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임진모가 뽑은 ‘내 인생의 10곡’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를 통해 우리가 긴급 동의한 것은 오랜 핵심정서, 바로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글ㆍ사진 이즘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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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처음 틀었던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음악인생의 시작이라고 밥 먹듯 얘기한다. 이후 서구 로큰롤, 팝으로 냅다 달려갔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 프리 틴 때 나를 건드린 노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 음악을 따라가던 이 시절의 대세는 트로트와 미국식 스탠더드 팝. 소멸된 것 같다가도 이 음악들은 새봄에 다시 싹이 트듯 내 삶에서 잠재와 현재(顯在)를 반복했다. '목포의 눈물'은 최초의 (일제에 대한) 저항가요일지 몰라도 내게는 '학교 밖의' 첫 노래였다. 초등 6학년 봄 소풍 때 학부모 대표로 나서 이 곡을 부르신 한 급우 어머님의 그 구성진 가락을 잊지 못한다.


황금심 '외로운 가로등'(1939)

세상이 무서워 방에 있는 게 좋았다. 대신 외로웠다. 이 노래는 실로 외로움이 실연 통(痛)을 더 높이는 블루스 비극미의 극치일 것이다. 내 스타일이었다.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속을/ 너마저 울려주느냐..' 황금심의 목소리는 증폭기가 필요 없을 만큼 커서 더 둔중하게 가슴을 내리누른다. 나중 차인표 송윤아 주연의 드라마 <왕초>(1999)에 이 곡이 나왔을 때 마음속에 뭔가가 불쑥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박신자 '땐사의 純情'(1959)

질긴 생명력으로 따지면 이 곡을 넘지 못한다. 어릴 적 못났다는 말을 듣고 자란 터라 이상하게도 처량함, 막막함, 구슬픔 등등의 '비탄'쪽 정서에 이끌렸다. 게다가 노랫말은 '10대가 들어선 안 되는' 내용이라 더 깊숙이 들어왔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나중 동네삼촌이 그랬다. 예뻤던 박신자는 미인은 박명이라고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고. '울어라 색스폰아∼∼' 금지 처분이 풀리던 1988년 시점에 나온 이순길 버전도 기억에 남는다.


박재란 '밀짚모자 목장아가씨'(1964)

개발시대 그 못살던 시절에 밀짚모자는 뭐며 포플라, 양떼, 목장은 뭔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들이라서 혹했던 건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를 통해 우리가 긴급 동의한 것은 오랜 핵심정서, 바로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마치 애들한테는 고구마말랭이와 쌀엿을 내동댕이치게 한 초콜릿, 아이스콘의 습격과 같은 맥락. 첫대목 '시원한 밀짚모자'와 후렴구 라라라를 지겹게 따라 불렀다. '이런 게 양키 구라파 음악이구나!!'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가 이 곡을 들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런 게 북한 노래구나!!'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1966)

최고의 콤비가 된 박춘석과 이미자 콜라보레이션의 서막. 1964년 '동백아가씨'의 센세이션으로 데뷔 5년이 지나서 마침내 정상에 오른 '엘레지의 여왕'은 라디오연속극 주제가에 또 한 번 일절 장식과 기교가 없는 미니멀리즘 창법으로 선풍을 재현한다. 그럼에도 순정의 힘 때문인지 후반 '서울 ∼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는 수백 번 꺾기가 구사된 듯 절절하다. 괜히 이미자 이미자 하겠는가. 형들은 조금은 이기적인 가사로 바꿔 불렀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지금도 60대 이상 어른들한테 꿈이 뭐였냐고 물으면 섬마을 선생님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있다.


최희준 '종점'(1966)

작은집의 한 삼촌이 내게 그랬다. '이런 노래는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데...' 영화 주인공의 산업스파이 행각이 들키면서 자살로 막을 내리는 19금 소재와 그 처절한 사운드트랙 노랫말을 전제해서였을까. 그런데도 '광복20년' '팔도강산'과 같은 건전가요보다는 비참가요를 선호했던 나는 안 되는 쪽으로 갔다. '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아아아아 내 청춘/ 꺼져가네..' 어린 애였는데도 꺼져가는 것에 왠지 마음이 갔다. 고 최희준은 부드러운 냇 킹 콜 창법에다 클라이맥스의 폭발성도 겸비한 당대 극강 보컬이었다.


배호 '두메산골'(1966)

각 시대의 고유정서라는 중요한 함수가 개입하기 때문에 꼭 내가 들어온 음악들이 대물림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과거의 음악이 흘러간 것들이지만 그중 더러는 이후 세대의 필요에 의해 부활하기도 한다. 과거시제가 역사성을 획득하는 순간인데 이 대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가수가 배호다. 최희준이 굵음이라면 배호는 가녀림이다. 아픈 몸이어서 그랬을까. 쑤욱 치솟는 고음, 이건 한마디로 절세 가창(佳唱)이다. 이 곡에서 한번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불며'와 '아니 떠나리/ 수수밭 감자밭에' 부분을 들어보라.


남진 '어머님 얼굴'(1967)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를 달군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때 대체로 나훈아 편에 섰지만 곡 하나만 고르라면 배우 뺨치는 미남이 애타게 부른 이 노래였다. '어머님/ 참사랑에/ 목이 타는/ 어린 자식..' 일반적 트로트가 아니라 모던 팝이라 할 만큼 세련된 곡조였다. 남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하면서 비슷한 곡 '어머니'가 더 떠서 이 곡이 묻혀버렸다고 설명했다. 늘 색다르고 새로운 노래를 찾았다. 돌이켜보면 다양성 욕구가 그때 이미 싹텄던 것 같다.


이장희 '그건 너'(1973)

지금도 말과 글에서 고매한 문어체가 아니라 속화된 구어체를 사랑한다. 이 곡은 정형화된 가사패턴으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형이 원색적 톤으로 마구 지껄이는 느낌이었다.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는 딴 가요에는 없는 가사였다. 언어는 그렇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엉김, 반항, 비타협이 넘실거렸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후 나도 모르게 씩씩해졌다.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1974)

나중에 이런 걸 기타리프라고 한다고 알게 됐지만 처음 들었을 때 기타 전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슷한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 록의 대부'라는 수식처럼 거문고 가야금을 뜯는 듯한 기타연주는 물론, 가락 전체가 한국적이었다.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평. “그 누구에게라도 단 5음계만으로 이렇게 멋진 곡을 써 보라고 해보시라. 기념비적인 곡으로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100년 후엔 '아리랑'과 같은 반열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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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