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포스터
(* 영화의 결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관람 예정인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번에 만든 영화는 ‘슈퍼히어로물’이다. 말도 안 돼, 1969년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배우 사론 테이트 살인사건’을 다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인 할리우드>’)에 배트맨과 같은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아도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슈퍼히어로물을 만드는 태도로 임한 흔적은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영화의 엔드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마지막 사운드트랙 ‘Batman Theme’이다. 이 곡은 1966년 미국 TV 시리즈로 방영된 <배트맨> 주제곡으로 ‘배트맨~’ 합창하는 소리가 우리 귀에도 꽤 익숙하다.
‘Batman Theme’이 들어간 <배트맨> 사운드트랙은 Sun Ra Arkestra와 The Blues Project의 멤버가 참여한 앨범으로 따로 발매되기도 했다. 앨범의 제목은 <배트맨과 로빈 Batman and Robin>이다. <인 할리우드>는 타란티노가 연출 경력 최초로 실화 소재를 다뤘다고 해서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도 주인공으로 가상 인물(관련 기사 참조 https://vo.la/RI5z )인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콤비를 내세운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릭은 한물간 액션 스타다. 왕년에는 주로 서부극에 출연하며 명성을 얻었다. 지금은 액션물의 악인 연기로 근근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클리프는 릭의 더블보디, 즉 스턴트 대역이다. 릭이 일이 없으니 클리프도 지금은 스턴트 휴업 상태다. 그래도 릭의 옆에 붙어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도, 적적해할 때는 말 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할리우드 내 지위로는 릭이 위에 있어도 인간관계에서 클리프는 릭의 멘토, 아버지, 우리 형, 배트맨 같은 존재다.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Dark Knight’, 어둠의 기사다.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며 한(?) 많은 사연을 속에 품은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클리프도 자신을 숨긴 채 서부극에서 영웅 역할을 하는 릭의 대역으로 존재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함께 일하는 동료를 제외하면 알아봐 주는 이가 없어 자연스럽게 그의 사연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 음지에서 생활하는 듯하다.
<인 할리우드>는 공개 후 극 중 클리프가 촬영 현장에서 오만방자하게 구는 이소룡과 공개 대결을 펼쳐 압도하는 장면으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실제 이소룡이 주변에 버릇없게 구는 캐릭터도 아닐뿐더러 클리프와 대결했다고 해도 밀리지 않았을 거라는 게 이소룡을 아는 이들의 반론이다. 그것과 별개로 왜 이소룡과의 에피소드가 필요했을까 측면에서 <인 할리우드>가 배트맨의 변주인 또 하나의 배경이 생긴다.
이소룡은 1966년 TV 시리즈로 제작된 <그린 호넷>을 영화화한 1974년 작품에서 그린 호넷/브릿 레이드의 보디가드이자 파트너 케이토를 연기했다. 같은 해 방영된 TV 시리즈 <배트맨>과 호각지세의 인기를 누렸던 <그린 호넷>은 일종의 경쟁 상대였다. ‘배트맨’ 클리프가 ‘케이토’ 이소룡과의 3라운드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설정은 슈퍼히어로의 레이어를 덧씌우면서 그만큼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걸 드러내려는 설정으로 보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한 장면
배트맨의 보살핌(?)이 절실한 ‘로빈’ 릭은 영화 속 나치군을 화염방사기의 불로 지져 죽이는 등의 인상을 남긴 배우이지만, 할리우드의 원로 에이전트, <배트맨>으로 치면 알프레드 집사 격인 마빈 슈워즈(알 파치노)에게 지분 별로 없는 할리우드를 떠나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을 찍으라는 ‘뼈 때리는’ 충고를 듣고는 그 충격에 클리프 앞에서 질질 눈물을 흘린다. 로빈도 가면을 쓴 히어로인 것처럼 릭도 유약한 성정을 마초 캐릭터로 숨겼던 셈이다.
배트맨과 로빈 같은 슈퍼히어로의 임무는 위험에 빠진 ‘우리의 이웃’을 구하는 데 있다. 릭이 거주하고 클리프가 매일 같이 방문하는 집 바로 옆의 저택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부인 샤론 테이트가 살고 있다. 샤론 테이트를 연기한 배우는 마고 로비다. 마고 로비도 슈퍼히어로물과 관계가 깊은 배우다. 배트맨과 로빈이 속한 DC 유니버스의 악당 ‘할리퀸’으로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버즈 오브 프레이>(2020) 등에 출연했다.
극 중 고담에서 할리퀸은 배트맨과 로빈과 대립하는 관계이기는 해도 슈퍼히어로물의 넓은 의미에서는 동료이고 이웃이다. 그 이웃이 위험에 처했다. 샤론 테이트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배우이기도 했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연쇄살인마 찰스 맨슨을 신봉하는 무리가 집에 침입하여 임신 중이던 샤론 테이트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은 지금 들어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타란티노는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이다. 특정 영화와 특정 장면과 특정 배우와 특정 역사적 사실을 재조합하여 영화로 대체 역사를 만드는 게 그의 특기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나치군을 영화적으로 통쾌하게 처벌했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에서는 ‘흑인’ 장고를 내세워 흑인을 노예로 부려먹던 백인 지주에게 피의 앙갚음을 하기도 했다.
<인 할리우드>에서는 샤론 테이트 살인사건을 직접 가져오되 실제와는 다른 결과로 ‘정의’를 실현한다. 샤론 테이트를 살해하러 온 이들 앞에는 샤론 테이트가 아니라 릭과 클리프가 나타난다. 평소 스턴트로 몸을 단련하고 이제나저제나 언제 대역을 할 수 있을까 몸을 준비해 온 클리프에게 찰스 맨슨을 추종하는 이들의 공격이란 식은 죽 먹기, 끼지는 아니어도 막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릭은 할리우드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여전히 할리우드 시절에 몸에 밴 연기가 남아 있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이들에게 뜨거운(?) 응징을 가한다.
예상 밖 결말이 주는 재미만큼이나 <인 할리우드>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샤론 테이트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장면이다. 아직은 인지도가 부족해 사람들이 바로 알아보지 못하지만, 영화 속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의 관객들 반응에 감격하고 흐뭇해하는 샤론 테이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타란티노가 왜 샤론 테이트 살인사건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영화적 세계에서 샤론 테이트를 다시 되살리려 했는지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타란티노에게 정의란 영화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고, 배우에 대한 애정이며, 그래서 <인 할리우드>는 그 당시 할리우드를 향한 연서다. 타란티노는 살인사건의 희생자로 기억되는 샤론 테이트에게 배우의 지위를 다시금 선사한다. 그의 연장 선상에서 릭 달튼과 같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스타와 클리프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의 안전을 위해 음지에서 자신의 한 몸을 바치는 대역에게도 그에 어울리는 위치를 찾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슈퍼히어로’였다는 것을! 타란티노가 <인 할리우드>를 슈퍼히어로물의 은유로 만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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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shizuku26
2019.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