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어머니, 현모양처, 산수화에 능한 화가. 신사임당은 친근하면서도 정체를 온전히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런 그가 『은비령』의 작가 이순원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정본 소설 사임당』은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조명해 온 이순원 작가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사임당을 그리자고 생각”해 철저하게 고증한 후 재현한 작품이다. 여기에 극적인 반전이나 자극적인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삶은 그 자체로 소설이었다. 드물게 여성에게도 교육을 시킨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단정하고 사색적인 어른으로 성장한 신사임당,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과 가정교육 등 익히 알려진 이야기와 전혀 알지 못한 이야기가 신사임당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조명한다. 한 사람의 일생이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 이 한 권의 소설은 그것마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신사임당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한다.
“여성군자예요. 정말 공명정대했고요. 여성군자로서 예술적 재능을 다 발휘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색을 입혀 호출되었던 신사임당. 이제 그의 진짜 모습을 탐구해야 할 때다.
역사가 잡지 못한 걸 문학이
왜 신사임당이었을까요? 신사임당을 소재로 소설 집필을 결심한 시작점, 그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많이 알려졌죠. 더 알려질 게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요. 신사임당 너무 잘 알잖아요. 율곡 이이의 어머니고요. 우리나라 모성성의 대표적 인물이죠. 그런데 말이죠, TV에서도 잘못된 정보를 말해요. 교양 프로그램마저도 신사임당의 이름을 ‘신인선’이라 부르더라고요.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렇고요. 자료를 한 번 찾아봤어요. 보니까 과거 문학에서 처음 시작을 했더라고요. 그야말로 문학적 호명인데 그것이 인터넷 백과사전에까지 올라가고 그 인용이 인용의 인용을 거듭하다 잘못된 거예요. 그 외에 얼마나 더 많은 내용이 잘못 전해지고 있는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본명 외에도 신사임당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꽤 많잖아요.
신사임당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런 건 정말 말이 안 돼요. 우리나라 보물인 율곡 선생의 남매들이 부모님의 재산을 나눠 가진 ‘분재기(分財記, 보물 제477호, 이이 남매 화회문기)’ 내용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재산 목록을 보면 결코 가난하다 할 수 없거든요. 우리가 비서 한 명만 있어도 얼마나 여유롭나요. 그런데 율곡 남매들이 부모한테 물려받은 노비가 120명 가까이 돼요. 사임당 역시 그 자매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노비가 많고요. 노비뿐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가난하다, 가난해서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고 해요. 당시 그림을 팔아 생활한 사람은 없습니다. 도화서 화공들도 정승 판서들, 돈 있는 벼슬아치들의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받았지 산수화를 그려서 팔진 않았어요. 그런 것을 학자들도 가난하다는 점을 바탕에 깔아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문제가 많은 거예요.
이런 오해들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기록들을 보면 정사(正史)의 느낌을 주거든요. 기록에 ‘율곡이 죽었을 때 너무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수의를 빌려 입었다’는 식의 내용이 있어요. 이런 것들이 정사처럼 자리를 잡은 거죠. 또 사임당의 할아버지는 신숙권이고, 영월군수를 지낸 분인데요. 그보다 앞서 세종 때 신숙근이라는 사람이 영월군수를 지냈어요. 신숙근이 지은 매죽루에 훗날 단종이 ‘자규시(子規詩)’를 읊은 후 그곳이 자규루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이것을 사임당의 할아버지가 지은 거라는 잘못된 자료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런 자료들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역사가 잡지 못한 걸 문학이 잡아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소설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사임당의 삶과 그 시대의 이야기들을 바르게 말해주는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최대한 역사에 가깝게 쓰겠다는 선생님의 목적이 이해가 되네요. 소설 앞에도 ‘정본’이라고 수식하고 있어요.
사건들은 최대한이 아니라 아주 정사에 맞게 기록했어요.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왜 처가에서 물려받은 집으로 왔는가. ‘기묘사화’가 있을 때까지는 과거 시험을 계속 봤었거든요. 그러다가 조광조가 붙잡히고 그것 때문에 나흘 간 옥고를 치르고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에 이름을 올리죠. 이런 건 사실로 두고 그 틈에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한 거예요. 과거 시험은 어떻게 봤는가, 서당에서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는 상상이지만 실제 그들이 공부한 방식은 풍속사에 나온 그대로예요.
