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vs 매켄로> 나를 이기고 나와 화해하다
<보리 vs 매켄로>에는 이들의 게임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시점이 특징적으로 등장한다. 신의 시점으로 경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글ㆍ사진 허남웅(영화평론가)
2018.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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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리 VS 메켄로>의 한 장면

 

 

스포츠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선수의 실력이 있을 테고, 그날의 컨디션 여하도 중요하고, 코치진의 지도 능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결정적인 건 ‘겟 럭키’ 운이 따라야 한다. 운이라는 것은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어서 승부는 결국 신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종종 최고를 넘어, 절대적인 경지에 다가선 선수들을 ‘신’으로 수식하고는 한다. ‘축구의 신’ 메시,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 ‘수영의 신’ 마이클 펠프스, ‘복싱의 신’ 무하마드 알리,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의 신’ 숀 화이트, ‘피겨의 신’ 김연아 등등. 테니스에도 신적인 선수가 있다. 먼저 떠올릴 선수는 로저 페더러일 테지만, 그 전에는 비외른 보리가 있었다.

 

<보리 vs 매켄로>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빅매치 중 하나로 꼽히는 1980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의 결승전을 배경으로 보리와 매켄로가 어떻게 상대방을 이기려고 준비하는지의 과정까지 살핀다. 이미 윔블던 4연패를 달성하고 세계 최초의 5연패를 바라보는 스웨덴 출신의 보리(스베라르 구드나손), 에 맞선 미국의 존 매켄로(샤이야 라보프)는 프로 데뷔 2년 만에 세계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기 직전인 상황이다. 결승전 세트 스코어는 2:2. 윔블던 결승전의 승부를 관장하는 신은 누구에게 승리의 서비스를 날릴 것인가.

 

이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미 38년 전에 승부가 결정된 경기인 까닭이다. 그러니, <보리 vs 매켄로>가 다루는 핵심 주제는 승패의 결과라기보다 패하지 않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이들이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에 있다. 보리 vs 보리, 매켄로 vs 매켄로. 영화는 이들 각자의 성장 과정과 현재를, 보리와 매켄로의 경우를 수를 놓듯 교차하며 하나의 천으로 직조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둘을 엮은 하나인 셈이다.

 

보리와 매켄로는 겉으로는 닮은 게 하나 없어 보인다. 늘 같은 숙소의, 같은 층의, 같은 방에 묵을 정도로 엄격한 보리와 다르게 방 안에서 큰 음악을 틀어놓고 동료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매켄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것처럼 보인다. 경기 스타일도 매켄로가 네트 앞으로 나가는 공격형이라면 보리는 베이스라인을 지키며 상대방의 빈틈을 노려 결정타를 날리는 방식으로 승수를 챙겼다. 늘 신중하고 표정 변화가 없는 보리를 일러 사람들은 ‘미스터 아이스’로, 판정에 불만이 많고 심판과 관중을 향해 F 워드도 서슴지 않는 매켄로는 ‘코트의 악동’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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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리 VS 메켄로>의 한 장면

 

 

<보리 vs 매켄로>는 두 선수의 전형적인 면모에 가린 이면에 더 집중한다. 스포츠 영화에서 ‘이면’은 일종의 클리셰다. 경기 결과가 이미 세상에 공표된 상황에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접근은 경기를 전후한 상황에서 위대한 선수들의 경기 외적인 면모, 그러니까 심적으로 불안해하고 흔들리고 힘들어하는 약한 모습이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면도 인간적인 면모와 직결하지만, 드러내는 방식이 눈을 붙들어 맨다.

 

두 사람에게 있어 서로는 각자의 안이자 밖이다. 한 사람에게는 숨기고 싶은 자아, 또 한 사람에게는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의 정체다. 보리는 윔블던 5연패를 앞두고 다른 대화와 다르게 긴장이 최고조다. 5연패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존 매켄로라는 신성의 도전까지 이중으로 조여오는 상태다. 보리는 재능이 꽃피우도록 혹독한 거름이 되어준 코치와 함께했던 10년 세월이 무색하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로 관계를 파탄 직전까지 이끌어 위기를 자초한다. 그는 지금 ‘아이스’가 아니라 제어하기 힘든 ‘산불’의 상태다. 

 

오히려 결승전에서 1세트를 보리에게 내준 후 2세트를 가져온 매켄로가 이후의 세트에 임하는 자세가 더 냉정하고 침착하다. 심판에 대한 불만을 욕이 아닌 한 번의 눈 흘김으로 대신한 매켄로는 무작정 네트 앞에 붙어 공격하는 것을 줄이고 자신의 베이스라인을 지키며 보리의 빈 틈을 파고든다. 패색이 짙던 4세트를 매켄로가 극적으로 가져오면서 세트 스코어는 2:2. 이제 경기 스타일이나 5세트에 임하는 자세나 누가 보리이고, 매켄로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누가 이기든 역사에 남을 경기는 예약해둔 상태다. 승패의 운명은 신의 결정만이 남은 상태다.

 

<보리 vs 매켄로>에는 이들의 게임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시점이 특징적으로 등장한다. 신의 시점으로 경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 선수의 베이스라인을 스크린 좌우로 두고 공이 왔다 갔다 하는 광경이 서로에게 공격한다기보다 상대방에 합을 맞춰 움직이는 까닭에 비춘다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거울 이미지. 보리의 냉정함은 내면의 뜨거운 화를 숨긴 상태고 매켄로의 선을 넘은 열정에는 롤모델로 삼은 보리의 경지에 다가서려는 목표 의식이 내재하여 있다.

 

보리를 소개하는 이 영화의 초반부에는 보리가 높은 층의 윔블던 숙소 베란다 난간에 몸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보는 시선이 등장한다. 5연패를 바라보는, 통산 64개의 단식 타이틀과 11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갖게 되는 보리는 테니스의 신이다. 신이 되고자 그는 엄격함과 냉정함과 차가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견디고 끝내 이겨내며 가장 높은 자리를 사수했다.

 

1980년 윔블던 대회 결승이 끝난 후 귀국하는 공항에서 보리는 2층 난간에 서 있는 매켄로를 발견한다. 아직 가장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곧 테니스 신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될 매켄로의 운명을 알아본 보리는 매켄로에게 다가가 작별 인사와 함께 포옹을 나눈다. 작별은 보리가 매켄로에게 신의 자리를 넘기는 인수인계(?)의 절차이면서 서로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나가 되는 화해의 의미이기도 하다. 윔블던 5연패를 달성한 보리는 26세의 한창나이에 테니스 은퇴를 선언하며 새로운 인생의 경기에 나섰고 매켄로는 다음 해 윔블던을 제패하며 매켄로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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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