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직업병일까?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집과 자동차를 내주겠다고 해도, 빨간 날이 없는 내게 동남아 휴양지에서 며칠 쉬자는 달콤한 제안이 들어와도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짐 싸고 공항가고, 그 여행을 위해 몇 주 동안 일을 몰아서 할 것을 생각하면 번거롭다. 해마다 휴가 때면 유럽으로 날아가다, 급기야 장기 공연여행까지 떠났던 과거가 있어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거라고!’ 오랜만에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그곳에 가기 위해 한 달간 일만 하고, 짐 싸고 공항가고, 14시간의 비행을 견뎠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바로 뉴욕. 그 유명했다는 시트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자유의 여인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쇼핑에도 큰 관심이 없는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일까?
뮤지컬 <헤드윅>이 초연됐던 호텔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뉴욕이 흥미로운 이유는 많은 공연이 초연되고 또 그 작품의 배경이 된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호텔에 묵어보고 싶었다. 뮤지컬 <헤드윅>이 초연됐던 곳이니까. 앞서 <헤드윅>의 뉴욕 데뷔는 1994년 맨해튼 다운타운의 록 클럽에서 이뤄졌지만 마니아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자 대본을 쓴 미첼과 음악을 만든 트래스크는 뭔가 특별한 장소를 찾는다. 그렇게 발견한 곳이 허드슨 강가에 자리한 호텔 ‘리버뷰’. 1912년 타이타닉의 생존자들이 묵었던 호텔로, 제작진은 이 호텔을 매입한 뒤 극장으로 개조해 1998년 2월 ‘제인 스트리트 시어터(Jane Street Theatre)’라는 이름으로 <헤드윅>을 무대에 올렸고, 2004년 4월 막을 내릴 때까지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갔다. 지금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다시 호텔로 운영되고 있는데, 허드슨 강가에 자리한 데다 깔끔하게 관리돼 꽤 인기가 많은 것 같다. 재밌는 것은 이 호텔의 상당수 룸이 선원들 방처럼 1층이나 2층 침대만 갖춘 ‘Bunk Bed Cabin’이다. 이 호텔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하면서도 결국 실천에 옮기지 못하게 하는 점이기도 한데, 캡슐호텔처럼 방이 좁은 데다 샤워시설과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임스퀘어 인근으로 숙소를 옮기기 전에 이곳에서는 4일만 머물 생각이었지만 너무 좁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데다 동행했던 친구가 공용 욕실 사용을 꺼린다는 말에 결국 예약을 취소했다(그런데 여행 중 보니 친구는 이틀에 한 번꼴로 샤워를 했다. 두 번만 참지!). 직접 머물지는 못했지만 <헤드윅>을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섰을 관객들을 상상하며 호텔 인근을 둘러보았다. 도보 2~3분 거리에 휘트니미술관도 있고, 호텔 내 바와 클럽도 유명하다고 하니 <헤드윅> 팬들이라면 한번 도전해 보시길!
