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을 만난 날은 설 연휴 마지막 대체 공휴일이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서인지 거리는 여느 때보다 휑했지만, 그를 맞을 마음은 분주했다. 월드 뮤직 아티스트로의 하림, 과거 싱어송라이터로의 하림을 모두 아울러 담고자 하다 보니 준비할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지구가 멸망하는 것보다 느릴 것 같은' 세 번째 정규 앨범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직접 만나는 내가 이럴진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림의 디스코그래피는 2004년 2집
2집은 스팅(Sting)의
변화의 과정을 소개해달라.
굉장히 많은 단계를 거쳤다. 첫째는 2집 내기 전 아일랜드 여행을 떠났을 때다. 길거리에서 피리를 불며 버스킹을 하는 학생과 친해져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거리 연주를 수입의 수단이 아니라 연습의 기회로 생각하는 데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이후 지금은 수 노래방이 있는 홍대 사거리에서 드렐라이어(Drehleier)를 들고 길거리 공연을 펼쳤다. 너무 재밌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는 당시 공연 제의를 대부분 거절한 것이다. 많은 제안이 있었지만 뭐랄까... 지금 편하게 생각해보면 콤플렉스나 트라우마가 컸던 것 같다. 특히 '출국', '난치병' 등 내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길에서 시작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짜 내 음악이다!”라는 가치관이 있었다.
셋째는 앨범 발매 전, 내가 데뷔하던 시기 싱어송라이터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군대를 갔다 오니 김동률, 이적, 윤종신 등 함께 음악 하던 선배들이 모두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 형들이 생각하기에 나는 '싱어송라이터 그룹'의 끝물에 위치해있었고, 때문에 당시 “안타깝다”는 충고를 많이 해줬다. 이후 많은 고민을 했다.
이상의 가치관 변화가 바로 세 번째 정규 앨범 발매를 막은 원인 아닌가.
맞다. 가요계 활동을 중단한 후 음반 작업, 음원 발매 등 다양한 활동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대놓고 뒤돌아선 건 아니다. 앨범만 내지 않았다 뿐, 음악 산업에 한 발을 들여놓고, 내가 원하는 월드 뮤직과 내가 생각하는 음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노래하는 가수보다 뮤지션들 사이에서 세션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더불어 홍대 곳곳에서 공연도 만들고, 악기 연주회도 가지며 계속 바쁜 나날을 보냈다.
분주히 노력하며 음악 세계를 개척해 온 하림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2019년 5월 24일, 2년 간의 연애 끝에 폴란드에서 화촉을 밝힌 것. 방랑 뮤지션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늘 결혼을 하고 싶었다”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동시에“결혼을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보진 않는다. 평화로운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정지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며 소신을 밝혔다. 미지의 뮤지션에 대한 환상과 이미지는 하림 스스로가 아닌, 재능 있는 아티스트를 기다려온 대중의 갈증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하림의 3집에 대한 기다림이 크다. 자그마치 16년 동안 후속작을 내지 않았다. 이제 그만 기다리게 해 달라,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나.
매년 3집 계획은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밴드 공연을 하다 보면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아랍과 중앙아시아의 음악을 다루는 블루 카멜 앙상블, 집시 음악을 추구하는 집시의 테이블, 아프리카의 음악을 연주하는 아프리카 오버랜드 활동을 함께 병행했다. 음반 없이 공연을 하는 위치라 앨범 작업에만 매진할 수 없었다.
네오 소울 스타일의 1집과 월드 뮤직이 첨가된 2집 모두 훌륭한 완성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이후 후속작이 발매되지 않은 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많다.
동료들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앞서 언급한 블루 카멜 앙상블, 집시의 테이블, 아프리카 오버랜드 모두 10년 이상 꾸준히 공연을 이어온 팀들이다. 하림의 이름으로 솔로 앨범을 내진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림은 이런 다채로운 성격의 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공개하는 것이었다. 밴드를 넘어 공연 콘텐츠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대표적인 활동을 소개해달라.
집시의 테이블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본 음악극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월드 뮤직 갈라쇼'다. 아프리카 오버랜드는 극단 '푸른 달'과 함께한 음악 인형극 '해지는 아프리카'를 선보였다. 블루 카멜 앙상블은 국립극장에서 '먼 아리랑'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펼쳤다. 스토리가 있지만 대사보다 음악이 많은 공연을 추구한다.
최근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매체가 다양해지는 추세에 하림의 '콘텐츠 다변화'가 어쩌면 새로운 성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엔 관객들에게 정식 발매되지 않은 노래를 부르기 전 '유튜브에 검색해보세요!'하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대박을 바라고 음악을 하진 않는다. 스타가 되려고 음악을 시작하면 너무 힘들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만큼 이를 기록으로 남겨 발표하고 싶은 욕구도 분명 있을 텐데.
'어떻게 앨범에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겠느냐'라는 생각이 컸다. 그래도 최근에는 음원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오버랜드의 곡은 모두 창작곡이라, 꼭 기록하고 싶다.
