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한 세기를 기다린 걸작과의 조우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지닌 칼날 같은 음표들은 한 세기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의 존재를 단칼에 베어내어 그 단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글ㆍ사진 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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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 초연 장면

 

 

너무 일찍 찾아온 걸작의 귀환


2013년 5월 29일을 기억한다. 늦봄의 해가 유난히 쨍한 날이었다. 샹젤리제 극장 부근은 공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이미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혹시라도 남은 좌석이 있을까 싶어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표를 구하는 팻말을 든 이들이 극장 앞 계단과 걸터앉을 수 있는 모든 곳에 그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정확히 100년 전 1913년 5월 29일, 같은 극장에서 초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기념하기 위한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린스키 발레단,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가 1부에는 복원된 니진스키의 원본 발레를, 2부에는 안무가 사샤 발츠의 <희생>을 선보이는 날이었다. 한 세기 전 우리에게 벼락처럼 쏟아진 <봄의 제전>이 딱 100년을 기다려 관객들과 조우하는 날이었다. 전작 <불새>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던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말 그대로 한 발짝 더 성큼 나아갔다. 이 곡은 너무 일찍 우리에게 다가온 걸작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다행스럽게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꾸준히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다. 초기의 발레음악 <페트루슈카>, 세기의 걸작 <봄의 제전>, <바이올린 협주곡>을 지나 후기작 <아곤>까지, 각기 스타일이 다르고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 『예술이라는 은하에서』   89페이지 <진은숙> 편 중에서


날것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던 피에르 불레즈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이끈 음반을 처음 들었던 순간의 충격을 기억한다. 구석기인들이 남긴 라스코 벽화처럼, 나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이 작품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봄의 제전>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영혼의 결이 같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밀도 높은 대화가 오갔던 순간에도 <봄의 제전>이 우리를 지나갔다.


“가장 좋아하는 음반이 있습니까?”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불레즈 지휘.”


“첫 번째 아날로그 레코딩!”


“1969년! 레코드 표지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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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진스키 버전 공연 장면 1

 

 

무언가에 홀린 듯, 인터뷰이와 내가 한 단어씩 발음하는데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문장이 완성되었다. 공연을 앞두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샹젤리제 극장에서 <봄의 제전>을 연달아 두 번 니진스키와 사샤 발츠의 안무로 만난다고 하자, 부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연장 앞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보낼까 하고 서성이는데 극장 관계자가 나와서 사람들 앞에 섰다. “오늘은 완전히 매진이다. 시청 앞 대형 화면으로 공연이 생중계될 테니 우리와 함께 이 100주년을 기념하며 함께 해달라.” 뒤늦게 합류한 친구 몇 명을 포함해 표를 끝내 구하지 못한 이들은 아쉬움이 묻은 얼굴로 서둘러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파리 시청 앞 대형 화면이라니, 새삼스럽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니진스키, 발레 뤼스를 이끈 디아길레프 모두 러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국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예술성이 하나로 모여 완성된 이 걸작과 발레 뤼스가 만개한 곳이 바로 이곳, 파리였다. 그러므로 <봄의 제전>은 파리의 문화적 자산이며 예술적 유산이고, 100주년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파리 시청 앞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최대한 시민들과 함께 기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싶었다. 예술가의 국적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을 존중하며 너그럽게 포용하는 특유의 태도 덕분에 한 시절 파리에는 전 세계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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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진스키 버전 공연 장면 2

 

 

