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 "꼭 잊지 말아야 하며 사랑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의 도리, 같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또 살아가고 안전을 바라며, 사랑을 합니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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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희

 

 

소설집을 여는 작품인 「유리 주의」에서부터 다양한 과거와 사정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중국의 어느 휴양지로 패키지여행을 온 일행은 괴생명체가 산다는 호수나 “유리창의 일부나 다름없”이 유리창에 매달려 유리를 닦는 청소부들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따로 여행을 왔다가 눈이 맞아 오로지 육체관계에만 몰두하는 커플, 오래전 계획한 환갑 기념 여행을 와서도 자신들의 속사정에 따라 행동하는 여고 동창 삼인방,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는 신혼부부, 불륜관계이면서도 부부를 연기하는 커플 등은 모두 각자의 욕구나 잇속을 챙기기에 바쁘다. 소설은 한 호텔에 묵는 이들의 동상이몽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패키지여행의 일원이 된 듯한 생생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마냥 웃을 수만 없는 것은 투명한 유리창을 없는 것으로 착각해 끊임없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죽는 새들을 보고도, 혹은 눈앞에서 유리창을 닦는 청소부들을 보고도 자신들의 행각을 투명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채 파국으로 치닫는 이들의 모습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첫 소설집 『발치카 No. 9』 을 출간한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두번째 소설집  『유빙의 숲』 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된 소감이 궁금합니다.

 

첫번째 책을 내고는 아주 독한 흑맥주를 늘 곁에 두고 지내는 기분이었습니다. 발트해 연안에서 나오는 물로 만드는 맥주라 하여 ‘발치카’ 혹은 ‘발티카’라고 부릅니다. 가장 독한 도수를 말하는 번호가 9번인데, 그 이후로 9라는 숫자에 늘 마음을 두곤 했습니다. 출간 이후 4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실감나지 않게 지냈는데, 두번째 책을 내자마자 수많은 기사들에서 “4년 만에”라는 날짜를 짚어주시더군요. 그랬구나, 그런 시간들이 그만큼 흘러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소설 속 시간의 질감이 현실과는 많이 다른 것임을 체감했달까요. 새 책의 표지를 쓰다듬어주신 분들이 “표지 너무 예쁘다” “근데 이거 고래니 가물치니?”라고 물어보실 때마다 울고 웃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어라고 말을 해도 자꾸 고래와 가물치,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무엇들이 다가옵니다. 정정해줄 힘이 없어질 때까지 상어, 라고 말해보려고요! 홀로 헤엄치는 상어 위로 비치는 햇빛이 어쩐지 그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는 것 같아서 책을 볼 때마다 자꾸 물속으로 투과되는 노란빛을 쳐다보게 됩니다. 잘 익은 귤빛 같기도 해서 상어가 그것을 보고 더 멋지게 바다를 유영하기를 바라는 중입니다.


『유빙의 숲』 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유빙’은 말 그대로 떠다니는 얼음 조각 혹은 얼음의 덩어리입니다. 바다에 떠 있는 유빙을 맛 본 적이 있어요(일본에서 판다는 유빙 맥주를 마신 것은 아니고요, 진짜 유빙!). 짜지도, 밍밍하지도 않은 그 맛을 아직도 저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유빙의 맛이라고만 여깁니다. 그런데 그 사이를 북극곰과 펭귄들, 쇄빙선, 고래와 상어 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돌아온 뒤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이 헤집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제목이 표제가 될 줄 몰랐지만, 제목을 지을 때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단번에 짓고 더 숙고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이번 소설집은 사람이 살아가고 사랑하는 이야기, 그 사람을 잃고 남은 사람들이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 어떻게든 도망가봤지만 결국 파도 위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채로 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타깝게 죽은 이들이 죽은 자가 간다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삼백 살 먹은 상어가 기꺼이 그 길을 이끌어주기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부터 죽음 이후의 일들에 시선을 두곤 했습니다. 죽는 것이 과연 끝나는 것인가 자문할 때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때는 분명히 저의 힘만은 아닌 어떤 것이 도와주었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판단과 해석은 독자분들의 몫이겠지만, 꼭 이만큼이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저의 소설인 것 같네요.


