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데 덮친 격이다. 코로나에 장마라니. 한 달 가까이 어두운 하늘과 높은 습도가 지속되니 여름이 아닌 모르는 계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가 발발한 후 반년 동안 여행도 접고, 노래방도 접고 웬만한 흥은 다 접고 지냈다. 그나마 따릉이를 타고 제기동에서 한남동까지 달리는 게 유일한 유흥이었는데, 장마로 인하여 그마저도 못 타고 있다. 자전거만이 유일한 성취감이었는데, 막상 못 타게 되니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무엇을 잃는 것에 익숙해져서도 있겠지만, 자의가 아닌 불가항력으로 못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그동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소극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만든 스트레스에서 잠시 해방된 자유랄까. 촬영 날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되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쉴 수 있어서 기쁘기도 한 그런 느낌. 사람에 따라서는 같은 재해를 겪으며 이렇게 느끼는 게 사치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느낌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지극히 나만의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 있는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어두운 아침이 나쁘지 않았다. 방충망에 매달린 매미를 보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높이 날아와 비를 피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거실에서 비와 매미를 보며 12시까지 기다리다 배고파서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웠다. 밥해달라고 깨운 게 아니라 먼저 밥을 먹을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 깨운 거였는데, 벌떡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완탕을 끓여줬다. 장마에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였다. 나란히 앉아 완탕을 먹으며 부쩍 대화가 없어진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 각자 시나리오로 씨름하고 있는 상황 자체와 부쩍 대화가 없어진 우리 관계 모두 어둡고 습한 장마 같았다. 늘 솔직할 수 없고, 감정을 숨기기도 하며, 함께 있어도 고독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이 결혼 생활이구나. 가끔 힘을 내서 나누는 작은 농담에나 기대어 우리는 긴 장마를 보내고 있었다.
밥을 먹고 다시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일기를 써야 되는데 쓰고 싶은 게 없었다. 뭐라도 써야지 싶어서 이 소재 저 소재로 써 보았지만, 신경질만 나서 다 갖다 버리고 있을 때 남편이 노크를 했다. 방문 너머로 커피를 사러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 왔다. 그래, 일단 나가면 환기가 되면서 적어도 쓰고 싶은 것을 쓸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남편을 따라 나섰다. 같이 걷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커피 두 잔과 스콘 하나를 사서 나오는데,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슬부슬 오더니 점차 빗줄기가 굵어져서 우리는 커피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함께 피할 수 없는 비를 정면으로 맞으며 뛰니 젖는 만큼 쾌감이 번졌다. 비를 뚫고 뛰는 것은 기쁜 일이구나. 왜 그렇게 비를 피하려고 노력하고 살았을까. 몸이 젖는 게 뭐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젖어도 스콘은 젖으면 안되기에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 앉아 지켜온 스콘을 나눠 먹는데, 비에 젖어 촉촉하게 올백이 된 내 머리를 보더니 남편이 그랬다.
- 너 거기에 나오는 사람 같다
- 어디?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거기에 나오는 일본 야쿠자 같애.
- 나 여잔데 안 꿀리나?
- 전혀. 충분해.
우리는 그 말에 또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남편의 꿈에 나왔다는 <원령공주> OST를 함께 들으며 기적같이 장마에 대하여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내가 남편에게 장마에 대한 에피소드를 쓸 건데, 옛날에 비 쫄딱 맞으며 키스했던 이야기를 써도 되냐고 물으니, 거긴 니 영역이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리고 한 템포 후 누구냐고 물었다. 결혼 8년 차에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곡간에 식량이 떨어지지 않은 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더불어 내 영역을 철저히 존중해주는 남편에게 고마웠다. 남편 덕에 생각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를 들으며 일기를 쓰는데, 그 OST의 첫 번째 곡 제목이 하필 <어느 여름날>이라니. 이런 선물 같은 우연을 봤나.
장마는 곧 끝날 것이고, 코로나도 끝나면 그동안 참은 만큼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가야겠다. 그때까지 작은 농담들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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