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책장을 새로 들였다. 큰맘 먹고 주문제작을 한 거다. 지리산에서 4년을 건조시킨 편백나무를 잘라 만들었더니 방문을 열면 나무 향이 훅 번지는 것이 아주 그만이다. 그 김에 책 정리도 새로 했다. 저자 이름순으로 할까, 출판사 별로 꽂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양장본만 따로 추려냈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으므로 책 키만 얼추 맞춘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 책 한 권씩을 들려 보내는 습관이 있어서 같은 책을 여러 번 사야 하는 일이 잦다. 알아서 따박따박 책 잘 사서 읽는 친구라면 “알아서 한 권 골라.” 말하면 되지만, 내가 아니라면 일 년이 지나도 책장 한 번 넘길 일 없는 친구에게는 되도록 쉽고 편안한 책을 골라주어야 하고, 잔뜩 외로운 친구에게 외로운 책을 골라주기는 싫고, 시를 무서워하는 친구에게 시집을 골라주지도 않는다. 그래 보아야 냄비 받침 될 게 빤하니 말이다. 물론 내가 골라주는 책을 거절하고 제멋대로 날름 빼가는 친구도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 책장에서 제일 자주 사라진 책은 천명관의 『고래』다. “난 한국 소설은 별론데.” 친구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오기가 생겨서 냉큼 『고래』를 내밀곤 했다. 얼마 전 나도 『고래』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책장을 살폈지만 또 누굴 준 건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한 권을 더 샀다.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소설가 지망생 후배들에게 자주 건넸다. 나에게 교과서 같은 소설이었으므로 그들에게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내가 까르르 웃으며 읽은 책이라서 아무에게나 마구 선물을 했다. 그래도 아직 내 책장에 한 권 있으니 나는 아마 이 책을 열 권도 넘게 샀을 거다.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나도 덜 읽었는데 친구들이 자꾸 빼 갔다.
허밍버드 출판사에서 나온 클래식 시리즈는 책이 하도 예뻐 친구들이 눈독을 많이 들였다. 제일 자주 사라진 건 『어린왕자』다. 바로 옆에 내가 번역한 『빨강 머리 앤』도 꽂혀 있었지만 친구들은 꼭 『어린왕자』를 집었다. 『빨강 머리 앤』은 너무 두껍고 또 『어린왕자』를 번역한 김경주 시인이 잘생겨서 그런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도 근래에 실연을 한 친구만 아니라면 참 많이도 건넸다. 그 책은 너무 슬퍼서 실연을 겪은 친구에게는 감히 읽으라 할 수가 없었다. 고전을 읽어야겠다며 “오만과 편견 가져가도 돼?” 물었던 친구는 며칠 후 전화를 걸어왔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인 줄 알고 집어갔는데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가 쓴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였단다.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그 책이 없어서 어딜 갔나 했다.
한창훈의 『그 남자의 연애사』를 읽고 한국 소설에 퐁당 빠져버린 친구도 꽤 있다. 그들은 대부분 한창훈의 다른 소설을 스스로 찾아 읽었다. 요즘은 누가 뭐래도 장강명이 제일 핫한가 보았다. “장강명 소설 뭐 있어?”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는 친구도 그렇게 물으니 말이다.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나도 읽지 못해서 따로 숨기고 없는 척 했다. 오늘 밤, 침대로 들고 가야지. 며칠 전 들렀던 후배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를 가져갔다. 내일 새로 주문을 해야겠다. 있는 줄로만 알았던 책이 사라진 걸 깨달으면 공연히 서운하다. 그럴 줄 알면서도 자꾸 내어주는 나도 우습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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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천명관 저 | 문학동네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천명관의 『고래』(2004)는 지금까지의 소설 문법과 그 궤를 전혀 달리하는 작품으로, ‘노파-금복-춘희’로 이어지는 세 여인의 굴곡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농염한 묘사와 압도적인 서사로 그려내며 단번에 평단과 독자를 사로잡았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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