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요즘 뜨는 표현이다. ‘균형’이라는 온건한 단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핵심은 일로부터 삶을 ‘탈환’하는 것이다. 일하는 시간의 일부를 옮겨오지 않고 삶의 시간을 늘릴 방도는 없다. 그러니 워라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사람들의 선택지다. 야근/특근을 하지 않을 경우 고용이나 소득에 위기가 닥치는 사람에게 워라밸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워라밸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일과 삶의 분리를 반영한다. ‘경제개발’을 이룬 세대의 자녀들은 워크로 라이프를 장식하지 않는다. 평생 직장이 사라진 시대, 노동소득 만으로 노후를 기약할 수 없는 시대, 일로 이룬 성취보다는 투자(투기)의 성취가 더 호기심을 끄는 시대엔 누구도 내 일이 내 삶을 대표한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삶은 퇴근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퇴근 시간은 당길 수 없는 현실에서, 삶은 늘 찰나에 머물고 워라밸은 슬픈 세태다.
『보이지 않는 고통』 은 노동현장을 누비며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 캐런 메싱의 회고록이다.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일터 속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개선하려는 평생의 노력을 잘 담고 있다. 청소노동자의 작업 도구, 고객센터 상담원의 근무일정표, 교사를 평가하는 지침 등이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생활 그리고 일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피는 과정을 섬세하게 돌아본다.
일터의 구체적인 업무구성, 규칙, 관행이 미치는 영향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행복한 삶을 위한 최전선이 바로 일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며 보낸다. 바로 그 일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 노동시간이나 최저임금 등 노동을 둘러싼 규칙의 문제는 우리 삶에 직결된다. 삶이 좋아지려면 일터가 좋아져야 하고, 일터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의 변화는 겉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은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며, 워크가 좋아져야 라이프가 좋아진다는 것이 메싱의 차분한 어조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메싱은 이 문제에 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리고 사회가 관심 가질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아직은 메싱과 같은 이들이 너무나도 적다. 언제쯤 우리는 일이 삶을 침범하지 않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한 건축사무소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양과 강철의 숲』 은 한 발 한 발 정진해가는 피아노 조율사의 이야기다. 서점 주인의 뭉클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 『섬에 있는 서점』 도 자신의 일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들을 읽고 나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메싱 역시 워크와 라이프가 하나인 삶을 살았다. 삶의 여유를 침범하지 않을 정도의 노동시간, 노동의 결과만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리고 일터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논의하고 고쳐가는 세상이 언젠가 오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도 우리의 일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일에서도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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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저/노수경 역 | 사계절
하나의 일이 개인의 평생을 지탱해 줄 수 없는 시대에, 자신과 일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일 외의 삶을 지키고 유지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다. 일과 삶이 벌어진 시대의 현실적 조언.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저 | 비채
자신의 일에 깊이 빠져드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그 공간의 공기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묘사된 소설. 우리도 우리의 일에서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정헌목 저 | 반비
일의 현장만큼이나 중요한 주거의 현장, 관계맺음의 현장을 탐사하는 인류학자의 이야기. 우리의 현장을 탐사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이금주(서점 직원)
chyes@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