초연 이후 한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니진스키의 원전 발레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들뜬 관객들은 포스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긴 줄을 섰다. 언뜻 보아도 직업 무용수로 보이는 사람들 여럿이서 나란히 포스터 앞에 섰다. 낯이 익은 오케스트라 수석 단원, 인터뷰이로 만난 피아니스트, 런던에서 일부러 공연을 보러 온 배우도 눈에 띄었다. 100년 전 충격에 휩싸인 관객들은 공연이 중단될 정도로 야유를 쏟아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해 폭동에 가까운 소요 사태를 진정시켰다는 걸 떠올리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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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며 앞으로, 새로움을 향해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특유의 손동작과 카리스마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리듬을 타는 마린스키 발레단의 무용수들은 토슈즈 없이 이교도의 복장을 하고, 음표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 춤은 고스란히 음악으로 화했고 춤과 만난 음악은 그저 찬란했다. 매너리즘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춘 니진스키의 춤은 눈부신 음표들을 승화시킨 통렬한 몸의 언어였다. 인간의 언어 너머를 향해 가는 차원의 몸짓이었다. 그렇게 춤과 음악이 또 다른 차원을 향해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을 때, 그 낯선 감각은 우리를 한껏 일깨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구현해낸 음악에 무용수들의 숨결과 열기가 더해진다. 청각과 시각에 촉각까지 감각의 향연이다. 마치 만져질 듯 생생하게 전달되는 춤으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감각의 수용체를 활짝 열고, 음악 속에 숨겨져 있던 관능과 시적 서정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음표들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닌 유리 조각처럼 날아와 피부에 박힌다. 무용수들의 불균질한 점프가 마치 잘 벼려진 칼날에 선득하게 살을 베는 감각처럼 온몸으로 다가온다. 이어서 실크 베일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음향이 늦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진다. 어떤 폭력에도 결코 훼손되지 않는 서정성, 시적인 영감과 생명력이 거기에 있었다.

 

무용수들의 춤은 태초의 ‘제의’와도 같았다. 어쩌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깊은 어딘가에서 여전히 이런 이교도들의 의식이 비밀리에 행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처녀가 제물로 바쳐지며 춤이 끝나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뜨거운 환호에 극장 전체가 흔들렸다. 뜨겁게 한 세기를 기다린 걸작과 조우한 파리의 관객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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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젤리제 극장의 내부

 

 

1913년의 청중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바로 다음 해인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은 쭉 이어졌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을 쏘았다. 비행기는 도시 전체에 폭격을 퍼부었다. 땅, 하늘, 바다… 인간은 모든 공간에서 매일 서로를 죽였다. 광기에 휩싸인 이들의 선동에 홀려 배설 하듯 혐오를 쏟아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리 없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원자폭탄이 도시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나서야 전쟁은 멈췄다. 제국들이 하나씩 차례로 해체되었다. 전쟁은 이어졌다. 낯설고 공포스럽던 초고속 열차와 비행기의 굉음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의 소음으로 편입되었다. 20세기를 지나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한 민낯의 폭력에 무뎌져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지닌 칼날 같은 음표들은 한 세기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의 존재를 단칼에 베어내어 그 단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단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 앞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예술을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거나 고양된 정신을 느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매일의 고달픈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위로와 힐링이 아니냐고. 우리에게 진실을 마주하려는 의지와 그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낡은 편안함 속에서 현실에 안주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진실을 바탕으로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가며 새로운 곳을 향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 샹젤리제 극장에는 피나 바우슈의 탄츠 테아터 부퍼탈이 무대에 올랐다. 니진스키에 이어 피나가 춤으로 풀어낸 <봄의 제전>을 보는 내내 이 음악은 우리의 고양된 정신을 새로움으로 향하도록 한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봄의 제전>… 이 걸작의 제목만으로도 다시 마음이 설렌다.

 

 

*관련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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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lery Gergiev 스트라빈스키 : 봄의 제전 (Stravinsky : The Rite of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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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erre Boulez 스트라빈스키 :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Stravinsky : The Firebird) 피에르 불레즈

 

 

*관련 공연


 발레 뤼스를 계승해 니진스키, 미하엘 포킨이 선보였던 혁신을 이어가고 있는 안무가 장크리스토프 마요가 풀어낸 <신데렐라>를 들고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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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 2019년 6월 12~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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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샹젤리제 극장 #니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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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파리에서 피아노와 법학을 공부했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 글로 남긴다. 바흐와 말러, 바그너, 피나 바우슈를 위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