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은 유학의 핵심 경전과 역사 및 정치서들을 섭렵하고 조선의 중요 사상가들인 이이, 이황, 조광조, 송시열뿐 아니라 당시 떠오르는 실학가들의 글을 탐독하면서 이기심성설, 예악설, 사단칠정론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논쟁들까지 다룰 수 있게 된다. 자신만의 사상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임윤지당의 학문이 그 깊이를 더할수록 그의 고독감 또한 깊어졌다. “규방 안에는 가르쳐주고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없다”(55쪽)며 자주 안타까움을 드러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검증받거나 토론할 만한 상대를 원했지만 조선은 여성에게 학문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나마 임윤지당을 인정해주고 깊이 있는 학문적 대화를 나눈 동료이자 스승이 있었다. 조선 성리학 6대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둘째 오빠 녹문 임성주다. 그는 임윤지당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평생 학문적 대화와 토론의 상대가 되어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임윤지당이 임성주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근본적인 철학적 시각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임성주와 달리 임윤지당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본성은 차이가 없으며, 개별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남성이 주도하는 지식의 장에서 억압과 차별을 내재화한 당시 여성이 이를 극복하고 학문에 도전하는 철학적 근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대 최고의 석학과 대등하게 논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임윤지당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임윤지당이 여성 성리학자로서 주류 성리학과는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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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지당 평전김경미 저 | 한겨레출판
임윤지당의 글과 여성 지식인으로서 삶의 태도는 당대 여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로 여성들이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여성 지성사의 기점으로 평가받는 임윤지당의 삶을 만나보자.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