기는 힘들 거라고 했는데, 점차 다양한 작품이 나오는 걸 보면서 새로운 희망도 갖게 됐죠.”
‘힙합의 민족2’에도 출연하셨잖아요. 많은 배우들이 매체 연기는 물론이고 다채로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정원영 씨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려는 의지가 있는 거겠죠?
“욕심은 있어요. 이제 프로 뮤지컬배우가 됐다는 자부심도 생겼고, 그 타이틀의 가치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배우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에 스크린이든 방송이든 많은 것에 진출하고 싶고 도전하고 싶어요. ‘힙합의 민족2’ 같은 경우는 각 분야에서 랩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는데, 뮤지컬 쪽에서 저를 택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색깔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 좋게 참여했어요. 한편으로는 제가 래퍼가 아닌 만큼 뮤지컬배우로서 더 공부할 부분이 무엇인가 고민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됐고요.”
지난 10년간 뮤지컬배우로서 열심히 달려오셨는데, 30대이고 결혼도 하셨고, 뭔가 새로운 10년을 내다보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뭘 계획하며 살지는 않아요. 그동안 제가 가진 재능을 드러내며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10년은 다른 것들을 갈고 닦아서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 <미드나잇> 상견례 때 굉장히 놀랐어요. 연출을 비롯해 배우들 중에서 제가 나이가 가장 많더라고요. 처음이에요. 마냥 장난기 많은 정원영의 모습에서 좀 더 진중하고, 다른 사람을 챙길 수 있는 어른스러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배우는 철이 들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 철이라는 게 무엇인지 항상 고민해야죠.”
요즘 배우들을 만나다 보면 무언가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 놓으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어떻게든 두각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색깔이 뚜렷한 배우’가 되는 것이죠. 독특한 음색의 정원영 씨 또한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합니다. <인 더 하이츠>는 두말 할 것도 없고, <미드나잇>에서 멋들어지게 몸을 움직이는 정원영 씨를 보고 있으면 ‘역시!’라는 생각이 절로 드니까요. 친절한 작품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친절한 배우들이 관객과 밀접하게 교감하는 뮤지컬 <미드나잇>. 정원영 씨의 새로운 모습이 궁금하다면 ‘Knock, Knock, Knock’, 뮤지컬 <미드나잇>의 문을 힘차게 두드려 보시죠!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