공부가 대단했어야 할 것 같은데, 자료 찾기에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자료 찾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웃음) 어떻게 그런 자료를 찾았느냐고 학자가 놀란 경우도 있었고요. 자료 찾기는 수사와 비슷해요. 이쪽과 저쪽을 비춰보는 거죠.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빈 조각도 나와요. 그러나 군데군데 맞추다 보면 빈 조각도 학의 날개가 들어가겠구나, 구름이 들어가겠구나, 알게 되잖아요. 또 하나는 묘비예요. 실제 사람들의 행적을 묘비에 쓰인 내용으로 알 수 있거든요. 그것을 또 문서로 남기기도 하고요. 조선시대에 웬만한 벼슬을 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거의 묘비와 묘갈(墓碣)에서 따온 것들을 정리한 것들이거든요. 그것을 찾으면 생몰년도까지 확인할 수가 있는 거죠.
집필 기간이 얼마나 되었나요?
자료 찾는 것과 쓰는 것을 포함해 거의 2년 정도 걸렸어요. 쓰는 중에도 계속 자료를 찾아야 했고요. 강릉에 계신 향토 사학자 분께 끊임없이 자문을 구했어요.
신사임당,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
그렇게 조사 하시는 중에 미처 밝혀지지 않았던 신사임당에 관한 새로운 사실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사임당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였어요. 생각해보세요. 사임당과 안견은 80년에서 90년 정도 간격이 있어요. 거의 백 년 가까운 동안 그림을 그리는 사람, 특히 도화서에는 얼마나 많은 화공들이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중종 때 어숙권 같은 ‘패관잡기(稗官雜記)’를 쓴 사람이 율곡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나중에 띄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기록으로 ‘사인(士人, 선비) 이난수(이원수)의 처(妻) 신씨가 산수화로는 안견 다음이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사임당의 산수화가 없어요. 사임당이 자기의 인장을 찍은 산수화는 지금 없어요. 그런 것들이 왜 없어졌는지 안타깝죠.
짐작되는 부분은 있겠죠? 소설 안에도 관련한 내용을 적으셨는데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면요. 후부인(중국 북송 대유학자 정호, 정이 형제의 어머니)과 율곡의 어머니를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어요. 후부인은 여자가 필체를 남기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어쩌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아닐까 해요. 지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런 생각까지도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자신이 종주로 받드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가 중국의 후부인처럼 집안에서 바느질이나 하고 좀 더 나가 자수 정도나 하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면 두 분의 부인을 바로 일치시키고 율곡 선생도 정호ㆍ정이 형제와 바로 일치시킬 수 있는데, 어머니는 시문만 남긴 것이 아니라 부인의 몸으로 집 바깥으로 나가 세상을 두루 둘러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산수화를 그렸다는 게 무엇보다 못마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였던 백년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백년 후의 모습으로 송시열이 가장 앞에서 이끌어 가는 조선 성리학이 예전보다 더 강퍅하게 집안에서 부녀에게 강압하고 있는 질서인지도 모릅니다.(384-385쪽)
사임당이 살아 있던 당대에는 사임당이 자식 교육을 잘 시켰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열세 살 된 셋째 아들이 초시에 장원한 것은 물론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만 보고 사임당이 죽었는데 그런 어머니에게 자식 교육을 잘 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러니 당시에는 사임당을 있는 그대로, 예술가로 평가를 한 거예요. 사임당이 죽고 백 년이 지난 다음에 동인과 서인, 노론과 서론이 싸우면서 율곡을 받들기 위해서 사임당을 받들다 보니 생긴 일 같아요. 현숙한 여인, 율곡을 낳은 어머니로서만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시대 요구에 따라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이 이용당한 측면이 있잖아요. 이에 대해서는 ‘작가의 말’에도 길게 언급하셨어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장지연도 사임당을 군국의 어머니라고 얘기를 했고요. 해방 이후에도 그랬죠. 제가 아홉 살 때 오죽헌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그곳은 건물 하나뿐인 퇴락한 곳이었어요. 한 십 년 사이 다시 갔더니 굉장히 넓어졌어요. 지금 사람들이 오죽헌 경내에 가서 어느 건물이 오죽헌인지 못 찾는 경우도 있어요. 아산 현충사와 함께 오죽헌을 성역화 시키는 작업이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사임당이 ‘현모양처’가 된 거예요. 당시는 육영수와 사임당을 동일시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 작업 속에 지금까지 현모양처 이미지로 이어져왔어요. 그러다가 입시전쟁을 지나면서 ‘교육의 어머니’로 변모했고요.