프로젝트 음악, 콘텐츠 다변화의 노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하림의 솔로 앨범에 대한 아쉬움도 분명 존재한다.
지금은 아프리카 오버랜드가 우선이다. 회사에서도 3집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한다. 하지만 솔로 3집을 꾸준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알아주셨으면 한다. 1998년 처음 쓴 계약서에 '기간 4년, 앨범 3장'이 명시되어 있었고, 계약 기간이 종료된 후에도 “3집을 녹음한 후에 회사와 재계약하겠다”라는 의사를 밝혔다. 실제로도 차기작을 위해 만든 곡들도 있다.
그 곡들은 어떻게 됐나.
내가 만들었던 노래를 주변에서 많이 가져갔다(웃음). 그러다 보니 대중음악은 남지 않고, 월드 뮤직만 남았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의 목표는 베일에 싸여있던 세 번째 정규 앨범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었다. 허나 차츰 인터뷰를 진행하며 '성공'을 바라보는 하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한국 대중음악계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지만 그간 하림은 본인의 지향과 타인의 시선 사이 고뇌하며 음악으로 방랑해왔다.
“'음악은 1위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대중음악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주위에 있으려고 했던 것도 모두 콤플렉스에서 나온 거였더라고요.”라 과거를 회고한 하림은 “그 모든 감정을 일기장에 기록했죠. 이제는 자유롭게,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며 미소를 지었다.
세 번째 앨범이 미뤄지는 데 있어 앞서 언급했던, 대중음악계를 꺼리는 심리적 요인도 분명 존재할 텐데.
과거의 경우 '출국' 같은 노래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월드 뮤직을 더 불렀을 것이고... 지금은 마음의 화가 풀렸다. JTBC <비긴 어게인> 출연 후 많이 변했는데, '음악은 보편적이면서 특수하다'는 가치관을 갖게 됐다. 귀를 막지 않고선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기에 보편성을 갖지만, 스피커나 라이브 등 청취의 방법이 서로 다르기에 듣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매체다. 그래서 음악가는 내가 부르고 싶다, 부르기 싫다가 문제가 아니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원할 때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고 본다. 세 번째 앨범을 꼭 발표할 것이다.
3집의 방향을 미리 정해두었나.
포크 음악을 계획 중이다. 가사 노트도 빼곡하다. 주제는 먼저 말한 대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양한 주제를 다뤄보고도 싶고, 월드 뮤직과 더불어 1집에서의 소울 스타일도 가미하고 싶다. 데뷔 당시 사람들은 네오 소울 스타일을 '이상한 음악'이라 여겼다. 다시 한번 다뤄보고 싶다.
지난 10년 간 하림은 한국예술원, 동덕여자대학교, 상명대학교 대학원 등 실용음악과 교편을 잡아왔다. 수강생들에게 음악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가사 쓰기를 강조한다. '자기 이야기를 쓰라'를 자주 언급한다. 남의 이야기를 쓰면 표현이 상투적이다.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 자신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특히 이 부분은 싱어송라이터 지망생들에게 강조하는 지점이다. 노래에 대해선 발음을 강조했다. 말은 패션이 아니다. 발음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음악을 포괄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실용음악과에 처음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만을 음악의 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음악의 길은 다양하고, 새로운 방법을 택하더라도 그 또한 음악이다. 상업적인 프레임에 갇히면 형식적인 결과물밖에 나오지 않는다. 월드 뮤직에 관심 있는 친구들에게 특히 팝 음악의 문법 대신 새로운 아이디어, 상상력을 요구한다. “음악을 도구로 보지 말자. 음악은 평생 곁에 두는 친구다!”
하림이 지향하는, 음악가 중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스팅의 광팬이었다. 건강하고 히트곡도 많고, 후배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나도 스팅처럼 본인 소유의 성에서 녹음을 해보고 싶다(웃음).
하림이 사랑하는 음악도 소개해달라.
스팅의
하림의 음악 여정도 어느덧 20년을 넘겨 항해 중이다. 긴 음악 활동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듣고 싶다.
안타깝지만 1, 2집 땐 없는 것 같다. 2018년 블루 카멜 앙상블과 국립극장에서 진행했던 여우락 페스티벌 '먼 아리랑' 공연이 기억이 난다. 그동안 월드 뮤직을 해왔던 나의 감정, 유랑하는 뮤지션으로의 삶을 '아리랑'과 접목하여 진행한 공연이다. 익숙하지 않은 악기의 소리와 함께 극의 이야기를 따라오는 관객들의 표정을 보며 굉장히 뿌듯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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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 2집 - Whistle In A Maze 하림 노래 | 뮤직앤뉴 / 티엔터테인먼트
총 13곡이 수록 되었는데 모든 곡을 하림이 직접 작곡 하여 작곡가 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아일랜드 민속악기들이 이국적인 느낌을 주며,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료한 일상을 떠나서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라는 메시지와 이국적인 악기들의 조화로 흥겨운 느낌을 더해준다.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