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환자의 시점이 필요한 이유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매일 우울증 환자들을 만난다. 진료실에서 나는 그들을 관찰하고 상담한다. 진료실 문을 나가 그들은 사회로 돌아간다.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다고 호소하던 사람이 직장으로 돌아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있고 (물위에 떠있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아 여유로워 보이는 오리같이), 바로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닫고 칩거 모드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들은 얘기를 토대로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그들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다. 환자의 시점이 필요한 이유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가 20대 여성의 시점에서 우울증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40대 남성의 시점이다. 우울증을 만나 치료를 하고, 결국 떠나가게 되는 1년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김정원의 『오늘 아내에게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가 오늘 소개할 책이다. 여러모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와 대비되는 책이었다.
저자는 현직 기자로 중년 남성이고 아내와 아이가 있다. 진료를 해보면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들이 우울증에 대한 이해도와 감수성이 좋은 편이다. 마음을 성찰하고,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이 좋고, 주변에서 비슷하게 힘들어 하는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다. 더욱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는 과정에서도 상대적으로 수용적인 것 같다. 그에 비해 40대 중년의 전문직 남성은 달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일단 우울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냥 지쳤다고 생각하거나, 분노와 짜증으로 분출해서 가족이나 동료를 괴롭히는 것으로 반응적 해소를 하거나 술과 담배로 일시적 긴장완화의 단기 처방을 하다가 병을 키우기 일쑤다. 더욱이 자신이 우울이나 불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알리는 것은 ‘나는 이제 경쟁에서 아웃입니다’라고 자인하는 것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병원을 다니더라도 조용히 몰래 치료를 받는 일이 훨씬 많다.
그런 면에서 『오늘 아내에게 우울증이라 말했다』 는 더욱 듣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우울증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부터, 병원을 찾아서 가기 시작하는 과정, 아내와 직장의 동료들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치료를 하면서 깨달은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여보 나 우울증이래
우울증이 자리를 잡자, 자신감이 떨어져서 자신이 너무나 보잘것없이 느껴졌고, 몇 초 만에 지하 100층 아래로 내려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탄 것같이 발 밑이 꺼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고 한다.(이렇게 갑자기 꺼져서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울증 환자들이 표현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이렇게 있다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포털 검색을 해서 무작정 직장 근처의 정신건강의학과를 예약해서 주치의와 처음 만났다. 이 과정이 재미있는데, 여성보다는 남성, 가능하면 저자와 비슷한 연령대, 방송에 많이 나오는 유명 의사보다는 나만 관심을 가져줄 것 같은 보통의 의사를 원했다. 이렇게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최대한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는 과정이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의사의 시점이 아닌 전지적 환자 시점에서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 후 실행하는 과정을 관찰 카메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듯이 읽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첫 진료가 끝나고 약을 처방 받아 들고 돌아가는 택시에서 저자는 아내에게 “여보 나 우울증이래”라고 진단받은 사실을 알린다. 집에서 만난 아내는 울고 있었고, 다음날 아내와 저자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결국은 함께 병원을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그리고 난 다음 비로소 안심을 하고 함께 열심히 이 과정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게 된다. 다음은 직장이다. 저자는 우울증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과감히 동료들에게 알렸다. 모두가 걱정을 하고 위로를 하고, 어떤 이는 따로 불러서 “혹시 나 때문은 아닌지?”를 묻기도 한다. 이렇게 물꼬를 한 번 트고 나자 어느새 저자는 동료들의 우울증을 상담하고, 병원을 소개해주는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책 안에는 평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정신과 진료 기록은 평생 남아서 꼬리표가 된다’와 같은 도시 괴담에 대한 해명을 하고, ‘보험 적용,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건강을 챙기는 것, 내가 살고 보는 것’이라는 분명한 판단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언론인인 저자의 정신과 진료와 관련한 팩트 체크가 책 곳곳에서 자상하게 이어지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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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변화는 겁이 없어졌다는 것
성공적으로 치료가 끝나고 마지막 방문을 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가 된다. 치료가 끝나고 성공적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본 아내는 그제서 말한다.
“가장 큰 변화는 겁이 없어졌다는 거야. 눈에 뵈는게 없더라고,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마음의 근육이랄까, 뭔가 좀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해. 혹시나 오빠 우울증이 재발하더라도 처음만큼 놀라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의 마음의 문제더라고. 다시 우울증이 오면 안된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 것 같아. 그냥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훨씬 편해질 것 같더라고. 내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우울증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겠어.”
이만한 위로와 힘이 될 말이 더 있을까. 나는 환자의 가족들로부터 “우리는 뭘 해줘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때 가족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이 안에 다 들어있다. 그냥 그럴 수 있겠다라고 받아들이고, 완벽한 예방이란 것도 없고, 딱 한 가지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회복해 일상의 리듬을 되찾도록 하는 것일 뿐이라고.
『오늘 아내에게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는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 그 가족, 친구 뿐 아니라, 치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까지 모두 한 번 꺼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전지적 환자 시점에서 시간 순서대로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우울증 이야기를 진지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게, 유쾌하지만 경박하지 않게 풀어낸’ 보기 드문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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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내에게 우울증이라고 말했다김정원 저 | 시공사
환자로서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 기자 특유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해, 독자들이 한 걸음 떨어져 우울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