대한민국에서 지난 4년의 세월을 살아낸 사람이라면 분명 가지고 있을 상처를 이 소설집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4년 전의 그 사건 이후 글을 쓸 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학교가 위치한 바로 옆 동네의 학교에서, 저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과 동갑인 학생들과 함께 소설을 읽고 쓰고 있었습니다. 새벽까지 마감을 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뉴스를 챙겨 볼 새도 없이 학교로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고 그제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습니다. 학생들도 말을 잃었고 저도 무어라 할말이 없어서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지척에 있던 탓에 여러 관계로 얽힌 학생들이 차례대로 장례식장에 다녀올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들을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어요. 그때 위에서 검은색 옷 혹은 상복으로 보일 수 있는 옷들을 입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왔고, 그것이 제게까지 하달되었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던 날도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조차도 음악을 틀지 않고 전 국민이 애도하고 있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상황인가 하며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그 이후에 일어난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생각하면…… 제가 쓰는 몇 줄의 글이 혹시 그분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문장으로나마 어떤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주고 싶었어요. 이럴 때마다 제가 조금 더 나은 문장력, 촘촘한 구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뒤로 저는 안타깝게 죽어간 분들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고, 한 번이라도 더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하라고 이야기하고, ‘안녕’ 혹은 ‘안부’를 버릇처럼 묻습니다. 의식적으로라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꼭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을 신념처럼 새겨두었어요. 의도적으로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소설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직도 저는 그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매번 예쁘거나 다정할 수가 없는 것이 또 사람의 일이어서 이런저런 일들로 복닥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고, 앞날의 안녕을 진심을 다해 기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의 도리, 같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또 살아가고 안전을 바라며, 사랑을 합니다.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과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제게는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소설로라도 누군가를 기리고, 소설을 읽는 이들의 눈을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해주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일까요.


‘도주’ 연작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세 편의 연작 이후의 이야기도 혹시 생각해보셨나요?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 위조지폐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돌아가셨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의 묘소는 현충원에, 할머니의 묘소는 저희 집안 선산에 있습니다. 선산이라고 해봤자 남의 집안의 묘소 한 귀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묘지입니다. 인심 좋은 어느 동네의 어른께서 증조할머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주셔서 제 성씨가 ‘이씨’가 되었습니다. 그전의 성씨를 아직 몰라요, 저는. 가끔 제가 마음에 드는 성씨를 제 이름 앞에 붙여보곤 합니다. 전, 정, 윤 혹은 제갈, 남궁, 동 혹은 견, 육 같은 성을 제 이름 앞에 두고 이름을 불러봅니다. 때때로 소설 속의 새로운 인물들이 그렇게 생겨나곤 했습니다. ‘도주’ 연작은 증조할머니가 아기였던 할아버지를 업고 황망하게 뛰어오던 밤길을 생각하면서 쓴 소설입니다. 물론 제가 쓴 소설은 그보다 조금 더 이전의 역사를 짚었지만,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편소설의 초고를 쓰고 있는데, 첫 소설집의 연작과 두번째 소설집의 연작소설이 만나버렸어요. 물이 메마른 세계에서 위조지폐가 할 수 있는 일에 관해서 쓰고 있습니다(더 말씀드리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이만 하겠습니다). 처음의 의도보다 더 방대한 이야기가 되어서, 지금 그 이야기를 따라서 쓰고는 있는데, 어떻게 맺음할지 아직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것에 관한 장편을 쓰고 있습니다. 아주 천천히. 이 긴 글이 독자분들에게 다가갈 즈음에는 제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저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면, 믿어주실래요.


