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병원에서 “보호자 꼭 같이 오세요”라는 말에 “제가 보호자인데요”라고 말해야만 하는 1인 가구들은 아플 때가 가장 서럽다. 나 역시 아플 때의 내가 얼마나 침잠 상태로 빠져드는지 잘 알고 있어서, 여러 운동을 하고 몸에 나쁘지 않은 음식들로 가려 먹는다. 그것이 나를 귀하게 여기는 나의 태도임을 알게 된 후부터.
하지만 타고나기를 면역력이 약한 나는 자주 아픈 편인데, 요즘이 딱 그랬다. 주말에 쏘다니지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몸은 마음처럼 따라주질 않았다. 좋아하던 음식과 술을 놓았는데, 왜 컨디션은 나아지질 않는 건지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 아프다고 말 하는 것도 이제는 팀원들에게 꾀병 같아 보이는 건 아닐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마음에 이 상황이 더 화가 났다. 병원에서도 아픈 이유를 쉬이 찾지 못하여서 내시경까지 총동원했지만, 아무래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신경성’이라며 스트레스 받지 마라는 말을 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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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만 있으면 답답해하는 나는 내 자의가 아닌 몸의 명령에 의해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을 너무나도 싫어한다. 쉬라는 뜻이겠구나, 하고 받아들일 법도 한데 내가 이 쉼으로 인해 하지 못한 것들을 먼저 생각하기 바쁘다. 애인은 이런 내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조바심 내는 것도 너에게 스트레스 주는 건 아닐까?” 하고 되물었다. 사실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뒷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몸은 쉬거나 놀고 있으면서도 뒤에 할 일을 생각하며 미리 걱정하고 있는 때가 다반사였던 내게, 그의 질문은 곰곰 생각해볼 일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가만 쉬었던 날이 손에 꼽는 것 같다. 스마트 워치는 매일 나의 움직임과 운동을 기록하기 바빴고, 오래간 기다려온 책을 준비하고 있었고, 취미로 시작한 오케스트라도 내 삶에서 큰 부분이 되었고, 갑자기 관심이 생긴 자격증 시험도 준비했다. 가족들을 보러 매달 한 번씩은 본가에 내려갔다. 계획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때가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나름대로 게으르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나열하고 보니 꽤나 열심히 살고 있었다.
삶을 즐기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때로 어떠한 생각에도 지배 받지 않고 감각적으로 느끼는 생물 본연의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을 막는 높은 담장 대신 튼튼한 울타리를 세워 마음의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햇살도 바람도 막아버린 담장 안에서는 어떠한 식물도 자랄 수 없는 법이다.
-박수현, 『나는 내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중
나만 챙기면 되는 1인 가구의 편안한 삶을 즐기고 있다. 나만 챙기면 되는 삶이란 누군가에겐 그토록 원하는 삶일 테다. 그렇지만 무언가 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던 내겐 스스로가 자신을 버겁게 만들고 있었던 것도 같다. 점심 시간마다 즐겨 찾는 회사 근처 요가원에서는 ‘지금 여기의 나에 집중하세요’라고 하지만, 수련이 미숙한 나는 그 순간에도 오늘 해야 했던 일들을 떠올린다. 오늘의 계획은 이렇게 짜야겠다, 혹은 들어가면 이것부터 해야지 라던가. 하다 못해 집 냉장고의 청소가 되지 않은 것까지 생각한다.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지 못한 요가 시간에는 결국 동작 하나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들어온다.
내겐 스트레스가 없다고 생각했다. 잘 움직이고 잘 먹고 꽤나 자주 행복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스스로를 기쁘게 할 줄 아는 방법을 꽤 잘 알고 있으므로. 케이크 한 조각이면 보상이 되는 나여서 고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보상 뒤에 무엇이 따를지 걱정하는 나도 결국 따라오는 것이라서, 그 행위들은 결코 내가 온전히 나를 기쁘게 하는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뒤로는 그 보상을 내게 주면서도 ‘이걸 먹으면 얼마나 움직여야 하지?’를 생각하게 됐고, 책을 앞두고는 어떤 일이 끝난 후 영화 한 편의 여유를 즐기면서도 ‘집에 가면 원고를 봐야지’하고 뒷일을 먼저 생각했다. 그것이 꽤나 나를 괴롭혔다. 지금 이 순간의 나보다 미래의 나를 먼저 걱정하는 일이 반복되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집중하기 위한 주문 : 내일 걱정 말고 푹 잘 자기. 지금 할 것이 아니라면 해야 할 것을 미리 걱정하지 않기. 벌어지지 않은 일을 애써 가정하지 않기. 다른 사람들이 무얼 하고 살건 나는 나대로임을 잊지 않기.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잠을 못 자 눈가가 떨리는 요즘의 나에겐 꽤나 필요한 주문인 것 같다.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한 행동들이 결국 강박을 만들기도 한다는 걸 정말 모르고 살았다. 무언가 해야만 내가 완성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남들이 무얼 하고 살건 나는 잘 하고 있다고 나를 다독여야 하니까. 아무래도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지만, 이유도 모르고 요동치는 뱃속이 조금은 잠잠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맞이 해야지.
아침에게 발견되지 않으려고 장롱 안에 숨었다 / 나라는 사실이 숨겨지지 않았다
벽을 문지르자 덩어리가 만져졌다 / 밀실 안에서 반죽이 부푸는 방식으로 / 나는 두 명이 되었다//
깜짝 놀라 철제 손잡이를 돌리자 / 문밖에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오늘은 어떤 나로 외출할까 /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중략)
나는 식탁에 엎드린 나를 단단히 뭉쳐 / 꿈속으로 데려갔다
하얀 종이 위에 우리는 눈사람으로 서 있었다 / 지루함이 녹아내릴 때까지 / 만들고 부수길 반복하며 (후략)
-임지은, 『무구함과 소보로』 중 ‘내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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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함과 소보로임지은 저 | 문학과지성사
수많은 명사가 뜻밖의 의미로 튀어 오르는 전환의 순간을, 무화된 구조 속에서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나영(도서 PD)
가끔 쓰고 가끔 읽는 게으름을 꿈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