뮤지컬 <찰리와 초콜릿 공장> vs. <알라딘>
뮤지컬을 보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올해는 런던보다는 뉴욕이 나을 수 있다.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 <위키드> 등 스테디셀러 공연이야 브로드웨이는 물론 웨스트엔드에서도 만나볼 수 있지만, 웨스트엔드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빌리 엘리엇>, <찰리와 초콜릿 공장>, <미스 사이공>, <보디가드>, <워 호스> 등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뉴욕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 <미스 사이공>이다. <해밀턴>은 어차피 티켓을 구할 수가 없고, 신파나 주크박스 뮤지컬도 당기지 않아 무대적인 상상력과 기발함이 가득하다는 <알라딘>과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선택했다. 두 작품은 각각 애니메이션과 동화를 뮤지컬로 만든 만큼 미리 줄거리를 알고 가면 내용 이해에는 문제가 없는 데다 볼거리가 많아서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었다. 특히 201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알라딘>과 2013년 런던에서 초연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연달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무대도 비교가 됐다고 할까. 두 작품 모두 재밌고, 연기 좋고, 음악 좋고, 무대 세트 훌륭하고. <알라딘>이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무대에 올린 만큼 조금 더 화려하고 현란하다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좀 더 따뜻하고 아기자기하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은 무대에서도 그대로 구현돼 알라딘과 자스민 공주는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고, 램프의 요정 지니는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면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는다. <알라딘>이 이렇게 무대에서 마술기법을 활용했다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뻔히 알면서도 속게 만드는 정통 공연기법이다. 찰리 외 골든 티켓을 확보한 네 명의 아이들은 배우들의 확실한 캐릭터 연기로 승부수를 띄웠고, 어떻게 표현할지 가장 궁금했던 움파룸파족은 특별 제작한 기발한 의상에 재미난 안무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두 작품이라 러시나 로터리 등이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TKTS에 나오는 할인표도 없다. 3월 말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뮤지컬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티켓 예매하기도 힘들었다. <알라딘>은 인터넷로터리(https://lottery.broadwaydirect.com)를 열어뒀다. 장당 30달러에 구입할 수 있는데, 관람일 하루 전에 로터리에 참여하면 다음날 아침 결과를 알려준다. <알라딘>은 자리에 여유가 있어 현지에서 인터넷로터리에 도전해 봤다. 다음날 조식을 먹으며 결과를 확인했더니 꽝. 잘 먹던 토스트가 갑자기 뻑뻑하게 느껴졌다. 하루 더 도전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러다 <알라딘>을 아예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공연장에 가서 제값을 주고 티켓을 샀다. 친구와 나란히 앉을 수도 없는 자리가 어찌나 비싸던지. 여행 일정이 짧고 꼭 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 티켓은 미리 예매하도록 하자!
날마다 가고 싶은 링컨센터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뉴욕에서 브로드웨이만큼 자주 찾게 되는 곳은 링컨센터일 것이다. 대규모 종합예술센터라고 할 수 있는 링컨센터는 크게 뉴욕 필하모닉의 전용 공연장인 David Geffen Hall,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뉴욕시티발레단의 전용극장인 David H. Koch Theater로 이뤄져 있다. 입구에서 전면에 보이는 것이 오페라 하우스로 메트 오페라와 아메리칸 발레씨어터의 발레 무대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왼쪽 건물에서 뉴욕시티발레단, 오른쪽 건물에서 뉴욕 필하모닉의 무대가 마련되는데, 모든 공연장에서 세계적이면서도 가장 뉴욕다운 무대를 접할 수 있는 셈이다.
4월 여행이라 각 예술단의 공연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일정을 잡기가 꽤 힘들었는데, 운 좋게도 뉴욕시티발레단의 ‘All Balanchine’과 Esa-Pekka Salonen 지휘로 뉴욕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감상할 수 있었다. 링컨센터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공연 전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꼬마들까지 멋지게 옷을 챙겨 입고 공연장에 들어서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특히 링컨센터 가운데 1962년 첫 번째로 문을 연 David Geffen Hall(Avery Fisher Hall로 불렸으나, 2015년 더 많은 후원금을 기부한 David Geffen에게 이름을 내주었다.) 복도에는 구스타프 말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 등 뉴욕 필하모닉을 거쳐 간 쟁쟁한 지휘자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뉴욕을 여행할 때면 주요 관광지, 특히 뮤지컬극장이 몰려 있는 타임스퀘어 인근에 숙소를 잡게 되는데, 만약 뉴욕에서 한 달간 살 수 있다면 링컨센터 인근에 머물 곳을 마련하고 싶다. 사람에 치이는 것도 덜하고, 센트럴파크도 가깝고, 수시로 링컨센터에 들러 다채로운 클래식과 발레, 오페라 공연을 마음껏 골라볼 수 있으니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