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이지만 가슴 속에 사랑이 가득한 다섯 살 꼬마 제제의 이야기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던 만화가 이희재는 이 작품을 “내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1986년의 일이다.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했던 그의 만화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응원을 받았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잡지사가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만화가는 원고를 회수하고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만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가 원저작권자와 협의를 거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 그 옛날의 이야기가 왜 아직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까. 여기에 만화가 이희재는 “어른이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어떤 “깊은 슬픔”을 말한다. 누구나의 가슴 안에 있는 울고 있는 어린 아이, 바로 그 아이가 우리를 제제에게로 이끄는 것일 터. 따라서 이 작품은 만화가의 말대로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는 만화다.
이 작품에 동화되었다고 할까요
1986년에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되었던 작품이죠.
이건 원래 <보물섬>에서 제 친구에게 연재 제안을 했던 거예요. 제안을 받을 때 친구가 저와 함께 있었는데 옆에서 내용을 보고 ‘저 작품은 친구보다 내가 맞겠다’(웃음) 했었죠. 친구의 만화 스타일은 활극, 무협 쪽에 더 어울렸거든요. 그렇지만 내가 뭐라 할 수는 없고, 친구에게 참고할 책이나 연극 등을 소개해줬어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잡지 편집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저와 하자고요. 친구도 그랬대요. 보니까 이건 제게 더 맞겠다고요. 그렇게 시작한 만화였어요. 당시에도 책이 출간되어 있었는데 많은 독자들이 책을 좋아했어요. 머나먼 이야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요. 무엇보다 제가 주인공 ‘제제’에게 아주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만화는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주인공 제제에게 공감을 하셨다고요?
내가 이 꼬마 같은 삶을 살았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고요. 아버지가 없는 집을 생각하기까지 했거든요. 그렇잖아요. 옛날에는 어른들이 엄하게 아이들을 대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가 안 계시면 더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 나는 이 꼬마에게 아주 공감을 했고요. 그 점에서 어쩌면 이 작품에 동화되었다고 할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원저작권자와의 협의를 거쳐 새롭게 출간을 하게 되었는데요.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30년이 훌쩍 넘어 책을 받아보셨을 때는 기분이 어떠셨어요?
책이 크게는 세 번 나왔어요. 처음에는 흑백으로, 두 번째는 ‘청년사’에서 나왔죠. 청년사에서 나온 책도 예뻤어요. 저는 이번에 나오는 책이 그보다 안 예쁘면 어쩌나(웃음) 걱정했는데요. 아주 예쁘게 나왔어요. 실은 같은 디자이너가 작업을 한 것이거든요. 이번 책은 맑으면서도 따뜻해서 순수하다고 할까, 순결하다고 할까, 이런 것이 있어요.
청년사 판은 언제 절판이 된 건가요?
처음 잡지 연재를 위해 그릴 때, 외국 작가의 것이니까 허락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 부분은 잡지사에서 책임져달라고 얘기하고 시작한 건데요. 그게 오랜 세월 안 된 거예요. 때문에 책을 절판 시키고 원고를 서랍에 넣어뒀어요. 이후 15년쯤 지나 2000년도에 들어서서 청년사에서 새로 찍겠다고 하기에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출간 동의를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문서가 오지 않아서 다시 절판을 했어요. 아마 10여 년 전이었을 거예요.
이것은 인류의 이야기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이 작품의 매력, 미덕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어린 시절의 마음이란 한없이 행복한 것일 수도, 한없이 괴로운 것일 수도 있죠. 제 경우는 한없이 세상이 두려웠어요. 그 두려움의 최대치가 아버지였고요.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우선 그 점이 나와 같다는 생각에서 매력을 느꼈죠. 이게 나의 문제, 한국의 문제가 아니구나, 지구 저편도 똑같구나, 싶더라고요. 또 이 작품은 아름다워요. 이 작품은 어린이와 어른이 만나는 내용으로는 정말 드물게 아름답죠. 아름다움에는 재미있고, 유쾌한 아름다움도 있고 가슴을 흔들어서 도리 없이 눈물을 쏟게 만들고 마음을 빼앗는 아름다움도 있는데요. 이 작품은 슬픔이 아주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 다른 시기에 쓰인 작품에 그대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하죠.
만화를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게 원작자 바스콘셀로스의 대여섯 살 때 일이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 1920년대 정도 될 거예요. 내가 그릴 때는 60년도 더 지난 때잖아요. 시간적으로는 그렇고, 공간적으로는 지구 저편이에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아득한 저 세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같이 느낄 수밖에 없는, 공감 가는 이야기라는 것이 중요하겠더라고요. 이것은 인류의 이야기고, 가족의 이야기니까 똑같을 수밖에 없구나 싶고요. 한편 만화를 그리면서는 내가 어떻게 브라질 소년을 그리면서 브라질을 잊고 우리 소년이 되게 할까, 고민도 했어요.
