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초한지』 를 번역하기까지
『서한연의』는 의외로 플롯이 탄탄하고 읽을거리도 풍부했다. 또한 『동주열국지』나 『삼국지연의』보다 훨씬 단순하고 빠른 전개는 독서의 속도와 몰입도를 매우 강하게 추동했다.
글ㆍ사진 김영문(번역가)
2019.02.21
작게
크게

초한지_박스입체.jpg

 


나는 2015년 5월 18일 『동주열국지』 (글항아리) 완역본을 출간했다. 김구용이 1964년에 처음으로  『동주열국지』  완역본을 낸 이래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출간 이후 독자들의 과분한 사랑과 채찍질에 힘입어 한문 고전 소설에 대한 더 폭넓은 번역 소개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동주열국지』  다음은 진(秦)나라와 초한(楚漢) 쟁패 시대이므로 나의 시선은 자연히  『초한지(楚漢志)』  원본인 『서한연의(西漢演義)』로 향했다. 하지만 지난날 이문열의 『초한지』 서문에서 『서한연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읽은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후 한동안 초한 쟁패를 소재로 삼은 다른 연의소설이 있는지 꼼꼼하게 조사해봤지만 끝내 그런 소설은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각급 도서관에 소장된 『초한연의(楚漢演義)』나 『초한전(楚漢傳)』과 같은 한문소설은 거의 예외 없이 『서한연의』의 축약본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도 『서한연의』 외에 별도로 『초한연의』라는 이름의 소설이 간행된 적은 없다. 적어도 소설의 시대라 불리는 명청 시대까지도 그러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한연의』 원전을 구입하여 정독하기 시작했다. 진시황의 부친인 이인(異人)과 여불위(呂不韋)의 만남을 글머리로 삼은 『서한연의』는 이문열의 폄하와는 달리 갈수록 나를 책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서한연의』는 의외로 플롯이 탄탄하고 읽을거리도 풍부했다. 또한  『동주열국지』『삼국지연의』 보다 훨씬 단순하고 빠른 전개는 독서의 속도와 몰입도를 매우 강하게 추동했다. 초한 두 나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 라인이 너무나 명쾌하여 더러 사건 전개가 거칠고 묘사가 중복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소설 전체 구조로 보면 그렇게 심한 흠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문열이 가장 심하게 비판한 ‘구리산(九里山) 십면매복(十面埋伏)’ 장면도 소설 전체 구조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소설 장치였으며, 그 장면이 있음으로써 해하(垓下)로 몰린 항우의 마지막 사투, 우미인과의 애절한 이별 등이 더 비장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다만 항우가 죽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의 이야기가 다소 길게 부연된 감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그 뒷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몇 달에 걸쳐 『서한연의』를 정독하고 나서 이 소설이 원본  『초한지』 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느끼고 『서한연의』 및 기존  『초한지』  계열 우리말 번역본 검토에 들어갔다. 깜짝 놀란 것은 『서한연의』가 17세기에 이미 우리나라에 유입되었고 거의 동시에 언문(한글)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셔한연의』  언해 필사본은 그 필체도 유려할 뿐 아니라 번역 문체도 고아(古雅)하고 순통(順通)하다. 아쉬운 것은 연의소설 특성의 하나인 삽입시를 모두 삭제한 점이다. 이 점을 빼면 언해본  『셔한연의』 는 완역본이라 해도 좋을 만한 면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셔한연의』 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출간되던 이 책은 해방 이후에 『통일천하』와  『초한지』 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면서 원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출간된 ‘초한 쟁패 이야기’가 『서한연의』를 원전으로 두고 있음에도 상당수의 번역본들이 원저자의 이름을 숨기거나 원전의 제목조차 밝히지 않았다. 이문열의  『초한지』 는 『서한연의』와 다른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으므로 예외에 속한다. 게다가 지금 유통되고 있는  『초한지』 나 해방 이후 출간된 초한지 계열 소설을 검토해본 결과 『서한연의』의 완역본이라고 내세울 만한 판본이 한 종도 없음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초한지』 가 『동주열국지』 나  『삼국지연의』 와 함께 중국 역사 연의소설를 대표하는 고전이라면 그 원전에 해당하는 『서한연의』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것일까? 심지어 『서한연의』가 17세기에 유입되어 우리의 소설, 민요, 시조, 고사성어 등에 스며들어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상기해보면 더더욱 현재 완역본이 한 종도 없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국지』나  『열국지』 의 완역본이 여러 종 나와서 다양한 재창작 콘텐츠의 기반 노릇을 하는 것에 비하면  『초한지』  원본 『서한연의』는 참으로 황막하고 슬픈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동주열국지』  출간 이후 그 후속작을 소개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서한연의』 번역 작업에 일종의 사명감 비슷한 마음이 보태진 것은 위와 같은 형편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2016년 6월경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에 착수하여 거의 1년이 걸려 작업을 완료했다. 본래 중국 화하출판사(華夏出版社) 판 『동서한연의(東西漢演義)』(1995)를 저본으로 삼아 작업을 하다가 이 판본에 원전의 삽입시가 모두 삭제된 것을 알고, 상해서국(上海書局) 판 『서한연의』(1899)와 검소각(劍嘯閣) 판 『신각검소각비평동서한연의(新刻劍嘯閣批評東西漢演義)』(1985, 영인본)를 어렵사리 구하여 원문을 대조하면서 정확한 완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 기존 『통일천하』나  『초한지』  계열 번역본, 평역본, 번안본과는 다른 이 『서한연의』 완역본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 독자 여러분의 독서에 참고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1) 번역 저본을 명확하게 밝혀서 옮긴이가 번역의 책임을 지고자 했다.
2) 번역 문체는 거의 대조가 가능하도록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살리려고 힘썼다.
3) 조선시대 언해본에서 삭제한 원전의 삽입시와 역사논평까지 모두 번역하여 『서한연의』 최초 우리말 완역본의 모습을 갖추도록 했다. 따라서 원문 텍스트 번역만 가지고 계산해보면 17세기 조선시대 언해본 이후 거의 350년 만의 완역이며, 삽입시와 역사논평까지 모두 포함한 완역으로 말하자면 이 번역본이 역대 최초의 『서한연의』 완역본이 된다.
4) 『서한연의』 묘사가 정사와 다른 부분에는 상세한 각주를 달아 그 차이를 설명했다.
5) 『서한연의』 원전의 오류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각주를 달아 밝히고자 했다.
6) 인물 이미지, 삽화, 지도, 연표, 고사성어 등의 부록을 넣어 독서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7) 중국문학 전공자로서의 특성을 살려 원전의 백화체 표현의 어감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출간 이후 발견되는 오류에 대해서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고쳐나가며 더 좋은 번역본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 물론 몇 쇄를 찍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책을 선뜻 출간하겠다고 응낙해준 교유서가 신정민 대표, 최연희 실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 생소한 동양 고전 편집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박민영 선생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장정, 디자인, 삽화 등 이 책 모든 부분에 큰 공을 들이신 문학동네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못난 남편을 늘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아내 정애에게 하늘만큼 땅만큼의 사랑을 보낸다.

 

2018년 11월 5일
곤산(崑山) 기슭 수목루(水木樓)에서
옮긴이 김영문

 


 

 

원본 초한지견위 저/김영문 역 | 교유서가
각주에 역사 논평을 옮겨 이해를 돕고, 본문의 묘사가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옮긴이가 각주로 정리해두었다. 또한 원전의 삽화를 되살려 그려 매회 삽입하여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초한지 #초한연의 #우리말 #자연스러운 표현
0의 댓글
Writer Avatar

김영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