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인우의 우산 안으로 한 여자가 불쑥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여자의 등장처럼 난데없는 감정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모두 정지 화면처럼 느껴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문은 막히는데 애꿎은 딸꾹질만 나온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 여자가 선 방향으로 우산을 조금 더 기우는 것 말고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한다. 여자를 태운 버스가 떠나고 혼자 남은 인우는 난데없이 찾아온 감정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질문한다. 어쩌면 이 묘한 떨림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비도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에 며칠이고 가 여자를 찾는 자신을 발견한 이후다. 다시 만나려면 대화를 해야 했다는 건 그제야 깨닫는다. 스무 살 인우가 첫사랑 태희를 만난 한여름이다.
왈츠를 추며 사랑을 시작하다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는 2000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했다. 가슴 아프게 첫사랑을 떠나보낸 인우라는 인물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현재의 인우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이다. 이제 막 새로운 학기를 시작한 봄이고, 2학년 5반 담임을 맡았다. 과거의 인우는 스무 살 국문학과에 입학한 신입생이다. 비 오는 여름 우연히 만난 태희에게 마음이 빼앗겼다. 2주 동안 이름도 학교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 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매일 똑같이, 고개를 흔들며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느라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친구들은 그런 인우를 보고 훈수를 둔다.
한창 친구들에게 타박을 받는 인우가 얼떨결에 태희를 찾는다. 같은 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전공 수업을 매일 빼먹어 가며 태희가 수업을 듣는 강의실에 출석한다. 미술 실기, 왈츠 등 강의실에서 태희만 바라본다. 처음엔 그런 인우를 모른 척하던 태희가 인우에게 말을 건네고 함께 왈츠를 추자고 제안한다.
태희는 우산을 씌워준 것도, 자신을 따라 전공도 아닌 강의 시간에 매일 따라온 것도 알고 있었다. 왜 모른 척했느냐는 인우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봐 두려웠다”고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였다. 인우가 군대에 가고, 태희가 사라진다.
다시 돌아온 첫사랑을 만나다
과거와 현재는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음악과 함께 자연스럽게 시간을 넘나드는 연출 덕분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어색하지 않다. 배우들 역시 과거와 현재를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연기한다. 과거의 인우는 미숙하고, 직설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순수하다. 같은 과 친구들에게는 조금 걱정되는 친구이기도 하다. 현재의 인우는 학생의 편에서 생각하려고 하는 정의로운 교사이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현재의 인우는 겨우 그리움을 누르고 산다. 그런데 현빈이라는 학생을 볼 때마다 태희가 떠오른다. 현빈의 휴대전화 벨 소리는 인우와 태희가 함께 춤을 추었던 왈츠곡이다. 현빈은 태희가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집을 때 새끼손가락을 위로 올린다. 인우에게 태희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한다. 손이 차가워 마음이 따뜻하다고 이야기한다. 태희의 얼굴이 그려진 라이터를 우연히 고물상에서 발견한다. 태희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어떤 정보로 구축되는 인물이 아니다. 분위기나 행동으로만 인물을 그리기 때문에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모두의 첫 사랑처럼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인우가 운명이라고 느끼는 게 극을 이끄는 데 덜 어색했을지도 모른다. 인우는 어느 순간 현빈의 얼굴에서 태희의 얼굴을 겹쳐 보기도 한다.
인우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던지고 사랑을 택한다. 아내와 직업, 과거부터 현재까지 함께한 친구들보다는 과거 태희에게 했던 약속을 지킨다. 현빈 역시 고등학교 2학년, 농구를 좋아하는 학생 임현빈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느껴지는 사랑을 선택한다. 첫사랑이 떠난 시점에 태어난 사람에게 첫사랑할 때의 감정을 느끼고, 그때의 약속을 지킨다.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게 만든다.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는 여름이 한창인 8월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이수연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재미를 찾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