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첵 예르카 Jacek Yerka, <생태계Ecosystem>, 2002년
작년 여름 18년 만에 비키니 수영복을 샀다. 20대에 샀던 수영복을 오래 입었고 30대 중반 이후로는 수영복을 입을 일도 없었다. 매일 보는 내 몸이지만 수영복을 고르느라 피팅룸에서 잠시 입어보고 거울을 보니 어쩐지 낯설었다. “어머, 효리 복근이야.”라며 내 배를 바라보던 친구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기억이 났다.
어떤 기준으로 내 배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효리 복근’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과거에 단단하고 매끈했던 내 배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4년 전에 개복수술을 했다. 가로로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지름이 2센티 정도 되는 흉터가 있다. 그 사이에 이 몸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세련된 디자인의 비키니 수영복을 걸치자 배 위에 그어진 흉터가 도드라졌다. 수영복 모델은 물론이요, 개인이 소셜네트워크에 올리는 사진들 속에서도 흉터가 있는 몸을 본 적은 없으니까.
8살에 신장염으로 한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30대 후반 나는 다시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파리의 한 병원에 누워있던 중,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는 위급한 상황을 맞았다. 나는 그때까지 복막염이 뭔지도 몰랐다. P?ritonite라는 단어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의사는 얼굴을 찡그리고 입으로 ‘피융~’ 소리를 내며 손으로 내 몸의 장기가 터져서 뱃속이 엉망이 되었다는 표현을 했다.
우리 몸은 때로 통증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는 흉터가 남는다. 흔히 수술을 ‘몸에 칼을 댄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표현이 참 으스스하다. 수술 후 나는 사람의 몸과 병에 대해 타인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과 같이 들리지 않았다. 첫번째 이별 후 누군가가 “깨졌다며?”라고 물었을 때 그 ‘깨졌다’는 말이 그야말로 내 귓가에 부닥치며 자음과 모음이 모두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처럼 나의 경험이 때로는 언어와의 마찰을 빚으며 삐걱거린다. ‘칼을 댄다’는 말은 마치 몸의 아픈 부위를 도려내고 자르고 속아내는 인상을 준다. 곧 ‘그 부위’의 문제에 머문다.
나는 수술 후 소화기 병동에 입원했다. 병실은 2인실이었다. 입원 환자들이 모두 소화기 쪽 수술환자이다 보니 우리는 ‘먹을 수 있는 환자’와 ‘먹을 수 없는 환자’로 서로의 병의 중함을 파악했다. 먹을 수 있는 환자면 다시 세 종류로 나눠서 ‘정상적인 식사’를 하는지, 제한된 음식을 먹는지, 아예 물 종류만 마시는지도 묻곤 했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정상적인 식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 정상적인 식사를 하는 환자군은 가족들이 올 때도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들을 싸들고 왔다. 나는 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커피 한 모금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지경이었다.
눈과 귀를 제외하고 내 온 몸의 구멍으로 플라스틱 호스가 드나들거나 피를 흘렸다. 나는 하필이면 수술 직전 생리를 시작했었고, 수술로 잠시 멈췄던 생리는 이틀 후 다시 진행되었다. 멀쩡한 옆구리도 구멍을 뚫어 비닐팩을 달아놓았고 아침 저녁으로 간호사가 커다란 주사기를 가져와 비닐팩 안의 주황색 액체를 빨아당겼다. 코를 통해 몸 안으로 깊숙히 연결된 호스가 커다란 기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오른쪽 팔에 꽃힌 주사기를 통해 항생제와 진통제, 물 등이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었다. 흥, <공각기동대>의 쿠사나키 모토코 같네. 나는 간병인의 도움으로 누워서 오줌을 누고 매일 아침 낯선 사람이 나를 일으켜 벌거벗긴 후 씼겼다. 몸의 안과 밖, 더러움과 깨끗함의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구멍과 구멍 아닌 곳,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모두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재구성되었다.
병원에서의 자기 소개는 어디를 언제 수술했는지, 언제끔 퇴원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이민생활이 얼마나 되었는지 묻듯이 병원에서는 환자 생활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새로 오는 환자들은 예외 없이 “밥을 몇 시에 줘요?”라고 물었다. 나는 옆 사람이 세 번째로 바뀔 즈음 어느새 장기입원 환자가 되어있었다. 병원의 간호사와 간병인이 교대하는 시간, 근무 날짜, 밥 주는 시간, 이들이 일하는 방식 등을 파악해갔고 나는 이 세계에 나름 적응했다. 처음에는 간호사를 수시로 불렀으나 나중에는 이만한 일로 부르면 혼난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걸어다닐 수 있게 되면서 어지간한 일은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몸 상태가 되었다. 다만 창문을 닫을 수 없고 의자를 옮길 수 없었다. 너무 무거웠다.
각 병동마다 하나의 사회가 형성된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 ‘자궁병동’에는 유산한 여자, 자궁 절제 수술한 여자, 낙태와 의료보험 문제를 따지는 여자 등이 모여 흐느끼고 짜증을 내고 또 위로한다. 더불어 아픈 여자들이 모여 있어도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집에 있는 행복하고 운 좋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쉬운 식품들을 주문하려고 식료품 가게나 야채 가게에 전화를 했다. 그들은 자궁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있었지만 정신은 딴 데 가 있었다.”(『런던 스케치』 중 ‘자궁병동’, 81쪽)
하루 빨리 퇴원을 고대하던 나는 희한하게도 점점 병원에 적응했다. 병원에 적응이 된 결정적 계기는 밥이었다. 금식기간이 지나 조금씩 먹고 마실 수 있게 되면서 편함을 맛보았다. 집에 챙길 가족이 없으니 ‘자궁병동’의 저 여자들처럼 식구들 밥걱정을 할 일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에 백합을 꽃은 여자가 커피 줄까요, 차 줄까요 라고 묻는다. 병원에서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 전에 간호사가 내 피를 뽑으러 들르는 일은 영 귀찮기 짝이 없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는 나에게 프랑스식 아침식사는 부실했지만 남이 차려주는 식사는 그저 차 한 잔도 맛있었다. 12시가 넘으면 점심이 도착하고 6시가 넘으면 저녁식사가 차려진다.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 끼니마다 흰살 생선, 닭가슴살, 계란 오믈렛, 스테이크가 나왔다. 날마다 단백질과 당분이 몸에 쌓이며 상처받은 몸에 새로운 조직을 왕성히 만들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죽도록 아플 때는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츰 그 감사한 기억은 흐릿해진다. 나는 낯 모르는 사람부터 가까운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어려운 순간을 지나왔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에게 신세지는 것에 대해 너무 결벽증적으로 어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리를 두면서도 때로 우리는 침투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맺고 산다. 내가 신세를 질 수도 있고 나에게 신세 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성격인지, 남에게 신세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좀 강한 편이다. 나는 이를 조금씩 흐트려뜨리려 애쓴다. 영원히 젊지 않으며, 영원히 건강하지도 않다. 인간에게 환멸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극적인 순간 나를 구출하는 존재도 인간이다.
입에서 항문까지 연결되어 있듯이, 사회구성원들은 그렇게 연결된다. 몸의 기능이 재구성 되듯이 관계도 끊임없이 재구성 된다. 영원한 동지도 없지만 영원한 적도 없을 것이다. 곡식을 먹는 벌레, 벌레를 먹는 닭, 닭을 먹는 인간, 죽은 인간에게서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사과나무처럼 서로가 서로를 소화시키며 산다.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