특별히 마음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어떤 장면인가요?
제제의 풍선 장면인데요. 제제가 애써서 만들고 있잖아요. 신이 나서 만드는 데에 취해 있는 애에게 누나는 밥 먹으러 오라고 하죠. 빨리 안 오니까 누나가 와서 어찌어찌 하다 둘이 말싸움이 붙었단 말이에요. 애는 철이 없으니까 말을 함부로 하고요. 거기에 누나가 화가 났죠. 화가 나니까 풍선을 밟아버린 건데요. 그 순간 모든 게 깨져나간 것 같더라고요. 제제는 자기의 마음을 실어서 풍선에 띄우려던 거잖아요. 어쩌면 정말로 우스운 것 같고, 방이나 어지럽히는 것 같은 짓거리지만 제제에게는 그렇지 않아요. 참 마음이 아팠죠. 또 ‘뽀르뚜가’ 아저씨의 비보를 듣고 학교에서 뛰쳐나가는 대목도 기억에 남고요.
제제를 제외하고 마음이 많이 갔던 인물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작은 누나와 선생님이죠. 제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화병에 꽃을 꽂아드리잖아요. 그 대목은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어요. 또 제제 아버지도 그래요. 아버지도 가엾은 인물이죠. 능력 없어 지내던 어느 날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편하니까 아이가 철없이 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몸부터 먼저 나가잖아요. 이번에 책이 나와 다시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있어요. 뽀르뚜가 아저씨와 놀러 간 제제가 “아저씨가 저희 아빠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잖아요.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사달라고 말이에요. 이번에 새삼스럽게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느꼈어요.
원작을 어떻게 나의 만화로 만들 것인가, 가 아주 중요한 작업이었겠네요.
만화는 내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주인공을 나의 주인공, 나의 캐릭터로 만드는 일이죠. 그렇게 해서 내 만화가 되는 것이고요. 나는 한국의 어느 소년을 머릿속 한 편에 두고 그럼에도 원작을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통용될 수 있도록 작업을 했어요.
선생님께서 생각한 ‘한국의 어느 소년’은 어떤 캐릭터였나요?
나 자신이죠. 다만 나는 제제처럼 명랑하지 않아요. 악동이지 않았죠.(웃음) 제 만화 중에 『악동이』도 있는데요. 나는 내게 있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면, 이런 것들의 반대편을 못하니까 만화로 표현하는 거죠. 내가 못하는 꿈 같은 것을 거기에 실어보는 거예요.
아이도 보고 어른도 보는 것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에서 추천한 책이기도 하잖아요. 선생님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읽으려고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잘은 몰라도 아마 슬픔의 공감이 아닐까 해요. 그런데 그 슬픔이라는 게 사실은 끝나버리고 해야 하는데요. 깊은 슬픔은 어른이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런 슬픔이 내려앉아서 어린이에게 잠겨 있다고 한다면 안 없어진단 말이에요. 그것이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아마 그 슬픔에 공감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어른도 함께 읽을 수 있는 만화를 그리겠다고 하시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만화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같은 경우는 아이들용이 아니죠, 사실은. 어른이 읽어야 할 만화예요. 어른이 한 번 돌아보면서 ‘내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구나’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또 아이들 입장에서는 제제를 통해 공감할 수 있는 거니까, 결국 아이도 보고 어른도 보는 만화죠. <개구쟁이 데니스>라는 만화가 있어요. 사실 그게 어린이 만화가 아니에요. 어른이 보는, 아이가 등장하는 만화죠. 어린이가 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어린이가 보는 게 아니고요. 더구나 저는 만화를 그리면서 어린이만 보는 만화를 그린다는 생각은 특별히 안 해봤어요. 물론 만화의 특수성이 있지만요. 아이도 보고 어른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대개는 함께 볼 수도 있고요.
만화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잖아요. 이야기를 빨리 소비하기도 하고요. 이런 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만화는 문화예요. 잘 팔리는 소설이 예술이고, 그렇지 않은 소설이 예술 아닌 문제는 아니잖아요. 만화도 마찬가지인데요. 다만 만화 역사가 비교적 짧고요. 특히 우리나라의 유교 문화와 엄숙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가벼운 것들을 경시했던 면이 있어요. 인생은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가벼워야 해요. 그런데 가벼운 사람을 경시해요. 가벼운 것이 전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러나 무거워서 버겁고, 온 사회가 칙칙하다면 그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문자는 원래 상형문자였죠. 그림에서 왔단 말이에요. 결국 문자나 그림을 인간 삶에 맞도록 쓰면 되는 것이에요.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오셨기 때문에 만화에 대한 경시를 체감한 적도 있으시겠네요.
