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ochere-na.com
집안 살림 중 머그컵만큼 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아이템도 없다. 요즘과 같은 계절에는 냉침한 차나 시원한 음료를 즐기는 잔이 이에 해당하겠다. 사실, 컵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적합한 물건이 아니다. 그보다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취향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일상적이며 만족도가 높은 아이템에 가깝다. 여기서 우린 누가 보지 않는 상황에서의 선택과 향유가 진짜라는 것을 명심하자. 여행을 가거나 괜찮아 보이는 숍에 들렸을 때 컵을 만나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곤 한다. 술이나 커피나 차에 대한 관심과 상관없이 잘 관리된 완벽한 한 잔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순간에도 운치를 더해줄 별빛과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TV를 볼 때도 구비된 컵이나 잔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예전 <프렌즈>의 친구들이 커피나 시리얼을 담아먹던 커다란 만능 머그잔이 그랬고, 여성 코미디의 시대를 알린 <30Rock>을 볼 때도 내 관심은 티나 페이의 각본이나, 트레이시 모건과 주다 프리드랜더의 캐릭터, 알렉 볼드윈의 능청맞은 연기보다도 그가 분한 잭 도나기의 집무실에 놓인 크리스털 잔에 머물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홈바로 걸어가 능숙하게 위스키 한 잔을 꺼내 마시며 예의상 권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상황은 웃기게 돌아가고 있지만 뭔가 제대로 된 신사의 느낌을 잃지 않는 아이러니가 흥미로웠다. 이런 맥락의 뒤틀림과 불협화음에서 코미디가 싹트는 게 아닌가 싶다.
관련해 예전에 종영한 예능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꽃놀이패> 21회에서 조세호 등이 서장훈 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재력에 비해 소박하고 깔끔한 삶의 공간이나 결벽증에 가까운 접객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가 손님들에게 내온 컵이었다. 목 좀 추기자며 콜라와 함께 찬장을 뒤져서 내놓은 잔은 <판타스틱 듀오> 프로모션용 머그컵이었다. 한 손엔 콜라, 한 손에는 머그컵인데 심지어 판촉물이다. 스스로도 멋쩍었는지 혼자 사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집이라 컵 세트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해명과 함께 목이 탔던지 페트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콜라를 들이켰다. 그 프로그램은 썩 재미가 없었지만 이 장면은 꽤 인상 깊었다. 세상의 법칙은 깨고 비트는 데서 진보의 씨앗이 싹튼다지만 머그에 콜라를 담는다는 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컵을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은 사실 정답이 없는 난제다. 컵의 세계처럼 선택의 여지가 방대하고 취향에 대한 민속지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아이템도 드물기 때문이다. 무민이나 키티 같은 캐릭터 상품을 고르든, 제대로 된 백자나 세라믹 도기를 쓰든 상관없지만, 컵은 어디까지나 일상의 물건이란 점 정도로 가이드를 하고 싶다. 혹자들은 집안 살림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려 애쓰곤 하는데 이건 자신의 꿈을 자식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타이거맘과 같은 행동이다.
scandinaviandesigncenter.com
자신의 취향을 전시하며 사는 삶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너무 비싼 물건을 고를 필요도, 아무도 모르는 공방의 특이한 제품을 써야 일상이 더욱 윤택해지고 특별해지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저 물 한 잔 마시더라도 언제나 변함없는 위안과 안정을 줄 수 있는지와 같은 일상성에 있다. 그러니 실용성이 너무 떨어지는 전위적인 제품이나 깨먹었을 때 심적 타격이 깊을 고가의 물건을 굳이 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마시지 말고 머그와 유리잔 정도는 꼭 갖추고 계절과 음료의 성질에 따라 매치하며 살길 권고한다.
컵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은 묵직한 그립감과 질리지 않는 디자인, 그리고 튀지 않는 은은한 색상이다. 들었을 때 보온에 대한 믿음을 주는 묵직함이 느껴지고,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각도로 닿는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머그를 선호한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면서 여간해선 질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아무런 특징적 디자인이나 무늬가 없는 이딸라의 띠마 시리즈와 아라비아핀란드 24h 시리즈의 세라믹 도기를 주로 쓴다. 가장 선호하는 사이즈는 350~400ml 정도다. 시리얼을 먹을 때나 프렌치프레스로 커피를 내렸을 땐 호가나스의 500ml짜리 머그컵을 꺼내 쓴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일본에도 아리따 등 좋은 제품들이 많지만 머그란 자고로 안락함이 생명이라고 믿기 때문에 익숙한 선택 사이에서 늘 맴돈다.
요즘 같이 시원한 음료를 주로 찾게 되는 계절에는 아무래도 머그보다 유리잔을 많이 쓴다. 달고 시원한 여름 음료는 홀짝이며 마시기엔 지나치게 매혹적이고, 요로결석 때문에라도 기본적으로 큰 사이즈의 롱드링크 잔이나 파인트 잔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콜라처럼 애용하는 음료는 주로 고블렛 잔에 마신다. 사실, 뜨거운 음료나 에이드 같은 여름 특선 음료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고블렛 잔을 쓴다. 고풍스런 전통과 현대적인 실용성이 가미된 형태는 편안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인체공학적인 그립과 묵직함은 언제나 음료를 마시는 행위에 특별한 기분을 더해준다. 물부터 콜라와 와인과 맥주까지 거의 대부분의 음료에 최적화 되어 있는 만능 도화지인데다 형태 자체에 기품과 역사가 깃들어 있어서 선호한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고블렛 잔에 마시면 일반적인 원통형 잔에 비해 향을 풍부하게 담아줄 것이란 믿음도 있다. 이런 게 미학의 아우라가 아닐까 싶긴 한데, 실제로 많은 맥주 전문가들이 에일을 마실 땐 고블렛을 추천한다. 크래프트 맥주 붐 속에 파인트 잔이 맥주의 짝꿍이 되었지만 실은 쌓아 보관하기와 설거지에 용이한 까닭에 업소에서 애정을 받는 것뿐 맥주와 파인트 잔 사이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는 없다.
고블렛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유리 공예회사 라로쉐La Rochere의 아르투아 라인을 주로 쓰고 에이드 같은 여름 음료는 마찬가지로 라로쉐 웨상 시리즈의 머그와 롱드링크 잔으로 즐기곤 한다. 역시나 묵직하고 두툼하다. 웨상 머그는 뜨거운 커피 마시는 용도로 나온 제품이라 따뜻한 음료에도 제법 어울린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머그든 유리잔이든 음료를 마실 땐 반드시 컵받침을 받친다는 거다. 코스터의 사용은 일상을 가꾸는 습관이자 문화로 들이도록 하자. 테이블의 컵 자국처럼 주인의 나태함을 상징하는 낙인도 없다. 종이, 나무, 면, 니트, 돌 등등 다양한 소재의 코스터를 시중에서 구할 수 있지만 가장 선호하는 건 무인양품이나 이케아에서도 구매 가능한 코르크 소재의 원형 코스터와 그라프 란츠graf lantz에서 독일산 메리노울 펠트로 만든 비어매트다.
김교석(칼럼니스트)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