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의 한 장면
(* 결말과 관련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 르 카레의 첩보소설을 좋아한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를 비롯해 『원티드 맨』, 『영원한 친구』 , 『리틀 드러머 걸』 등 이념의 공기가 서리처럼 내려앉은 분위기 하며 그 속에서 무표정으로 정체와 목적을 숨기지만, 짙은 피곤함까지 감출 수 없는 첩보원의 애환은 공작의 세계가 우리와 무관한 듯해도 실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인정하게 했다. 하물며 남북 분단의 상황을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 존 르 카레의 작품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윤종빈 감독이 연출한 <공작>의 영문 제목은 ‘The Spy Gone North’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를 염두에 둔 제목은 존 르 카레의 소설 속 세계와 한반도의 냉전 역사가 그리 다르지 않은 지반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는 듯하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와야 하는 스파이’가 아니라‘추운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는 설정이 다를 뿐.
때는 1993년,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안기부에서는 정보사 소령 출신 박석영(황정민)을 주목한다. 박석영에게 주어진 임무는 북핵의 실체를 캐기 위해 북한 내부로 잠입하라는 것. 암호명 ‘흑금성’으로 활동하게 된 박석영은 무역 사업가로 위장하여 중국에서 베이징 주재 북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과 자리를 함께한다. 달러 유입 줄이 막힌 리명운은 남측의 박석영에게 어떻게 하면 북측을 위해 돈을 마련해줄 수 있을지 의중을 떠보고 박석영은 어떻게 하면 북측의 리명운에게 믿음을 줄지 노심초사한다.
접점을 마련한 건 TV 광고다. 남측의 대기업이 북한을 배경으로 하는 광고를 제작할 경우, 북측이 얻게 될 이득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박석영은 마침내 ‘추운 북쪽 나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이를 빌미로 북한의 핵시설 실체를 파악하는 박석영은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으로 부터 전혀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는다. 대선을 앞두고 여당의 이회창 후보가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뒤지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모종의 음모가 담긴 편지를 북한에 전달하라는 것.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자세로 첩보 활동을 하던 박석영은 혼란을 느낀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공작>이 처음 공개된 건 지난 5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영화제의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서였다. 당시는 남북이 그동안의 냉전과 핵 위협에서 벗어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하며 화해 무드가 한창인 상황이었다. 북한에 홀로 잠입한 남한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공작>은 자칫 시대착오적으로 비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에 관한 우려는 개봉(8월 8일 예정)을 앞둔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영화를 보니 오히려 현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는 보완적 텍스트라는 인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는 지난 2005년 최초의 남북한 합작 광고에 등장했던 이효리와 북한의 무용수 조명애가 만나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이유가 있다. <공작>이 모티브로 삼은 일명 ‘흑금성 사건’은 1997년 12월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했던 북풍 공작 사건이다. 박석영의 실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박채서는 안기부의 지시로 광고 회사에 위장 취업한 뒤 대북사업을 명목으로 공작을 벌였다. 그러면서 이효리와 조명애가 함께한 광고가 성사됐는데 <공작>은 그 과정, 아니 막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라간다.
알고 보니, 극 중 박석영은 한반도 정세를 게임판처럼 바라보는 지배 계급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굴렸던 졸(卒)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공작>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박석영에게 정체성 혼란이면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하는 삶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박석영이 정체를 숨기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절체절명의 선택을 감행한 건 그 자신의 첩보 활동이 핵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리명운이 쉽게 믿음을 주기 힘든 박석영을 파트너로 삼아 자금을 확보하려 한 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의 형편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절실한 심정에서였다.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고 체제로 정체성을 구별하는 박석영과 리명운은 게임판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위치에 서 있지만, 국가와 체제의 밝은 미래를 위한 선택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에 대해 윤종빈 감독은 지난 칸영화제 당시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스파이의 정체성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동지였고, 동지였던 사람이 적이 되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는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동지이고 동지였던 사람이 적이 되는’ 상황 속에서 화해를 향한 시간 속을 지나가고 있다.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만 같았던 종전과 한반도의 평화는 그동안 대립과 불인과 준(準) 전쟁상황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방해 ‘공작’ 속에서 지지부진해 보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공작>에서 우여곡절 끝에 두터운 신의를 쌓은 박석영과 리명운은 지배 계급의 또 다른 노림수로 반목하는 사이가 된다. 그 후에 성사된 남북 합작 광고. 이효리와 조명애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작은 통일을 이룬 한쪽에서 박석영과 리명운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 그리고 서로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순간, 그 손을 맞잡기 전에 영화는 가차 없이 암전 화면으로 끝을 맺는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를 읽으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운명이 걸린 극한 상황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재밌게 읽었던 건 동서독의 냉전 시대, 즉 과거형이 배경이었던 까닭이 크다. <공작> 또한, 1993년부터 2005년까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때 이후 다시 한번 맞이한 남북 화해의 절호의 기회에서 끝내 우리가 바라는 평화의 악수를 할 수 있을지 숨 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총성은 울리지 않아도 그에 버금가는 긴장감 속에서 (윤종빈은 액션 대신 말로 긴장감을 자아내는 <공작>을 일러 “구강 액션”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를 맞이하게 될까, 과거로의 회귀일까, 미래로의 진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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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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