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엔드> 포스터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세 나라의 합작 영화인 <해피엔드>에 일본 소녀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르>의 감독, 세계적인 거장 여든 가까운 미하엘 하네케는 왜 <해피엔드>를 만들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14살 일본 소녀가 엄마를 죽이려 약을 몰래 먹이는 것을 유튜브 영상으로 찍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고. <해피엔드>의 열세 살 소녀 ‘에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의 현실을 카메라의 직설법처럼 정밀하게 드러내는 하네케 감독은 <해피엔드>에서 스냅챗,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일상에 침투한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셜미디어에 대한 어떤 유익도, 유해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정공법으로. 소녀는 그렇게 세상과 만나고 있고 모두 그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네케 감독의 영화 감상은 책 읽기와 통한다. 행간을 읽을 수밖에 없다. 시원스러운 스토리 전개 방식도 유머나 위트, 한마디의 잠언이나 섹시한 인물이 없다. 그럼 무엇이 있는가. 현실에서 지나쳤던 진실의 순간과 눈빛, 사소한 동작들의 아름다운 선, 그리고 신과 신 사이의 호흡이 있다. 무엇보다 대단한 배우들이 있다. 장루이 트랭티냥, 이자벨 위페르가 있다.
<아무르>에서 아내를 간병했던 ‘조르주’와 그의 딸 ‘앤’이 <해피엔드>에서 이야기를 잇는다. 그 조르주와 앤이 <아무르>의 후속편을 찍은 셈이다. 아흔인 배우 장루이 트랭티냥은 하네케 감독의 청으로 은퇴한 영화계에 다시 돌아왔다. 요즘도 나는 가끔 <아무르>의 OST를 듣는다. 음악의 힘도 거들었겠지만, 조르주와 음악가 아내의 죽음 앞에 놓였던 그 차갑고 묵직한 느낌이 생생히 전해진다. <해피엔드>를 보고 온 저녁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배우들과 함께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소녀 에브는 어떻게 노인 조르주와 앤과 연결되는가. 프랑스 칼레 지역의 유지이며 건설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로랑’ 가문에 에브는 어느 날 등장한다. 우울증 약 과다 복용으로 쓰러진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을 돌볼 아버지의 새 가정에 들어온 것이다. 아버지는 새로 결혼한 뒤 로랑 가문 대가족 생활에 합류했던 것. 치매 노인 조르주와 건설회사 CEO인 앤, 그의 동생이자 외과의사인 아버지 토마스와 새 아내, 그리고 갓난아기, 앤의 아들이자 회사 후계자인 피에르, 집사와 요리사......로랑 가문의 풍경은 넉넉하고 여유 있으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에브가 처음 로랑 가문에 왔을 때, 가족들이 보여주던 따뜻한 미소와 풍족한 사랑은 어떤 ‘해피엔딩’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엄마에게 우울증 약 과다복용을 유도한 것은 바로 그 소녀.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저지른 일. 이제 아름답고 사랑 넘치는 로랑 가문 일원으로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웬걸. 알고 보니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죽음에 빨리 닿으려고 나무에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일부러 일으키고 미용사에게 총을 구해달라는, 치매 때문에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증조할아버지 조르주도 그렇고 기업 승계에 관심 없는 아들에 집착하는 할머니 앤, 재혼을 했으면서도 또 다른 열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아버지 토마스까지, 소녀가 관찰하고 인지한 어른들의 세계는 위선과 이중성의 삶이다.
그런 어른들에 의탁하고 살아야 하는 에브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건 뜻밖에도 증조할아버지 조르주의 고백. 서로에게 큰 비밀을 털어놓으며 삶의 구멍을 들여다보게 되고, 삶이 끝날 때까지는 끝을 모른다는 어떤 암시를 받는다.
<해피엔드>의 끝은, 내용을 알지 못하면 스틸 컷으로는 황홀하다. 마치 소셜미디어의 인상적인 사진처럼.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 속에 휠체어를 탄 조르주가 잠겨 있다. 조르주가 보게 되는 저 너머의 세상이 있고, 그것을 또 촬영하는 소녀 에브가 있다. 절대 ‘해피’하지 않은 ‘엔드’다!
무슨 메시지일까? 이 영화는. 감독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메시지가 없다. 메시지를 싫어한다”고. “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 만드는 일을 한다.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때문에.”
소셜미디어의 현실이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도 어떻게 보여줄까 생각하는 게 몸에 배인 삶. 보여주려는 것의 틈에 진실은 숨어 있는 것이겠지. 그 진실을 보지 못하면 모두 가짜. 물론 가짜도 우리의 삶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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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