실제 신사임당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사임당이란 인물은 다 알아요.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진짜 면모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사임당을 만들어낸 과정, 사임당이 자란 오죽헌의 학풍이랄까 이런 것도 대단했거든요. 사임당을 교육의 어머니라 하면서도 사임당이 일곱 자녀를 서당에 안 보내고 직접 교육시켰다는 이야기를 잘 모르죠. 그냥 교육의 어머니기만 한 거예요. 그러나 조선 전체에 집에서 공부한 사람은 있어도 어머니가 자녀에게 직접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교육시킨 건 유일해요. 초, 중학교 전 과정을 서당에 안 보내고 직접 교육시켰다는 건 율곡의 기록에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특히 드라마와 책 등 지금 그를 시대가 적극적으로 호출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맹목적으로 현모양처라고만 했던 건 잘못했다, 는 교훈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자유사상을 넣는 거예요. 연애라는 상상도 하고요. 그러니까 더 나쁘게 또 한 번 왜곡이 이루어진다고 봐요. 살아온 삶과 예술적 재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연애까지 포함한 왜곡을 더하는 거죠. 지금 시대가 원하는 바람을 덧씌워요. 이것은 연구가 안 이루어져서 그래요. 달리 봐야 하는데 어떻게 달리 봐야 할지 모르는 채로 달리 보니까 손쉽게 왜곡을 하는 거죠. 가부장제의 사슬을 풀었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실제 가부장제의 사슬을 풀진 못했어요. 그러나 그 시대에 아녀자가 그림과 글을 한 것도 대단한데 바깥에 나가서 산수화까지 그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기존의 통념과 관습을 깬 선구자적 면모가 있네요.
지금의 판단으로 ‘결국은 가부장제를 인정했네’라고 볼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율곡의 ‘선비행장(先?行狀,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도 ‘가군께서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여쭤서 바르게 잡고 자제가 잘못하면 호되게 질책했다’고 적혀있거든요. 이런 것만 봐도 당시에 여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신사임당의 본명, 신인선?
신사임당을 둘러싼 큰 오해 중 대표적으로 본명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입을 통해 이런 오해에 대한 항변을 듣고 싶습니다.
종이에 인쇄된 사전에는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데 사전들이 인터넷으로 작업화 되면서 보강되듯 이 내용이 들어가요. 그러다보니 학자들도 그것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건데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못 불렀어요. 스승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못 불렀죠. ‘기휘(忌諱)’라고 하는데요. 지금도 부모님 이름을 말하면 어른들이 야단을 치잖아요. 명체, 이름과 몸이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 학자라면, 이름이 나올 수가 없는 건데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해 해야죠. 조선 시대를 이끌어온 충효의 기본적 사상인데 말이에요. 후학이라면 기본적으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소설에서는 신인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계시잖아요. 그 이유는 뭔가요?
그렇다고 다른 이름을 쓰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먼저 많은 문인들이 이루어놓은 이름을 쓴 거죠. 그대로 쓰긴 하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그 이름인 것은 아니다, 라는 거예요. 이름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 신인선이라는 이름을 만든 것도 문학이 한 일인데 새롭게 만들기보다 많은 작가들이 쓴 그 이름을 문학에서는 이대로 쓰자, 라고요.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소설을 쓰시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가요?
자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여러 학자 분들에게 자문을 많이 받았고요. 가장 사실에 가까운 사임당을 그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그려도 대단한 인물이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그리니까 진짜 모습이 드러나요. 왜 교육의 어머니인지 몰랐지만 이 소설을 보면 진짜 사임당이 교육의 어머니였구나, 알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죠.
