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온 음악 혁명
바로크 시대를 지나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서자 악보는 더 이상 음악가들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었다. 산업의 발달로 경제력을 갖게 된 중산층과 시민계급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음악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였다.
글ㆍ사진 홍승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 교수)
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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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맞서 개혁을 외친 지 500년이 되는 해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종교만 바꿔놓은 게 아니라 독일과 유럽을, 그리고 세상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의 조상쯤으로 떠받들고 있는 바흐의 종교음악 대부분이 루터 파 교회의 예배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직접적인 것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이 오히려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성서의 왜곡을 바로잡고자 비텐부르크에 있는 만인성자교회의 문앞에 "95개의 논제"를 써서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정작 독일 국민의 95%는 그것을 전혀 읽을 수조차 없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루터도 그 논제를 라틴어로 썼고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한 신과의 직접 소통과 구원을 설파했던 루터는 이를 위해 당장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서둘렀고 번역한 성서를 출판하고 보급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집집마다 성경책이 있어 누구나 독일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상 또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같은 일이 독일 밖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유럽은 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종교개혁과 성서의 보급은 인쇄술과 출판업의 발전을 가져와 악보의 인쇄와 출판으로 확산되었다. 그 덕에 바흐는 평생 독일 땅을 벗어나지 않고도 유럽 각지의 수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악보로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습득한 그들의 서로 다른 기법과 양식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를 잃은 바흐는 오르트루프(Ohrdruf)에 있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에게 맡겨졌다. 형으로부터 오르간을 배우긴 했지만 바흐의 작곡 공부는 거의 독학이었고 주로 형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작곡가의 악보를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중에는 형이 사보를 허락하지 않은 대가들의 곡들도 많았는데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 1616~67)와 케를(Johann Kaspar Kerll 1627~93),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경~1707)와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등의 작품이었다. 그 때문에 형이 잠든 늦은 밤에 책장에서 몰래 악보를 꺼내 달빛을 등불 삼아 악보를 베끼는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지만, 훗날 바흐의 업적을 만든 바탕이 되었다.


바로크 시대를 지나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서자 악보는 더 이상 음악가들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었다. 산업의 발달로 경제력을 갖게 된 중산층과 시민계급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음악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였다. 경제적인 여유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음악가를 고용하여 집에 둘 형편은 아니었기에 스스로 악기를 배워서라도 음악을 즐기려 했고, 그러려면 당연히 악보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하이든의 명성은 그렇게 온 유럽에 널리 퍼졌다. 여기저기서 하이든의 악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급기야 하이든이 쓰지도 않은 작품을 하이든의 곡이라고 속여서 파는 업자들이 생겨났고 그 때문에 오늘날 하이든은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위작이 가장 많은 작곡가로 남게 되었다.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에서 평생을 바쳐 일하다가 런던으로 갔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이든에게 열광하며 환영했던 것도 다 바다를 건너서까지 널리 퍼진 하이든의 명성 때문이었다. 빈으로 돌아와 임종을 맞았을 때 빈을 포위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선발대를 먼저 하이든의 집으로 보내 그를 지키게 했다. 한 병사는 하이든의 침실로 달려가 그가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리아를 불러 병상에 누운 노대가를 감동시켰다.


악보의 출판은 작곡가의 명성뿐만 아니라 수입까지 늘려주었다. 하이든의 시대만 해도 음악가의 성공이라면 그저 돈 많은 귀족에게 고용되어 평생 그 집에서 살면서 생계 걱정을 않는 것이었지만 베토벤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연주회를 열고, 악보를 출판하여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그로 말미암아 누군가에게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악보의 출판이 마침내 음악가에게 자유라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음악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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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 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음악학과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서양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사)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