「커피 다비드」를 읽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어떤 식으로든 삶은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이 단편을 소설집 가장 마지막에 수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바닷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바다와 물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사주에도 ‘물 수(水)’가 많대요. 물과 궁합이 잘 맞는 것들에 대해서 유독 마음이 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섬의 변화와 해변의 모양이 바뀌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취미로 로스팅을 한 지도 근 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사람을 잘 잡는 선무당처럼 ‘로스팅 신동’이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변 사람들도 제게 원두를 많이 얻어먹곤 하기 때문에 제 앞에서는 맛있다고 칭찬하고 뒤로는 “이번에는 탔더라” “저번 것이 더 나았는데!”라는 말들을 하고 다닙니다. 돈을 받지 않고 그저 나누어주기만 할 뿐이라 저는 그런 말들이 들려와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제 마음대로 볶고 숙성시켜서 내려줍니다. 꼭 공짜로 받아간 사람들이 더 말이 많지요. 그래도 원두가 아쉬우면 또 나를 찾겠지, 하는 심정이기도 해서 콧대가 예전보다 조금 더 올라갔어요. 한 가지 일을 오래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숙련’이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다보니 미움과 살의, 후회와 사랑이라는 말이 모두 한 덩어리처럼 느껴집니다. 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커피 한잔 내려주는 일이 제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일일이 모두를 찾아가서 커피를 내려드릴 수 없어 소설에 ‘다비드’를 초청했습니다. 이탈리아로 배낭여행을 갔던 대학생 때 피렌체의 다비드상이 제게 준 충격이 소환된 소설입니다. 역시 조각도, 아니 조각이야말로 잘 생겨야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따라오는 것은 작가로서의 욕심일까요 인간 이은선의 흑심일까요. 커피가 꼭 맛이 아니라 로스팅, 결점두를 고르는 핸드 픽, 숙성, 그라인딩, 핸드 드립을 거쳐 나오는 하나의 긴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한 잔의 커피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서는 당장 내일, 다음에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커피 한잔 같지 마시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해졌습니다. 이 사람들과 커피 한잔이 말이에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나의 두번째 분나 마프라트다”라고 했는데요, 이것에 비유한 이유가 있나요?

 

에티오피아에는 오래된 커피 의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커피를 ‘분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그것을 손님 앞에서 직접 볶고 갈고 끓여서 대접하는 의식을 ‘분나 마프라트’라고 부릅니다. 맛, 행운, 축복의 이름으로 세 잔을 내려주는데 제게 소설이 어느 순간부터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번째 소설집에는 실제로 「분나」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고요, 이번 소설집에는 「커피 다비드」로 그 마음을 내려보았습니다. 모두에게 소설을 읽는 맛과 그 맛의 축복과 그 모든 이들을 둘러싼 안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제 소설입니다. 비극과 파국을 주로 다뤘다고 읽어주시는데, 제 인물들은 놀랍게도 그 속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습니다. 제가 창조해낸 인물들이지만 실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살고 사랑하고 끝내 살아남는 이야기가 마치 커피의 일생과도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기꺼이 저와 함께, 마셔주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앞으로 꼭 써보고 싶은 소재나 분위기의 소설이 있는지, 언제쯤 만나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은 출판사 담당 편집자님께서 가장 궁금해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실제로 저도 궁금합니다. 저도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단편소설을 써야 해서 호흡이 툭툭 끊겨서 그것을 바로잡는 데 시간을 많이 두었습니다. 핑계 같지만, 어쩐지 문장의 질량과 제 마음가짐이 갈피를 잘 잡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보다 더 오래 소설을 쓰고 계신 분들을 존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단편소설로는 정령들의 달콤 살벌한 로맨스를 써보고 싶다고 말한 지 삼 년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쓰다보면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과, 눈으로 보는 문장과, 프린트된 문장과, 책으로 엮어서 나온 문장들이 다 따로 놀아요. 이 해괴한 미로 찾기 속에서 제가 쓰고 싶은 것을 과녁에 활을 쏘듯이 써낼 때까지 저도 한번 즐겁게 헤매볼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독자분들께서는 당분간만이라도 『유빙의 숲』 에 함께 들어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안전하게요!

 


 

 

유빙의 숲이은선 저 | 문학동네
거기서 기인한 도피생활 등에 처한 다양한 인물들의 고통을 그 극한까지 몰아붙인 뒤, 잔혹한 현실을 어떻게든 통과해 살아낸 그들이야말로 삶에 대한 가장 지극한 애정을 가진 존재들임을 역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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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