소설 작업을 하면서 제일 경계했던 점도 그렇다면 사실 왜곡이었겠네요.
그것도 있고요. 특히 경계했던 게 있어요. 내가 사임당에 대해서 쓰면 나도 모르게 사임당을 받들고 싶어지죠. 배우들이 역사 인물을 연기하면 배우 자신도 자기가 맡은 인물에 빠지듯이 말이에요. 연구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작가도 누구의 삶을 쓴다고 할 때 받들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제가 쓰면서 가장 경계했던 부분들이죠. 없는 이야기들을 여기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단정하고 담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 같아요.
쓰면서 참 힘들었어요.(웃음) 노론들이 훼손을 했을 것이라는 몇 줄을 단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소설이지만 왜 자료가 없을까 하는 것은 그저 독자들이 생각할 부분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어요. 사임당의 산수화가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깝죠. 사임당의 산수에 대해서는 어숙곤 한 사람뿐 아니라 그가 당대에 전해들은 세평을 쓴 것일 텐데요.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작품이 없어진 것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에요.
신사임당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떨까요?
정숙하고 현숙하죠. 학문에 대해서도 자녀 교육을 통해 재능을 발휘했고, 예술에서도 재능을 다 발휘한 거죠.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게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요. 여성군자예요. 정말 공명정대했고요. 여성군자로서 예술적 재능을 다 발휘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
등단 30년, 이순원의 작품 세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자기 색깔대로 글을 쓰잖아요. 이것은 역사 소설이니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썼고요. 제 작품 전체로 보면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어요. 작품 세계가 원형질적이고,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게 내 몫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작품의 주제와 소재의 폭은 넓어도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작품에도 사임당의 아들 이우의 입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따뜻함보다는 그리움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따뜻하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도 있으신 건가요?
모질어도, 모진 것을 안 보여주고 따뜻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진 것을 바탕해서 장차 있어야 할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것은 지금 현실이 따뜻한가 안 따뜻한가를 떠난 거예요. 모질수록 제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모진 삶을 말씀하셨는데요. 게다가 지금은 워낙 실용성과 효율이 강조되고 있잖아요. 이런 세상에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기뻐할 일도 있지만 세상일에 낙담할 일이 참 많잖아요. 낙담할 일이 더 많죠. 문학은 낙담하는 이 세상에 마지막 보루와 같아요. 문학의 효용성은 즐거움이죠. 제일 큰 것이 즐거움이고요. 그 안에서 배우죠. 역사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적 지식이 역사 소설에 있잖아요. 철학자의 말 속에 나오지 않는 철학적인 아우라가 문학에서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문학적 사명이 아닌가 싶고요.
‘나는 문학이 없어도 살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없어도 안 될 것이 바로 문학이에요. 이런 인터뷰, 드라마, 모두 문학이죠. 문학 없이도 산다는 사람들이야말로 문학이 없으면 가장 심심해질 사람들 같아요. 그것은 효용성의 문제를 떠나는 거고요.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죠.
강의를 하거나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뭔가요?
문학이 새롭게 어디서 온 건 줄 알아요. 그러나 내 삶, 내가 살아온 삶 안에 문학적 텍스트가 있는 거예요. 제가 사임당을 본 것도 강릉 사람으로 살아왔던 나의 성장 환경 안에서 본 거고요.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역시 내가 보아온 내 삶 안에서 그린 거거든요. 그런데 문학이 내 삶이 가리켜서 나온 거라는 걸 종종 잊어요. 그냥 문장 공부만 하면 문학이 다 된 걸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요. 자기 삶 안에서 텍스트를 끄집어내는 게 문학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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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소설 사임당이순원 저 | 노란잠수함
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과 기록을 외면한 빈곤한 시선으로 탐구되어 전해져 왔다. 현모양처, 교육의 어머니, 군국의 어머니 등 시대의 요구에 따라 500년이 넘게 왜곡되어 온 인물로 우리 역사에서 사임당만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언급되는 여성은 흔치 않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과연, 얼마만큼 진실인가?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