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의 한 장면
절단 난 자유 여신상 한 장면으로 멸망한 지구의 미래에 관한 가장 강력한 경고를 날렸던 <혹성탈출>(1968)의 프리퀄을 만든다고? 팀 버튼(<혹성탈출>(2001) 리메이크) 같은 바보야.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이하 ‘<진화의 시작>’)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두 번째 작품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 ‘<반격의 서막>’)에 이어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하 ‘<종의 전쟁>’)까지 공개된 현재 이 시리즈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최고다!
<진화의 시작>에서 시저(앤디 서키스)는 인간의 손에 길러지다가 격리된 후 인간 해방의 그 날을 꿈꾸며 유인원만의 진영을 꾸렸다. 인간과 거리를 두고 공존을 바라는 시저의 바람과 다르게 <반격의 서막>에서 사달이 났다. 인간은 유인원을 적으로 간주하고, 유인원 측의 코바 또한 인간 멸종을 주장하며 양측 모두 시저와 갈등을 겪었다. 그 뒤로 종적이 묘연한 상태의 시저는 <종의 전쟁>에서 다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시저의 표정에는 전에 없던 강한 분노가 매서운 눈매에 서리처럼 엉겨있다. 진절머리나는 인간을 향한 공격 선포의 의미다. 부러 눈에 띄지 않는 깊은 곳에 유인원의 보금자리를 꾸려 갈등을 미리 차단하려 했지만, 인간군이 침입해 시저의 가족을 공격하니, 이제 답은 하나다. 복수다!
영화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의 한 장면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시저다. <진화의 시작>의 과학자 윌(제임스 프랑코), <반격의 서막>의 군인 말콤(제이슨 클락)과 드레퓌스(게리 올드먼), <종의 전쟁>의 대령(우디 해럴슨) 등 인간 주인공도 등장하지만, 관객은 그 누구의 인간도 아닌 유인원 시저에 감정을 이입하며 ‘그’의 여정에 동참한다. 왜? 시리즈를 더할 때마다 인간을 향해 짓는 시저의 변화한 표정이 복잡한 설명을 대신한다.
<진화의 시작>에서 시저는 가족으로 지내왔던 윌과 강제로 헤어지면서 울부짖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반격의 서막>에서는 유인원과의 협력을 모색하는 말콤과 인간의 유인원 실험에서 영혼을 말살당한 코바 사이에서 공존이냐, 전쟁이냐, 이것이 문제였던 시저였다. 윌과 함께 했던 가족 관계에서 한없이 평화로웠던 시저는 전쟁을 거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고 <종의 전쟁>에 이르러서는 인간을 적으로 규정한다. 분노한 그의 표정에는 인간을 향한 동정의 감정이 에누리도 없다. 인류의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시저의 표정을 따라가는 <혹성탈출> 시리즈가 규정하는 인간은, 악(惡)이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유인원에 적의를 드러내는 인간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똑같이 적의를 드러내는 시저는 결과적으로 공존 대신 전쟁을 선택하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 시저 또한, (유사) 인간인 건가? 외양은 다르지만, 심리적으로 시저는 인간과 같다. 유인원 시저의 표정에 반응하며 인간 관객이 감정이입하는 이유다. 인간은 늘 그래왔다.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어딘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배제하고 배척하고 급기야 폭력을 행사하며 편을 가르고 지구 곳곳에 분란을 일으켜왔다.
<혹성탈출> 프리퀄 시리즈가 세 편의 이야기에서 배경의 DNA로 삼는 건 크게는 인류의 갈등 혹은 전쟁의 역사다. 인간과 갈등하는 대상이 유인원이라는 게 오락 면에서는 볼거리로, 기술 면에서는 CG의 진화로 기능할 뿐 또 다른 인간으로 치환해도 이 시리즈의 세계관을 해치지 않는다. <종의 전쟁>만 해도 인간군이 시저를 비롯해 유인원 포로들을 집단 수용소에 가두고 부려먹는 설정은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연상케 한다. 대령이 자신을 추종하는 군인들과 인간군을 이탈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 광경은 <지옥의 묵시록>(1979)이 역사적 배경으로 삼은 베트남전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대 유인원의 갈등 구도로 흐르던 이야기가 북부에서 내려온 인간군이 남부에 진지를 구축한 대령 군대와의 전쟁으로 전세로 바뀐다는 점에서 미국 남북전쟁의 우회적인 반영이다.
프리퀄 시리즈의 원작 <혹성탈출>에서 인간이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러 유인원에게 지배를 당하는 설정은 어리석은 역사의 반복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하는 교훈의 기회가 수백, 수천, 수만 번 있었어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인간은 늘 적색 신호등이 켜진 길 앞에서 유턴하는 대신 직진하는 선택으로 묵시록을 현실화했다. <종의 전쟁>은 두 갈래 길의 기로에 시저를 데려가 선택을 종용한다. 인류의 찬란한 유산(?)인 전쟁의 바통을 이어받을 것인가? 그간 가보지 못한 평화의 길을 개척할 것인가? 빨간 알약 줄까? 파란 알약 줄까?
사실 <종의 전쟁>에서 인간은 시저가 가만히 나눠도 멸종할 운명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개발한 백신이 변이를 일으켜 인간 대다수가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저가 요구받는 건 ‘자각’이다. 시저의 인간을 향한 복수심은 더 많은 유인원의 희생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인간과 대립했나 자괴감, 아니 자책감이 든 시저는 인간끼리의 전쟁에서 벗어나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미국 북쪽의 황폐한 땅 위에 유인원의 세계를 건설할 기반을 마련한다.
그렇게 인류 역사는 끝, 유인원 천국의 시작인가? 1968년의 <혹성탈출>과 앞뒤 이야기를 맞추는 <종의 전쟁>은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막을 내리지만, 여기에 해석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유인원은 인류에 가장 가까운 동물로, 사람 이외의 동물 중에서 지능이 가장 높다.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원숭이 등 이 종을 통틀어 유인원이라고 말한다. 시저 또한, 유인원이다. 시저는 <진화의 시작>에서 인간의 손상된 뇌 기능을 향상해주는 치료제를 주기적으로 맞고 엄청난 지능을 갖게 됐다. 그의 후손, 그러니까 코넬리우스도 그럴 테다. 진화는 계속된다는 얘기다.
그 진화의 끝이 인간이라고 희망하는 건 과장된 바람일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시저가 인간의 폭력성마저 닮아간다는 게 알리바이다. <혹성탈출>의 프리퀄 삼부작을 비롯해 원작 또한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성의 회복을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 진화의 마지막 퍼즐은 자각인 셈이다. 전쟁 중단! 평화 모색! 그러거나 말거나, 거대 제작비와 첨단의 CG 기술과 그에 따른 볼거리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에서 인간 심리의 근원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기념비적이라 할 만하다. <종의 전쟁>은 그런 작품이다. 원작의 기본 설정만 가져와 세 편 모두 각기 다른 이야기 전개 속에 고른 완성도를 보여주며 유의미한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시리즈. 난 이런 프리퀄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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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