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은 돌베개 디자이너로 일하던 201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동신사를 차리고 ‘인덱스카드 인덱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채집한 단어들이 담긴 인덱스 카드를 소설가 정지돈에게 보냈고, 돌아온 인덱스 카드와 글을 합쳐 『인덱스카드 인덱스』 1권을 출간했다. 2019년 2월에는 개인전 <인덱스카드 인덱스 6>를 열었다. 전시 도록의 타이틀은 『인덱스카드 인덱스 7』이다. 김동신이 디자인한 책 표지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도 글자다. 목차를 그대로 끌어오거나(『평범함에 대하여』, 『잔혹함에 대하여』 ) 챕터 타이틀이 중심에 놓이거나( 『전복과 반전의 순간』 ) 책에 등장하는 작가 50인의 이름과 생물 연도가 누구 하나 크거나 작지 않고 같은 크기의 글자로 쓰여 있다(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 그렇게 텍스트가 디자인이 된다.
『노무현 전집』 보급판 표지. 애장판은 각 권의 지질을 달리하고, 뒤표지에 각기 다른 저자의 뒷모습을 싣는 등의 장치로 ‘태도’를 담았다.
활자를 디자인 요소로 사용했다기보다 텍스트 그 자체가 표지가 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타이포그래피 중심과 그렇지 않은 작업의 비중은 반반쯤 되는 것 같다. 어찌 된 일인지 타이포그래피 중심으로 작업한 책들이 더 좋은 평을 받았다. 내 성향과 잘 맞아서 그런 게 아닐까? 글자를 읽고 쓰고 만지는 걸 좋아한다.
활자가 김동신 디자인의 특징이라고 봐도 될까?
한 평론가가 내 디자인에 대해 “시그너처 디자인이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참 좋았다. 책은 ‘시대’라는 맥락에 놓여 있는 사물이다. 시대를 둘러싼 여러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텍스트라고 본다. 내 경우, 디자인할 때 개념을 먼저 세운다. 스타일은 그다음에 정하는 편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한정판 표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을 오직 날짜로 표현했다.
디자인한 책 가운데 김동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
『노무현 전집』. ‘디자인은 태도다’라는 말이 있다. 『노무현 전집』 작업을 시작할 때, 이 말이 먼저 떠올랐다. 대통령 전집이라고 하면 으리으리하고 무게 있는 디자인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 디자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저자가 생전에 가졌던 태도가 내 의지와 같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방균형정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자체의 색과 서체를 가져와서 디자인하기로 해놓고 많이 애를 먹었다. 내 눈에 익숙하지도, 평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재료들이었으니까. 나한테도 큰 도전이었다.
‘위계의 파괴’ 또한 김동신 디자인의 특징이 아닐까 싶은데. 때론 제목보다 챕터 타이틀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한다. 표지에 제목이 없기도 하고.
룰이나 유행이 너무 확고하면, 오히려 따르지 말자고 생각하는 쪽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내 작업들을 꼽아보니, 룰에서 어긋난 것들이더라. 『이것이 인간인가』 한정판은 저자가 수용소에서 보낸 시간만으로 표지를 구성했다. 지워 나간 날짜와 지우지 않은 날짜들이 책의 진의를 전달할 수 있도록. 『책임에 대하여』 는 일본이 지난 20년간 누린 호황이 ‘도금’에 불과하다는 텍스트를 담고 있다. 그 현실을 ‘반영’하고, 또 한국과 일본의 두 지성이 나눈 대화를 담은 책이라는 본질을 여러 개의 모듈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뒤표지까지 여덟 개 모듈로 쪼개 멀리서 보면 무늬처럼 보이는 것도 묘미다. 『잔혹함에 대하여』 는 일상에 숨어 있는 악을 보여줄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나온 표지다. 많아야 숨길 수 있지 않나? 그래서 목차를 끌어온 후 악이라는 글자를 지워버렸다.
『책임에 대하여』 표지. 진실을 덮고 있던 도금이 벗겨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책 전체를 하나의 무늬로 만들었다.
디자인 과정이 가장 즐거웠던 책은?
『역사의 역사』 .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읽은 역사책들에 대한 책이다. ‘책들의 책’임을 드러내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책을 아름답게 찍는 사진가 김경태 씨에게 SOS를 쳤다. 그 사진들이 책의 표지와 내지 곳곳에서 독자를 안내한다. 책이 나오고 정말 많은 평을 들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독자 의견을 이토록 선명하게 실시간으로 접한 적이 없어서, 그 체험 자체가 신선했다.
『역사의 역사』 99g 에디션
‘북 디자인은 시대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지난 2월에는 보안여관에서 ‘북 디자인과 여성’을 주제로 북 토크를 했다.
이 또한 내가 가진 태도와 닿아 있다. 2016년 즈음해 국내에서 페미니즘이 리부트됐다. 문득 ‘나도 페미니스트구나’ 하는 인식이 들었다. 책을 만들면서 성장한 것 같다. 두 번째 요인은 아마도 현실.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의 70%는 여성이다. 그런데 임원급으로 올라가면 성비가 역전된다. 여성 에디터들이 처한 감정 노동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듯 평등하지 않은 상황을 인지하고 이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나이고, 그런 내가 디자인에 반영되는 것 같다.
인하우스 디자이너 생활을 마치고 독립한 지 갓 한 달이 됐다. 목적지는 어디인가?
<겨울왕국2> 주제가 가사처럼 ‘in to the unknown’,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로 회사에서 나왔다. 아마도 올해는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될 것 같다. 평생 북 디자인만 한다는 건 나에게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독일 출판사 ‘스펙터 북스’의 책을 좋아한다. 특히 존 케이지 작품집은 가까이 두고 즐겨 본다.
마지막 질문이다. 한 권의 책에 디자이너가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책은 협업의 산물이다. 디자인의 영역은 정확히 N분의 1이 아닐까? 자의식 과잉이 될 필요도, 그렇다고 텍스트가 주인이고 디자인은 장식일 뿐이라고 움츠러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 권의 책 때문에 책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이었던 건축가 미스 반데어로에가 베를린에 지은 집에 다녀오는 길에 구입한 책인데, 들춰볼 때마다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을 복기하게 된다. 복기와 환기,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N분의 1이 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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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유시민 저 | 돌베개
역사를 읽고 쓰는 의미와 방법을 역사가의 삶과 그들의 텍스트로부터 추려낸 『역사의 역사』도 곧,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해석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는가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정다운, 문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