만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만화의 매력을 못 느낀 사람들이죠. 제가 한창 젊을 때 ‘심의실’이 있었어요. 심의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변호사, 여성계 인사 등이에요.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한심할 정도로 만화에는 무식했어요. 자기 분야는 공부해서 잘 알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거죠. 그런데 이해가 부족한 분야를 무시해버려요. 한 번은 동료의 만화가 검열 예제로 나와 있는 걸 봤어요. 청년A와 B가 마당에서 싸우다가 B가 A를 깨진 소주병으로 찌르는 장면이었어요. 그 장면을 검열해놓은 거예요. 하지만 맥락을 보면 그럴 수가 없어요. A가 B의 동생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껴 사랑을 했는데 술주정뱅이 B가 그날 마당에서 동생을 때리고 있던 거거든요. A가 폭력을 그만두라고 하니까 B가 “얼씨구” 하면서 소주병을 깨서 찌른 거죠.
그걸 단순히 폭력적이라고 본 거군요.
나는 그 장면이 그 만화의 가장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장면이 있어야 이 만화가 온전한 건데 그 장면을 삭제하다니요. 제가 그걸 들고 심의실에 가서 심의위원들에게 물었어요. 이 만화를 아느냐고요. 아무도 몰라요. 그 장면만 본 거예요. 그 다음 장면이 이래요. 소주병으로 찌른 건 폭력이죠. 그런데 폭력이 딱 들어왔을 때 A가 사랑의 힘으로 오히려 한 발을 더 밀고 B쪽으로 나가요. 찌르면 아파서 물러서야 하는데 도리어 들어오니까 B가 아주 놀라면서 물러선단 말이에요. 이것은 폭력을 사랑의 힘으로 제압하는 장면이에요. 그것을 폭력이라고 검열하는 게 맞느냐고 심의위원들에게 되물었어요. 저도 워낙 심의에 걸린 경험이 많았어요. 사무치죠. 그런 것 역시 따지고 보면 만화는 아동이 보는 거니까 모든 폭력은 안 된다, 는 쪽으로 가버린 거죠.
자기 색깔을 가졌으면
후배 만화가를 만나면 꼭 해주시는 말씀은 뭔가요?
나 자신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예요. 대개 자기 자신이 뭔지 모르기도 쉬워요.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익어가는 과정인데 처음에는 쓸려가거든요. 유행에도 쓸려가고요. 눈 똑같이, 코 똑같이 그린 그림을 만화가 이름 떼고 보면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를 보면 하늘에 거대한 UFO가 떠 있잖아요. 난 아시아의 상공에 일본의 UFO가 떠 있다고 생각해요. 만화에 관한 한 그래요. 그것이 태양을 가리고, 우리는 그림자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아시아 만화가 일본 만화의 영향력 아래 있단 말이에요. 중국 만화도 그렇고요. 그만큼 일본 만화류가 대중과 친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죠. 그러니까 그것을 때에 따라 내 것과 결부시키되 시간이 가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색이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굳이 말하자면 자기 색깔을 가졌으면 하는 게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사실은 ‘알아서 해라!’(웃음)라는 의미예요.
선생님께서 나의 만화에 있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옛날부터 ‘마음’이라는 것이 많이 신경이 가더라고요. 어찌 보면 추상적인데요. 마음을 어떻게 담아낼까, 마음을 어떻게 교환할까, 소통할까, 이것이 제 주제라면 주제예요. 다만 이것은 만화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 해당하는 얘기죠.
지금 『사기』를 작업하는 중이시라고요?
2014년부터 시작한 작업인데요. 원래 저녁부터 새벽까지 작업을 하는데 요즘은 좀 지쳐요. 이제 절반이 조금 넘었고요. 중국 고대사라는 내가 모르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해서 아주 재미있어요. 이 재미있는 인물들을 오늘로 끌어내서 오늘의 사람들, 내 옆의 이웃들이 그들을 만나게 하자는 생각이에요. 단지 옛 것을 끌어내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사기』 속 어떤 인물에 요즘 인물로 송강호를 집어넣을까, 설경구를 집어넣을까, 어떻게 하면 더 흥미로울까, 생각해보는 거죠. 해보니까 재미있어요. 앞으로 2년 정도 더 작업해야 해요. 곧 1, 2권이 출간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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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J.M. 바스콘셀로스 원저/이희재 그림 | 양철북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선과 그림체, 인물들의 풍부한 표정과 현실적인 묘사, 생생한 장면들 속에서 제제는 낯선 브라질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동네, 어느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마냥 가깝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글자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인상 깊은 만화이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