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3년 사이 3번 이사를 했다. 첫 번째 이사는 동생의 결혼으로 분가를 한 탓이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기 이웃을 잘못 만난 탓이었다.
첫 번째 이사를 간 아파트는 바퀴벌레투성이였다. 불을 켤 때마다 사사삭 하고 바퀴벌레가 떼를 지어 움직이는 것이 영화 <조의 아파트>에 버금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새벽의 산책자였다. 누군가 새벽마다 복도에서 신음소리를 내거나 혼잣말로 욕설을 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여름 새벽, 너무 더워 복도 쪽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잤다가 누군가 내 방 창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순간에도 바퀴벌레는 떼를 지어 지나갔다) 이 때의 일로 나는 질려버렸다. 이사를 결심한 후 계약기간 2년을 채우자마자 다른 아파트로 도망갔다. 문제는, 그렇게 이사를 간 두 번째 아파트에서도 기이한 일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 아파트는 보일러를 안 틀어도 바닥이 따듯해지는가 하면 가끔 핸드폰 진동 오듯 바닥이 드르륵 드르륵 울었다. 처음엔 희한한 일이 다 있군 하고 넘겼으나, 자다가 전기충격을 받은 후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눌림, 폴터가이스트 현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같은 방향에서 열기와 진동, 전기 충격이 오자 깨달았다. 이건 공포소설의 영역이 아니라 내 주특기인 추리소설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옆집 아저씨, 혹은 아줌마가 밤낮 구별 안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업용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기계를 바닥에 놓고 다뤘기에 기계에서 오는 열이며, 진동이 우리 집 바닥을 통해 있는 그대로 전달되며 가끔 전기충격파까지 온 것이었다.
바로 대응방안을 강구했다. 옆집에 가서 조심해 달라 부탁도 하고, 관리사무소에 민원도 넣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옆집 사람은 민원을 넣을 때만 “네, 네” 하고 잠깐 멈췄다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기계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내심이 동났다. 운동하려고 산 아령을 옆집에서 소음을 낼 때마다 벽에 던졌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옆집 사람의 납품 마감 정신은 나의 원고 마감 정신보다 훨씬 굳건했다. 한 달쯤 소음을 두고 새벽마다 실랑이를 벌이고 나자 내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그건, 강렬한 살의였다.
오래 전 수능 잘 보라는 의미로 친구에게 받은 손도끼를 한손에 불끈 쥐었다. 그대로 옆집 철문을 내리찍으려고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 뭘 하는 짓이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나. 기가 막혀 하며 집에 돌아왔다.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육두문자를 내뱉은 후 주섬주섬 이불을 챙겼다. 엄마 집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렇게 반 년 가까이 엄마 집에서 머물다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다.
최근 『내 감정에도 그림자가 있다』 라는 제목의 책을 읽자니 이때의 일이 떠올랐다. 제목은 요즘 추세에 맞는 에세이 같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무려 칼 융의 분석 심리학을 다룬다. 왜,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원형이니 그림자니 하는 이야기 말이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건 OX퀴즈다. “내 감정의 그림자는 얼마나 클까?”라는 제목 아래 이어지는 56개 문항을 풀고 책에서 지시하는 대로 오각형을 그리면 홀쭉이형, 건장형, 우향형, 좌향형 등 크게 네 가지 성향으로 나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중 우향형(그림자 내향형)에 해당했다. “머리는 가볍고 다리가 무거운 경우”로 “비이성적인 신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므로 적절한 때에 자아가치관을 이루는 맥락을 정리해서 부적절한 신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몇 번이고 이사를 반복할 때 『내 감정에도 그림자가 있다』 를 접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감정을 잘 다스렸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해 버텼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무엇을 아는 것과 그것을 해내는 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그래도 일단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절절한 때에 자아가치관을 정립”하는 건 잊지 않기로 한다. 만에 하나 ‘부적절한 신념’에 사로잡혀 살인이라도 저질렀다가는 말짱 도루묵정도가 아니라 인생 종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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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에도 그림자가 있다쉬하오이 저/리루팅 그림/최정숙 역 | 스핑크스
당신이 ‘감정의 그림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의식의 층위로 끌어올려 반복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조영주(소설가)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